기타

(미오슬레) 책임

책과 집 2023. 4. 13. 03:04


왜 나에게 거짓말을 했어?

내 눈을 연신 피하며 눈을 사방으로 이리저리 도록도록 굴리는 너를 바라본다. 지금 내 표정은 어떻게 되어있을까. 인상을 찡그리고 있을까. 미간에 주름이 잡혀 사나워 보일까. 눈썹이 한껏 올라가 화났음을 표현하고 있을까. 아무렴 거울을 통하지 않는 이상 나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모를 일이다. 다만 상대방의 반응을 보아 지금 표정이 이렇겠거니 추측할 뿐이지.

내가 물은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입술만 연거푸 떼었다 닫았다 하며 속에 담긴 말을 입 밖으로 소리내어 꺼내지 못 하고 삼키는 너를 본다. 답답함에 불만을 토로하며 다그쳐보지만 이내 포기하고 인내심을 가진 채 네가 적절한 말을 꺼내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니까, 적절한 변명을. 네가 왜 그 사람이랑 입을 맞추고 있었는지,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합당하고 타당한 이유를 설명하기를.

물론 내가 생각해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리란 없다. 왜냐하면 너는 나의 약혼자니까. 우린 곧 부부가 될 사이니까. 너는 홀더고, 나는 홀더의 결혼 상대니까. 그렇다면 내가 본 광경은 대체 뭐였을까? 생판 처음 본 학생과 입을 맞추고 놀란 토끼눈을 하며 그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던 너는?

”대답해.“

결국 참지 못 하고 한 번 더 재촉한다. 왜 그 애랑 그렇게 가까이 지내? 왜 나보다 더 자주 찾아가는 거야? 내 약혼자는 너잖아. 넌 내 홀더잖아.

찾아보니 편입한지 얼마 안 된 학생이라는데, 그 사이에 그만큼 가까워졌다니 놀랄 따름이다. 네가. 그것도 다름아닌 네가. 사람과 마주하기가 겁나고 두려워 도망치던 네가. 나와의 관계가 서먹해졌을 때 대화로 풀 생각은 하지도 않고 네 어머니에게 영영 도망치려 했던 네가. 나를 두고 저 멀리 사라지려 했던 네가. 감히 네가.

기억 안 나? 네가 학교에 맨 처음 오던 날, 결투에 휘말려 하마터면 커다란 기체에 밟힐 뻔 한 너를 내가 구해줬었다. 서포터를 구하지 못 해 시험에 합격은 커녕 참여조차 하지 못 하고 있던 너를 도와준 것도 나였고. 재시험을 볼 수 있게 격려해준 것 또한 나였다. 갈 곳이 없어 이리저리 기숙사를 헤매던 너에게 방을 제안한 것도 나였고. 그런데 넌.

감히 넌.

네가 사람에 대한 눈치가 없다는 건 예진작에 알고 있었다. 먼젓번에도 그러지 않았던가. 나에 대해 무언가 의심이 있고, 불만이 있으면 와서 대화를 청할 것이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모르고 홀로 속으로 끙끙 앓다가 도망쳐버리고. 사실 나는 안다. 네가 그 아이에게 진심으로 그런 마음을 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네 표정, 네 목소리, 네 말투만 보아도 딱 태가 난다. 넌 거짓말을 못 하니까. 단 한 번도 나에게 한 적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왜.


이번에는 대체 왜?

그래, 솔직해지자. 네가 그 아이와 입을 맞췄다는 사실보다도, 나보다 더 그 애에게 자주 찾아갔다는 사실보다도 내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네가 입을 맞추던 순간 너의 당혹스럽고 놀란 표정을 보아하니 의도치 않던 상황이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당장 그 자리에서 뭐하는 짓이냐고 캐물을 수도 있었지만 구태여 그러진 않았다. 네가 내게 먼저 와 스스로 말하길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고.
네 스스로 쌓아올린 신뢰감을 네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잖아.

빌어먹을,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해. 지금까지 애써 무시해 왔지만 이제는 모르겠어. 어쩌면 너는 나와 결혼하는 걸 원치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야. 그저 내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네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홀더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지도 몰라.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사랑하고 애정해서 그러는 게 아닌, 그저 순전히 네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네가 네 어머니에게 행동하는 것처럼. 어린 아이가 가족과 친구들에게 칭찬 받고 사랑받으려는 것처럼...



“미오리네 씨.”

온통 생각으로 가득찬 머릿속에 익숙한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오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미오리네는 고개를 들어 슬레타를 바라본다. 아까까지만 해도 부단히 시선을 피하던 너는 이제 내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쳐다본다. 무슨 대답을 하려고 그러는 걸까. 무언가 결의를 다진 듯 또렷하고 선명한 눈이다. 그러지 마. 말하지 마. 내가 원하는 답을 듣지 못 할 바에야 아예 아무런 대답도 안 듣는 것이 낫다. 무슨 대답이건 간에 침묵이 그보다 더 나을 테니까.

서둘러 대답을 독촉하던 미오리네는 아까와는 달리 지금은 말을 듣기를 원치 않다는 듯 서글픈 눈빛으로 인상을 찡그리고 슬레타를 쳐다본다. 네가 이 뜻을 알기를 바라지만 그래, 눈치 없는 네가 알아들을 리가 없다. 몇 번 더 입을 우물거리고는 이내 목소리를 낸다. 그건 오해였어요. 제가 원하던 키스... 도 아니었고요.

”하지만.“


그러지 마.


“하지만 미오리네 씨.”

제가 미오리네 씨에게 모든 걸 말 할 수는 없잖아요. 학원에서 하고 싶었던 버킷리스트도 잔뜩 있고, 수성에서는 볼 수도 없었던 제 나이대의 사람들이 이곳에 있어요. 저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어요.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무언가를 하고, 새로운 것들을 겪어보고 싶어요.

물론 미오리네 씨와 멀어지고 싶다는 말이 아니에요! 그저 좀 더 각자 개인의 시간을 보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


뒷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생각으로 가득 차 터질 것만 같다. 누군가가 바로 옆에서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귓가가 시끄럽게 웅웅 거린다. 슬레타가 무어라 말을 하는 것이 진동으로 어렴풋이 느껴지지만 말 자체는 귀에 들어오지 않아 알아들을 수가 없다. 필사적으로 쓸모없는 생각들은 덜어내고 필요한 것들만 끄집어내 정리한다. 그러니까, 너는, 나랑 거리를 두고 싶다고 했다. 멀어지고 싶은 게 아니라고 애써 변명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너는 좁은 세상을 벗어나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은 거다. 그건 나쁜 게 아니다. 모든 생명은 자신의 좁은 세계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지만.


너는 나를 네 세계에 가둬두고 정작 너는 더 넓은 곳으로 벗어나려 하는 구나.
이 곳에 나를 두고. 나만을 남겨놓고.


결국 언제나 더 너를 갈망하고 원하는 쪽은 나였다. 나는 네가 나를 더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이런 처지가 되어야만 사실을 깨닫는 것을 보니. 그토록 인정하기 싫고 회피하던 사실을 강제로 마주하고 보니 느껴지는 기분은 처참하고 더러웠다. 한 편으로는 조금 역겹기도 하고, 치욕스럽기도 했다.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너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에. 나는 지금까지 인지도 못하고 있었건만, 목줄로 얽매여 이리저리 끌려당겨지고 있었던 쪽은 다름아닌 나였다는 사실에.


“미오리네 씨, 제 말 듣고 계세요?”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너는 용기를 내 소심하게 얼굴 앞에 손을 휘휘 저으며 눈치를 살핀다. 여러 거칠고 사납고 차분하고 시끄럽고 복잡한 생각이 지들끼리 목소리를 내고 싸우다가 마침내 조용해진다. 놀랍도록 차분해진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이 남아있다. 이렇게는 안 된다고.

이건 잘못됐어.

무언가 잘못됐으면 당연히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직 길이 들여지지 않은 것이 있으면 길들이면 된다. 어긋난 것이 있으면 맞추면 된다. 불협화음이 있으면 안정적인 음을 찾을 때까지 계속 소리내면 된다. 이런 간단한 해답을 왜 여즉 몰랐을까.



“슬레타.”

네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니, 나는 너를 바로 잡아야 한다. 내게는 그럴 의무가 있고 그럴 자격이 있다. 너는 내 홀더고, 내 약혼자니까. 나를 네 세계에 끌어들이고 빠져나갈 수 없게 올가미를 매어둔 장본인이니까. 그러하니 너 또한 응당 내 말을 들어야 한다. 내 곁에 있어야 한다. 덫에 걸린 살에 올무가 파고들고 끝끝내 썩어들더라도 너는 벗어나면 안 된다. 네가 이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그에 책임을 져야한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기숙사에서도 멀리 떨어진 이사장실을 개조해 만든 이 방 주변을 걸어다니는 사람은 없다. 복도는 고요하고 방 안에는 오직 나와 슬레타 뿐이다. 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귀를 쫑긋 세우고는 긴장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이름을 부른 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자 너는 다시 눈을 도로록 굴리며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다. 그런 너를 두고 나는 잠시 방 안에 만들어둔 실내 온실로 들어가 무언가를 찾는다. 너는 그런 나를 따라 같이 들어오려다가, 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 손으로 저지하자 멈칫하고는 알겠다고 작게 말하고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 기다린다. 모종삽과 여러 토마토 품종을 정리한 서류와 꾸깃꾸깃 뭉쳐진 여러 종이 쓰레기들 사이를 헤치고 마침내 서랍에서 끈 하나를 찾는다. 토마토가 자랄 때 구부러지지 않도록 막대기를 줄기에 지탱해주는데, 그 때 줄기와 막대기를 이어줄 때 사용하는 끈이다. 질기고 튼튼하지만 낚시줄처럼 날카롭지 않고 식물에 치명상을 입히지도 않는 부드러운 끈.

나는 화단을 관리할 때 쓰는 목장갑을 양 손에 끼고 끈을 든 채 발걸음 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조용히 온실 밖을 나선다. 방 안에는 침대에 걸터앉아 내게 등을 돌린 채 방 곳곳을 고개를 이리저리 작게 돌려가며 구경하고 있는 네가 있다. 너는 아직 내가 온실에서 나온 것을 모른다. 내가 네 바로 뒤까지 천천히 걸어오고 있음에도, 그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난만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뒤에서 끈을 네 목에 걸었을 때, 그리고 힘을 주어 잡아당겼을 때, 반사적으로 끈을 붙잡으려 하지만 팽팽하게 목에 감겨 도저히 틈이 없어 붙잡지 못 하고 목만 연신 긁으며 발버둥을 친다. 나보다 힘이 강한 너지만 목이 붙잡히면 소용없다. 사람은 목이 졸리고 숨이 부족하게 되면 공포심부터 드니까. 제아무리 너라도 생존의 공포 앞에서는 뭘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에어리얼도, 프로스페라도 없으니까.

그러나 걱정 마.
난 널 죽일 생각이 없으니까.

슬레타가 커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나를 쳐다본다. 상황파악을 하려는 듯 애써 주변을 둘러보려 하지만 숨이 막혀 그것조차도 이내 곧 포기해버린다. 얼굴은 붉다못해 점점 시퍼래지고 눈가는 눈물로 인해 잔뜩 젖어 축축해진다. 콧물과 침이 엉망으로 흘러 턱과 목깃을 적신다. 겨우겨우 목소리를 짜내 나를 불러보려 하지만, 그것마저도 나오다말고 흩어져 형체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내게 손을 뻗는다. 여전히 한 쪽 손은 자신의 목을 옭아매고 있는 끈을 붙잡으려 하지만, 나머지 한 쪽은 나를 향해 다가온다. 나의 팔을 간신히 붙잡고는 두어 번 툭툭 두드린다. 제발 그만하라는 듯 손짓으로 간청하며 내게 부탁한다. 그만해요. 제발 멈춰요. 미오리네 씨, 제발. 그러나 나는 네 요청을 거부한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네 희망을 무참히 짓밟는다. 내가 아까 느꼈던 기분을 너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라는 괜한 오기가 생겨 일부러 더 눈을 맞추고 보란듯이 고개를 한 번 더 젓는다.

너는 그러지 말라는 듯이 나를 따라 힘겹게 고개를 천천히 젓는다. 언뜻 봐서는 움직인 것도 모를 정도로 아주 천천히. 너는 이제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 한다. 나는 네가 어쩌면 죽을까봐 무서워 슬슬 겁이 나기 시작한다. 어서 기절해. 어서. 더 버티지 말고.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마지막으로 힘을 짜낸 듯 내 팔을 잡았던 손을 놓고는 내 얼굴을 향해 있는 힘껏 뻗고는 볼을 쓰다듬는다. 내가 순간 놀라 멈칫한 그 순간, 너는 힘없이 팔을 바닥에 툭 떨어뜨린다. 잠시의 정적이 흐르고 나는 황급히 네 맥박을 살핀다. 희미하긴 해도 진동이 느껴지는 것을 보고 나는 안심한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너의 얼굴을 쳐다보며 나는 네가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행동을 따라하듯 너의 볼을 쓰다듬으며 내려다본다.


내가 도와줄게.
네가 다시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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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랑 바람피다 미오리네에게 걸린 슬레타
사실 슬레타는 딱히 소피랑 그런 사이 아닌데 운 안 좋게 소피가 슬레타에게 딱 입 맞추는 순간을 미오리네가 지나가다가 목격했으면 좋겠다 (근데 슬레타는 그 사실 모름)
미오리네는 충격 먹어서 자기 방으로 혼자 돌아옴 슬레타도 그 후 놀라서 그대로 소피 밀치고 방으로 도망침
그 후 용기 내어 슬레타한테 왜 소피랑 입을 맞췄냐 묻는데 그런 적 없다고 거짓말하는 슬레타에게 실망하고 분노함 (근데 생각해보니 슬레타 거짓말 자체를 못 할 거 같음...)

대충 이렇게 정리하고 쓰기 시작했는데 걍 똑닮은딸 엔딩됨

은근 마음 한 켠으로는 슬레타를 얕잡아 보고 자기 아래로 두고 있던 미오리네가 슬레타가 제게 반항 비스무리한 걸 하는 것을 보고 충격 먹는 게 보고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집착광인이 되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