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미오슬레+4호) 귀로

책과 집 2023. 7. 9. 00:24

망고 님과 푼 썰 정리해서 올림
미오슬레 4호슬레

24화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개연성 없음... 주의




대부분의 불행은 예기치 못 한 순간에 찾아온다. 당연히 평소와 다름없으리라 여겼던 하루가 한순간에 수렁에 빠지고 고통으로 변한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누가 예측이나 할 수 있었을까?

미오리네 또한 마찬가지였다. 평소와 같이 업무를 마치고 자신의 사랑하는 이가 기다리고 있는 안식처로 찾아갔을 때 그가 마주한 것은 붉은 머리칼을 한데 묶어 가지런하게 정리한 이가 아닌 어지러이 정돈되지 않은 이불과 옷가지가 널려있는 텅 빈 침대였다. 그래, 불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당연히 있어야 할 자가 없어져 텅 비어버린 이 집을 시작으로 평온하고 안락한 일상에는 금이 가버린다. 미오리네는 순간 사고회로가 멈춰버려 생각을 하지 못 한다. 호흡은 빨라지고 손은 조금씩 떨리기 시작한다.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 하던 흉부는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고, 동공은 축소되어 텅 빈 방을 다시 한 번 샅샅이 살핀다. 그럴 리가 없어. 입 밖으로는 떨리는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온다. 물 속에 빠진 듯 주변의 모든 소리가 먹먹하게 들린다. 뭐라 생각할 새도 없이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이며 이미 아무도 없는 이불을 괜스레 들추며 이곳저곳을 쑤셔댄다.

방을 뛰쳐나와 온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며 뒤져댄다. “슬레타!” 이름의 주인은 대답하지 않는다. “어디 있어, 슬레타!?” 미오리네가 목청 높여 한 번 더 부르지만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거실, 없어. 안방, 없어. 서재, 없잖아. 설마 욕실은? 아니야, 여기도 없어. 2층에 가보자. “슬레타!!” 절규에 가까운 고함 소리가 집 안을 가득 채운다. 없어, 없어, 없어. 아무데도 없어. 그 순간 작은 기침 소리가 집 한 구석에서 들려온다. 귀를 쫑긋 세우고는 소리가 난 방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창고? 설마 거기에 있나? “슬레타,” 호흡조차 잊은 채 집 안을 헤집으며 뛰어다녀서인지 숨이 막혀 거의 죽어가는 목소리로 창고 문을 부술 듯이 열음과 동시에 간신히 슬레타를 부른다.

“...프로스페라?”

휠체어에 탄 프로스페라가 무슨 일이냐는 눈빛으로 식은 땀을 흘리며 흔들리는 동공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오리네를 쳐다본다. 경첩이 고장나 고칠 생각이었는지 손에는 작은 공구함이 들려있다. 꽤 오랜 시간 창고에 박혀 공구를 찾았는지 옷에는 먼지가 엉켜붙어 있다.

“미오리네 씨가 온다는 연락은 받지 못 했는데. 오랜만이네요.”
“스, 슬레타는 어디 있어요?”
“그 애는 자기 방에서 자고 있어요. 요 며칠 피곤한지 밖에도 나가지 않더군요. 왜,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안돼. 안돼안돼안돼. 패닉에 찬 목소리가 울음과 섞여 입 밖으로 정신없이 쏟아져 나온다. 새끼 잃은 어미가 구슬프게 울 듯 곧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목소리를 대체 한다.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바닥에 주저앉고는 꺽꺽 거리며 몸을 한껏 웅크린다. 마치 누군가에게 맞은 것처럼 묵직한 통증이 가슴께를 덮치더니 숨조차 쉬기 버거워진다. 미오리네는 슬퍼하며 주인 잃은 집에서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며 조용한 비명을 지른다.


슬레타가 사라졌다.



*

데이터스톰의 후유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붉은 결정 모양의 흉터가 몸에 반영구적으로 남으며, 신경에 문제가 생겨 신체를 자유롭게 움직이는 데에 어려움이 생긴다는 것 정도 말고 그 외에 어떠한 장애가 생기는지는 무엇하나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었다. 뇌가 불에 태워지는 듯 한 고통을 겪고 나면 신체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 확실한 후유증은 이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슬레타는 목발에 의존해 움직여야 할 정도로 거동이 힘들다는 걸 제외하고는 모든 게 괜찮아 보였으니까. 무언가를 씹고, 삼키고, 말하고, 생각하고, 보고, 듣고 하는 그 모든 일련의 행동이 무엇하나 잘못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괜찮은 줄로만 알았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슬레타 또한 말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환각이 보인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환청이었다. 슬레타 머큐리.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뻣뻣한 고개를 간신히 틀어 바라보아도 보이는 것은 없었다. 처음에는 피곤해서 잘못 들은 건가 싶었지만 들리는 횟수가 점차 늘어나더니 나중에는 일상처럼 들릴 정도였다.

그 다음은 환각이었다. 형체는 흐릿했다. 사람의 형태를 띈 빛나는 하얀 물체가 눈 앞에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느 때는 부엌 구석에, 어느 때는 창 밖 너머로, 또 어느 때는 침대 위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아마 저 쯤에 입이 있겠지 하고 얼굴로 보이는 부분을 가만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형태는 슬레타를 마주 바라보다가 종종 이름을 부르곤 했다. 혹시나 말을 걸면 대답을 해주지 않을까 싶어 몇 번 대화를 시도해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그 형태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물론 이러한 환각에 대해 말을 해야겠다고 다짐한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미오리네를 대신해 자신을 도와주러 온 니카 옆에 그 하얀 물체가 서있었을 때 슬레타는 저 하얀 빛에 대해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하얀 물체는 점차 빛이 흐려지더니 사람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한다. 만약에 슬레타가 시선을 돌려 그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보았다 하더라도 거짓이라 여기고 니카에게 말하기로 다짐했더라면, 아니, 소리가 들렸을 시점에 진작에 말을 했더라면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슬레타는 그러지 않았다. 시선을 돌리지 않았고, 거짓이라 여기지 않았으며, 입을 다물기를 선택했다. 그 모든 순간의 선택들이 모여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졌다. 슬레타는 보았다. 죽었으리라 여겼던 사람이 지금 자신의 눈 앞에 서서 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돌아왔는가? 아니,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이건 살아있는 게 아니다. 그랬다면 진작에 모두들 눈치챘겠지. 그렇다면 지금 슬레타의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누구인가? 사람은 맞는가?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하는 것이 더 옳을까? 슬레타는 옴짝달싹도 하지 않는 입을 간신히 움직여 말을 꺼낸다.

“엘란... 씨?”

니카가 갑작스런 부름에 의아한 얼굴로 슬레타를 바라본다. 슬레타는 이름을 잘못 불렀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듯이 변명한다. 그에 순응하며 니카는 방에다가 간단한 식사와 생활용품을 갖다주고는 나중에 보자며 집 밖으로 나간다. 텅 빈 방에서 4호와 슬레타는 그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본다. 아까의 물음에 응답하듯 4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한다.

오랜만이야, 슬레타 머큐리.




슬레타는 두려워했다. 4호가 또 다시 사라질까봐.

그는 예고도 없이 나타나더니 예고도 없이 사라졌다.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시야에 나타나 말을 걸고는 떠나갔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묻고 싶은 것 또한 많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물음에 대답해주는 적이 없었다. 그저 짧게 잘 지내냐고, 오늘은 어땠냐고 묻고는 대답을 듣고 나면 다행이라는 듯이 미소만 지으며 사라질 뿐이었다. 그러한 태도가 슬레타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제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 하더라도 육체의 고통은 정신을 나약하게 만든다. 데이터스톰의 후유증인지 회복이 덜 되어 종종 쓰라린 통증이 이는 육체는 슬레타의 정신을 위태롭게 만들었고 거기에 더해 자꾸만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환각은 슬레타를 미치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슬레타에게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지만 항상 곁에 있을 수는 없었다. 모두가 각자의 사정으로 바빴고 자신은 실질적으로는 짐일 뿐이었다. 예전처럼 나서서 누군가를 도와줄 수도, 모빌슈트를 몰 수도 없었다. 홀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환각과 환청을 보는 횟수 또한 많아졌다. 어느정도 회복하는가 싶더니 몸은 다시 눈에 띄게 말라가기 시작했고 슬레타의 눈빛은 흐려져갔다. 그러한 모습을 본 미오리네는 무리하게라도 시간을 내어 슬레타에게 더 자주 찾아오려 했지만, 애석하게도 도통 줄어들지 않는 일 때문에 찾아오는 날보다 못 오는 날이 더 많았다. 델링의 업보를 청산하기 위해 미오리네가 지구와 여러 행성을 왔다갔다 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슬레타 또한 변해가고 있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환각이 찾아왔다. 허나 다른 점이 있다면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공중으로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아닌 계속 형상을 유지하며 방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의아해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웃으며 발길을 문 쪽으로 돌리더니 그대로 지나쳐버린다. 슬레타가 당황하여 목발도 까먹은 채 절뚝이며 방문을 열자 이번에는 거실에 서 있는 그가 보인다. 슬레타가 방에서 나온 걸 확인하고는 현관 복도로 걸어가다가 그대로 문을 지나쳐 나가버린다. 놓칠새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서둘러 현관문을 열자 황금빛 갈대밭 사이에 그가 서서 슬레타를 바라보며 손짓한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이. 멍하니 뒷모습을 바라보던 슬레타는 홀린 듯이 발걸음을 옮긴다. 신발을 신는 것도 까먹은 채 맨발로 돌과 지푸라기들이 흩어져 있는 땅을 밟으며 자신을 어디론가 안내하는 그를 따라간다. 옷은 여전히 잠옷 차림이고 흙길을 맨발로 걸어간 탓에 발은 금방 더러워져 엉망이지만 공교롭게도 주변에는 그 모습을 보고 제지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래서 아무도 슬레타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 한다. 그렇게 슬레타는 사라졌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오래간만에 슬레타를 만나는 것이니 깜짝 놀래켜주고 싶다며 아무런 연락도 없이 불쑥 집에 돌아온 미오리네는 텅 빈 집을 마주한다. 아까 말했었지? 대부분의 불행은 예기치 못 한 순간에 찾아온다고. 그 뒤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미오리네는 패닉한 채 집 안을 뛰어다니며 슬레타를 찾는다. 그러나 보이지 않고, 이윽고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크나 큰 고통과 슬픔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자책할 시간이 없다. 슬픔과 괴로움은 나중으로 미뤄야 한다. 지금 집중해야 할 것은 감정이 아니다. 슬레타를 찾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지. 미오리네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강제로 호흡을 진정시킨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자신이 아는 모든 이에게 사실을 전달한다. 슬레타가 사라졌다고.


*

소식을 들은 지구 기숙사 사람들이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온다. 다들 처음에는 농인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상황이 심각함을 깨닫자 표정이 점점 어둡게 변한다. 유일한 목격자인 프로스페라 또한 슬레타의 행방을 모른다니. 목발이 없으면 제대로 몸을 가누기도 힘든 자가 대체 홀로 어디로 떠났단 말인가? 온갖 상황들을 가정하여 가설을 세워본다. 첫째로, 그저 동네 산책을 나갔을 뿐이고 몸이 아파 걸음이 느리니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아까 지적했던 대로 몸도 불편한 사람이 목발 없이 오랜 시간 밖을 나가기란 힘든 일이기에 터무니없는 가설로 치부되었다.

둘째로, 슬레타는 납치당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몸이 불편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반항을 하는데 순순히 데려갈 수 있을리가 없다. 혹시나 곤히 잠든 상태를 노려 집에 침입했다고 하여도 그 소란을 프로스페라가 못 들었을리는 더더욱 없다. 더군다나 집 주변에 바퀴 자국이 전혀 보이지 않는 걸 보아 자동차도 없이 오직 사람의 힘 만으로 한 사람을 데려갔다는 건데 사실상 가능할 리가 없다. 게다가 누가 데려가겠는가? 슬레타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누군가가 미오리네에게 앙심을 품고 슬레타에게 대신 보복하려 든 걸 수도 있다는 의견이 나왔으나, 곧 그 사실은 집 밖에 일자로 놓인 발자국들을 보고 잘못되었음이 판명났다. 발자국에는 누군가와 싸운 흔적도, 반항하거나 저항한 흔적도, 질질 끌려간 흔적도 아무것도 없었다.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걸어간 것이 자명해보였다. 혹시 누군가를 따라간 걸까 싶어 주변을 수색해보았지만 그 외에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것은 오직 슬레타의 맨 발자국 뿐이었다.


내 어리석음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어. 너에게서 떠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를 좀 더 세심하게 돌보았어야 했는데. 이것 또한 내 업보인 걸까? 너를 프로스페라랑 단 둘이 냅두는 게 아니었어. 경호원들을 붙여놨어야 했는데. 아니면 최소한 감시 카메라라도 설치해뒀어야 했어.

그 때, 괴로워하는 미오리네의 눈가에 주황색의 키링이 들어온다. 맞아. 에리크트가 있었지. 너라면 슬레타에게 말을 걸 수 있을지도 몰라. 미오리네는 다급히 목 뒤에 달린 기계를 조작하고는 에리크트에게 말한다. 혹시 슬레타와 대화가 가능하느냐고. 잠시 말이 없던 에리크트는 한참을 고민한 듯 작은 한숨과 함께 말한다. 이미 한참 전부터 시도를 해봤지만, 슬레타 쪽에서 기계를 꺼둔 건지 대답이 전혀 들려오지 않는다고. 잠깐의 기대는 실망과 함께 더 큰 절망으로 돌아온다. 불안에 휩싸인 미오리네는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짓씹으며 떨리는 동공으로 슬레타가 누워있었을, 한 때는 온기로 따뜻했지만 이제는 차갑게 식어버린 텅 빈 침대를 내려다본다. 어디로 간지 모를 자신의 연인의 이름을 중얼거리면서.


*


“아, 진짜. 장소 정도는 좀 적어두지.”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며 자신의 눈 앞에 있는 풍경과 노트에 그려진 그림이 서로 일치한지 번갈아가며 보면서 확인한다. 여러번 반복해서 보았을 즈음 이곳이 맞다는 확신이 들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풍경을 눈에 담은 뒤 다음 장소를 찾아 떠난다. 노레아와의 약속이라며 안락한 집과 풍족한 식사를 마다하고 노트의 그려진 장소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3년째 지속되고 있었다. 글 하나 없이 그림만 있는 통에 실제 장소를 찾기란 퍽 어려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약속이니 지켜야지, 뭐. 이제 다음 장소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일단 단서를 모으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지. 다시 또 처음부터 시작할 생각을 하니 막막해 길게 푸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자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며 나뭇잎을 밟는 소리가 들린다.

이 깊은 산중에 자신 말고 또 누가 있단 말인가? 설마 야생동물인가 싶어 주변을 두리번 거려보지만 눈에 보이는 이는 없다. 곧 나뭇가지를 밟은 듯 무언가 빠득 거리며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긴장하여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채 쳐다보고 있자 붉은 형태가 풀숲 사이로 멀리서 나타난다.

“응?”

예상치 못 한 사람의 등장에 5호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 하고 어버버 거리며 말을 한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무언가에 홀린 듯 대답도 하지 않고 바로 앞에 서 있는 5호를 못 본 채 하며 슬레타가 어깨를 툭 치고는 앞으로 계속 걸어가자 반사적으로 팔을 붙잡아 제지시킨다. 너 혼자야? 미오리네나 다른 애들은 어디가고— 그제서야 눈에 들어온 슬레타의 모습에 5호는 미처 말을 다 잇지도 못 하고 얼버무린다. 침대에 누워있다가 나온 것인지 옷은 잠옷 차림이었고(다만 군데군데 찢겨지고 얼룩져 엉망이었지만) 신발조차 신지 않아 맨발인 발은 돌에 쓸리고 찢겨 피투성이였다. 분명히 마지막으로 소식을 들었을 때는 재활은 커녕 회복에만 전념하는 상태라고 했으니 지금은 한참 재활운동에 집중해야 하는 때가 확실했다. 그러니 분명히 집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런데 왜 여기 있단 말인가? 그것도 이런 몰골로?

어찌되었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닌 거 같으니 미오리네에게 알려야겠다 싶어 핸드폰을 키지만 여기가 깊은 오지라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한다. 얘는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문자도 전화도 아무것도 안 되는 이곳에서 아픈 사람을 데리고 언제까지고 있을 수는 없으니 급한대로 5호는 슬레타의 손을 잡아끌고 숲 밖으로 빠져나가려 강가를 따라 밑으로 걸어간다. 멍하니 있던 슬레타는 5호가 자신의 손을 잡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주변을 둘러본다. 여, 여, 여기가 어디예요? 늦어도 한참 늦은 그 반응에 5호가 짐짓 당황하여 되묻는다.

“네가 여기로 왔잖아. 어떻게 왔는지 기억 안 나?”
“또, 또 다른 엘란 씨? 엘란 씨는 왜 여기 계세요?”

그건 되려 내가 물을 말이라고 답하지만 슬레타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는 듯이 여전히 영문을 모른다는 표정으로 5호를 쳐다본다. 이것도 건담의 후유증인가? 3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오락가락하는구만. 나도 더 오래 건담을 탔으면 이렇게 되었을까, 따위의 생각을 속으로 하는 동안 슬레타는 불안한 듯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듯 한 행위에 5호가 왜 그러냐 물으니 우물쭈물 눈치를 보다 4호가 자신을 여기로 데려왔다고 말한다. 예상치 못 한 대답에 말문이 막혀 5호는 그저 입만 살짝 벌린 뒤 멍하니 슬레타를 바라본다. 4호가 너를 데리고 왔다고? 이곳으로?

아무리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무리하게 스코어를 올려가며 뇌를 태우면서 건담을 조종했으니 그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는 게 이상할 건 아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다. 보통의 사람과 구별이 힘들 정도로 뚜렷한 형태의 환각이 나타나 이런 오지로 사람을 이끌다니, 벨메리아도 이러한 후유증이 있다고 말을 해주지는 않았다. 어쩌면 몰랐던 걸지도 모르지.


“너도 알잖아. 3년 전 그 날 건담은 모두 분자 단위로 분해되어 사라졌어. 4호는 이미 죽었고.”

네가 지금 보고 있는 건 모두 허상이야. 그 뒤의 말을 꺼내려하는 찰나 어딘가 쓸쓸하고 서글픈 표정으로 4호를 찾는 슬레타의 얼굴을 보고 5호는 결국 끝끝내 말을 잇지 못 한 채 입을 다문다. 어차피 구태여 말을 하지 않아도 예상하고 있을 터다. 슬레타 본인이 지금까지 본 4호는 모두 허상이라는 것을.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혹시나 하는 헛된 희망을 품고 있는 거겠지. 콰이어트 제로 안에서도 보지 않았던가. 이미 죽었으리라 생각했던 사람이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을. 죽은 이가 한 번 나타났는데 두 번이라고 못 나타날까? 그런 빈약하고 말라빠진 희망이 슬레타를 강제로 붙들어매고 있었다. 4호가 또 다시 돌아온 것일지도 모른다면서.


*

“발자국이 여기서 끊겼습니다. 주변에 남아있는 흔적 또한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근래에 비가 내렸기에 전부 쓸려 사라진 상태입니다.”

수색대원이 현재까지의 상황을 보고하자 미오리네는 인상을 찌푸리며 쯧 소리를 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손으로 털더니 눈썹을 까닥하며 드론을 띄우든 개를 풀든 사람을 더 부르든 해서 작은 흔적이라도 무조건 찾아내라고 소리친다. 간만에 보는 불안한 듯 흔들리는 동공과 평정심을 잃고 흥분한 모습에 추추가 다가와 말을 건다.

“진정 좀 해. 독촉한다고 금방 해결되는 일도 아니잖아.”
“알아, 하지만 어떻게 진정을 해? 슬레타가 사라졌어. 뭐가 원인인지도 모르겠어. 내가 그동안 별로 찾아오지 않아서 화가 났던 걸까?” 미오리네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댄다. “이유라도 알면 이렇게 답답하지 않을 텐데, 나는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그 애가 그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왜 내게 아무런 말도 안 하고 사라진 건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아무것도. 바보 같이...”

그 애에게 나는 의지되지 않는 사람이었던 거야. 울분에 가득 찬 목소리가 점차 눈물에 젖어 흐려지더니 이내 제대로 끝맺지 못 하고 공중으로 흩어진다. 답답한 듯 가슴을 움켜쥐며 추추의 시선을 피하고는 슬레타가 있었을 평원 너머를 바라본다. 황금빛의 갈대밭 사이로 그 아이의 인영이 얼핏 보이는 듯 하다. 사무친 그리움에 이제 환각마저 보이는 걸까? 미오리네는 갈대밭 한가운데로 풀을 헤치며 사박사박 걸어가 슬레타가 바라보았을 풍경을 자신 또한 바라본다.

너는 이곳에서 무엇을 보았니. 너의 이상, 너의 꿈, 학교를 만들겠다는 목표,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소망, 그 모든 것들이 조금씩이라도 천천히 이루어지고 있었으니까 괜찮을 줄 알았어. 아무런 문제도 없는 줄로만 알았어. 네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상처가 얼마나 곪아가고 있었는지 알지 못 했어. 나는 또 오만했던 거야. 너에 대해 모든 걸 안다고. 자유로이 하늘을 활보하던 새가 한 순간에 날개가 꺾여 땅바닥에 추락했는데, 아무리 본인의 선택이었다 한들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내가 안일했어. 너를 좀 더 살폈어야 했는데. 조금 더 자주 찾아왔어야 했는데.

이번에야말로 절대 너를 놓치지 않을 거야. 네가 다시는 그 어떤 위험에도 뛰어들지 못 하도록 계속 곁에서 지켜볼 거야. 네가 홀로 너만의 고통과 불안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않도록 곁에 있어줄 거야. 그러니 돌아와.

돌아와, 슬레타.


*


“좀 앉을까?” 5호가 이미 한참은 뒤쳐진 슬레타를 향해 외쳤다. 몸이 불편한 이를 배려하여 분명히 걸음을 늦춰 함께 걸어가고 있었으나, 그마저도 버거운지 슬레타는 이미 저 먼 숲길 너머로 힘겹게 기다시피 걸어오고 있었다. “네, 네...” 가쁜 숨소리 사이로 얼핏 대답이 스며나왔다. 5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숲을 벗어나려면 얼만큼 남았나 대략적으로 가늠을 해본다. 이 속도라면 강을 따라 내려간다해도 며칠은 걸릴 거야. 해가 지면 야영을 해야 하니 그것도 염두에 둬야 하고. 가지고 있는 식량을 나눠먹으면 어느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만, 이 얘의 몸이 버텨줄까? 데이터스톰 후유증이 심해보이는데 따로 챙겨먹어야 할 약이라도 있으면 어떡하지?

비틀거리며 슬레타가 자신의 앞까지 걸어오자 5호는 슬레타를 부축해 오래된 나무 밑둥에 앉히고는 얼굴을 살폈다. 오랫동안 걸은 탓인지 얼굴은 수척했고 땀범벅이었으며 풀과 나뭇가지에 긁혀 몸에는 생채기가 잔뜩 나 엉망이었다. 급한대로 양말을 빌려주었으나 이런 오지를 제대로 된 신발 없이 걷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차라리 여기서 불이라도 피워 구조를 기다릴까 생각도 해봤지만 인적이 드문 이곳에 과연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이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면 슬레타를 여기서 기다리라 한 뒤 자신만 빠르게 산을 벗어나 전파가 터지는 곳에서 구조요청을 할까 고민을 했지만 가뜩이나 환각을 쫓아 여기까지 걸어온 사람을 홀로 두고 자리를 비운다는 게 좋은 선택은 아닌 거 같아 이 또한 철회되었다.

이미 해는 산 너머로 저물어가고 있었고 거대한 땅거미가 숲을 집어삼키는 중이었다. 안 돼. 일단은 여기서 머무르자. 설상가상으로 차가운 물방울이 한 두 방울 머리 위로 토독 톡 떨어지더니 곧 얼마 되지 않아 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높고 커다란 나무가 많은 탓에 어느정도 비를 막아주기는 했지만 언제까지고 주먹구구식으로 이렇게 버틸 수는 없었다. “안 되겠어, 슬레타. 비를 피할 만한 곳을 찾아볼게. 강가는 물이 불어나 위험하니 저쪽 큰 나무 밑에 앉아있어.” 불안한 마음을 뒤로 하고 5호는 슬레타를 두고 서둘러 동굴이나 썩어버려 텅 빈 나무 둥지를 찾으러 숲 속으로 사라졌다. 뭐든 간에 비만 피하면 되었다. 홀로 남은 슬레타는 멍하니 빗소리를 들으며 5호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다가 이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구에는 비가 온다. 눈도 내리고 바람도 불고 종종 우박이 쏟아지기도 한다. 예측할 수 없는 날씨가 갑작스레 찾아오고 갑작스레 떠난다.
수성은 이러지 않았는데. 아스티카시아 학원도 날씨 원격 조종 시스템을 사용했기에 갑자기 호우가 쏟아져 옷이 젖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지구는 다르구나. 살아있는 행성인 지구는 때때로 변덕을 부리며 궂은 날씨를 보여주기도 하고 어느 때는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광경을 보여주기도 했다. 모든 만물의 근원, 생명의 시작, 비옥한 토양, 모든 존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이 하늘에서 내리고 땅에서 흐르는 곳. 그러고 보니 까마득한 옛날에, 어찌나 오래전인지 인류가 우주 밖으로 떠나가지 못 하고 아득한 요람인 지구 안에서만 머무르던 때에는 오직 이 행성에서만 사람들이 살아갔더랜다.

땅을 갈아 씨앗을 뿌리고, 그 씨앗으로부터 발아한 나무가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를 먹고 또 씨앗을 뿌리면서 끝없이 토지를 확장해나가며 살아갔다했다. 거칠고 메마른 수성에서는 땅 대신 인큐베이터에서 채소나 과일을 길러 가끔 먹기는 했지만 인공적으로 기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스티카시아 학원에 처음 도착한 날 미오리네의 온실에서 받은 토마토가 살면서 처음으로 먹어본 제대로 된 채소였다.

아.

토마토라 하니 불현듯 미오리네가 슬레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쩌지. 많이 걱정하고 계실 텐데. 슬레타는 천천히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얇은 잠옷 차림으로 집을 나와서인지 이미 옷은 너덜너덜하게 해진 지 오래였고 손발은 멍과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그 어디에도 4호의 환각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미쳐가고 있는 걸까? 왜 엘란 씨는 날 여기로 데려온 걸까? 집에만 있으니 답답했던 나머지 자신의 무의식이 밖으로 나가라고 꼬드겼던 걸까하는 생각도 잠시 해보았지만 어찌되었건 지금은 아무 소용없었다. 이미 집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으니까. 빗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숲에서 멍하니 앉아있자니 콰이어트 제로를 막은 후 우주에 덩그러니 남겨졌던 때가 생각이 났다. 어두컴컴한 공허의 바다에서 홀로 끝없는 공간을 유영하며 자신의 마지막을 기다렸다. 무리하게 파르메트 스코어를 올린 탓인지 온 몸은 둔탁하면서도 날카로운 통증이 쉴 새 없이 느껴졌고 분명히 중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육체는 한없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 순간. 잊을 수 없는 그 날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 때, 저 멀리 창백한 푸른 점이 보였다. 처음에는 작고 보잘 것 없던 빛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모빌슈트의 형태를 갖추어 찾아왔다. 누군가가 거대한 기체의 손에 올라타있다가 자신을 향해 팔을 뻗으며 달려와서는 무어라 외치곤 했다. 뇌에 손상을 입으면서 귀로 이어진 신경까지 문제가 생긴 건지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귀를 틀어막은 듯 사방이 웅웅거렸고 시야는 불투명했다. 누구지? 누구세요? “...”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리. “...” 죄송해요, 뭐라고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 ...!” 아. 그제서야 불투명한 막이 걷히고 눈 앞의 인영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미오리네... 씨?” 기력이 쇠한 듯 불안정하고 나약한 목소리가 작게나마 목을 울리며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그 말을 듣고 상대방은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웃으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대답이 너무 늦잖아.”


그로부터 벌써 3년이나 지났다니, 슬레타는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어 주먹을 여러번 천천히 쥐었다 편다. 3년 동안의 기억이라고 해봤자 떠오르는 건 치료와 회복, 그리고 재활이 대부분이었다. 의식불명 상태로 병상에서 몇 개월, 손가락을 까딱 움직이는 일조차 뜻대로 할 수 없어 신경을 어느정도 회복시키고 복구하는 수술만 수차례, 그리고 또 회복하기까지 병원에 있기를 몇 개월. 겨우 집으로 돌아와서도 휠체어가 없으면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리고 2년 반이 지난 뒤에야 겨우 목발을 사용해 집 안을 거니는 정도는 가능해졌다. 체력과 건강으로는 나름 자부심이 있던 슬레타였지만 3년 동안의 고난을 겪고 나니 조금씩 두려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지내다가는 언제쯤 다시 예전처럼 회복할 수 있을까? 다시 뛰어다닐 수는 있을까? 파일럿 일을 새로 시작할 수는 있을까?

여러 불안한 생각들이 또 다시 등을 타고 기어오르려 하는 순간 누군가가 슬레타의 어깨를 잡았다. 화들짝 놀라 손의 주인을 올려다보자 5호가 오래되어 텅 빈 동굴을 하나 찾았다고, 작긴 하지만 비를 피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라 하며 그만 일어나라 말했다.



날씨를 보아하니 비는 아마 밤새 내릴 것이라며 서둘러 숲을 빠져나가려면 지금 충분히 잠을 자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5호가 말하자 슬레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축축한 나뭇가지를 긁어모아 겨우겨우 불을 붙여 만든 작은 모닥불은 미약한 온기였지만 그래도 따뜻했다. 5호가 챙겨온 여러 베리류와 에너지바를 나눠먹으며 공복으로 인해 약해진 위를 조금이나마 채웠다. 이미 해는 저버린지 오래라 모닥불 주변을 제외한 모든 곳은 어두컴컴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무릎을 끌어모은 채 쭈그리고 있었지만 도저히 잠이 찾아오지 않았다. 육체는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 몸이 쑤셨지만 어째선지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5호도 혹 아직 깨있을까 싶어 앞에서 기웃거려 봤지만 곤히 잠들었는지 새근거리는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슬레타는 여전히 매섭게 비가 쏟아지는 동굴 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어둠에 적응해 어느정도는 주변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쩌면 곧 동이 트지 않을까. 아, 내가 왜 여기 있는 걸까. 지치고 쓰라린 발을 만지작거리며 슬레타는 텅 빈 눈으로 동굴 밖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 때, 누군가가 눈에 들어왔다.

4호가 서 있었다.

쏟아지는 비 사이에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젖지 않고 예전 모습 그대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4호를 보고 슬레타는 홀린 듯이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발을 옮기며 동굴 밖으로 나섰다. 동굴 입구로부터 5m 쯤 떨어지자 4호가 손을 들어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가볍게 손짓했다. 사나운 빗줄기가 사정없이 슬레타의 몸을 두드렸지만 개의치 않다는 듯 슬레타는 가만히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뒤늦게 서러움과 그리움이 밀려와 왈칵 눈물을 쏟으며 슬레타는 외쳤다. “왜 나타난 거예요?” 대답은 없었다. “왜, 왜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아요?” 비와 눈물이 제멋대로 섞여 입 안에 흘러들어와 짠 맛이 났다. “이젠 모르겠어요. 정말로 엘란 씨예요? 아니면 제 환상인 거예요? 모르겠어요, 모르겠다고요!” 원망에 가득 찬 목소리로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른다. “대답해줘요!” 슬레타의 외침은 빗소리에 섞여 공중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여전히 귀를 찌르는 듯 한 시끄럽고 커다란 빗소리 사이에서, 4호의 목소리만은 매우 뚜렷하게 귀에 들려온다.

“슬레타 머큐리.”

그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방금까지의 원망은 온데간데도 없이 사라지고 눈가에는 그리움만이 가득 찬다. 찡그렸던 눈썹은 부드럽게 풀어지고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흐른다. 왜, 대체 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어버버 거리며 입만 연신 열었다 닫았다 한다. 그런 본인의 마음을 안다는 듯 4호가 살풋 웃으며 말한다.


“항상 널 지켜보고 있었어. 잘 지내는 거 같아서 다행이야.”

아니, 아니야. 그 동안 제가 어떤 마음으로 지냈는지, 엘란 씨는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떠한 감정을 느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스스로 뛰고, 달리고, 우주를 활보하고 유영하던 순간이 까마득한 과거로 넘어가버리고, 오직 침대와 집 주변에서만 활동하며 생을 이어가던 기분이 어땠는지 엘란 씨는 모르잖아요. 쓰라린 고통과 기나긴 침묵으로 점철된 3년이 제게는 어떤 시간이었는지 모르잖아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생겼잖아. 진정으로 널 사랑해줄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생겼지.”

하지만 그만큼 많은 걸 잃었어요. 알고 싶지 않았던 것들도 알았고요. 저의 비밀, 어머니의 진실, 제게 찾아왔다가 떠나간 많은 사람들, 건담의 무게, 그 모든 것들을 제쳐두고 지금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만 집중하라고요? 그럴 수가 없어요. 그러지 못 했어요. 떨쳐낼 수 있다고, 전진할 수 있다고 했지만 그러지 못 했다고요. 과거는 때로는 저를 가두고 꿈은 저주가 되어 돌아와요. 미오리네 씨를 지키기 위해 처음으로 살인을 저지른 날, 소피가 죽은 그 날, 학원이 부서지던 날, 그 모든 것들이 아직도 제게 남아 저를 옭아매고 괴롭게 만들어요. 도망치면 하나, 전진하면 둘이라고 했는데, 제가 전진한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얻지 못해도 전진해야 하는 순간은 있으니까, 전진해야만 하니까 나아갔는데, 아직도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더 나은 선택지가 있었을까? 이것보다 더 옳은 선택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끝없는 후회가 불현듯 저를 찾아와요.

“왜 저를 여기로 데려오신 거예요?” 슬레타가 묻는다. “엘란 씨는 항상 무언가를 생각하시는 듯 보였죠. 이제 말해줘요. 저를 왜 여기로 이끄신 거예요?”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대답을 보채는 슬레타를 보고 4호는 다시 한 번 부드럽게 웃는다.


“지구는 생명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곳이지. 모든 것들의 고향이자 태초의 근원지야. 봐, 슬레타. 비가 내리고 있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닌 순리에 따라 흘러가는 것들이야. 강은 거세게 땅을 박차고 흐르고, 지면에는 생기 있는 풀들이 햇빛을 양분 삼아 자라지. 더 이상 과거처럼 활력있지 않고 나약해진 몸을 부여잡고 집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너를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기다렸어. 네가 목발에 의존하지 않고도 어느 정도 걸을 수 있게 되는 그 때까지.

너의 의심, 불안, 두려움, 그 모든 것들이 뿌리를 내려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 너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해야했어. 주위를 둘러보렴, 슬레타. 비는 그쳐가고 해는 떠오르고 있어. 네 몸을 봐. 너는 네 스스로 다시 걷고 있고. 고통스러웠던 시간은 지나가고 불안은 흐려지고 의심은 사라질 거야. 어느 날 이 순간을 회상하며 그 때는 그랬었지, 하고 가볍게 넘기는 날이 오겠지. 그 때가 되면, 슬레타.”

4호가 슬레타에게로 가까이 다가간다.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손을 뻗어 슬레타의 거칠고 엉망인 손을 부드럽게 매만진다. 아무런 감촉도, 온기도 느껴지지 않지만 슬레타는 가만히 손길을 받아들인다.

“나를 한 번만 더 생각해줘.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테니까.”


비가 내림에도 주변은 점점 밝아져간다. 산 너머로 태양이 뜨면서 그곳을 시작으로 먹구름들이 점차 흩어지며 하늘을 다시 드러낸다. 비를 맞아 차가워진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과로한 다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거 같지만 애써 버티며 슬레타는 4호를 계속 눈에 담는다. 이번에는 정말로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했듯이.

“엘란 씨.” 무슨 말을 꺼내야 할 지 몰라 그저 이름을 부른다. 나는 여전히 당신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모른다. 얼굴도, 이름도, 살아온 날들도 아무것도 모른다. 언젠가는 알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 날이 아주 까마득한 먼 훗날이 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슬레타는 4호를 마주보며 싱긋 웃는다. 점차 4호의 형태가 흐려져간다. 처음 환각을 마주했던 그 날처럼 하이얀 색을 내며 빛나더니 분자 단위로 흩어져간다. 4호는 마지막으로 슬레타를 위한 말을 남긴다. 안녕, 슬레타 머큐리.

“이젠 나랑 작별할 시간이야.”




과거에 더 이상 얽매여 있지 말라고 전하고 싶었던 걸까? 수성에서의 삶, 파일럿으로서의 삶, 에어리얼과의 기억들, 아스티카시아 학원에 처음 온 날 마녀로 몰려 독방에 수감되었을 때 나를 도와주던 사람들, 그 모든 기억이 이미 추억으로 변해버린 줄 알았는데. 이제 새로운 삶을 향해 다시 전진할 준비가 된 줄 알았는데. 나는 아직도 과거에 얽매여 있었구나.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간혹 후회와 목적을 잃은 분노가 올라와 자신을 덮어씌우려 하면 꾹꾹 눌러 담아놓고는 했는데, 그 감정들이 쌓이고 쌓여 이러한 형태로 내게 찾아왔구나.

17년을 모빌슈트를 타고 인명구조 활동을 하며 살아왔다. 학원에 처음 입학하고 처음으로 새로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인연을 쌓아왔다. 그 중에는 잊지 못 할 사람들 또한 있었다. 자신의 첫사랑이자 사별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잊을 수가 없었다. 영문을 알 수 없이 사라지더니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난 그 사람. 나중에 진실을 알고 나니 더더욱 속이 답답하고 모래를 베어먹은 듯 입 안이 텁텁했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는데. 콰이어트 제로 안에서 그를 만났을 때, 반가움과 함께 든 감정은 서러움, 그리움, 원망, 그리고 간절함이었다. 제발 또 저를 남겨두고 가지 말아줘요. 하지만 그렇게 말 할 수 없었다. 너무나 긴박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는 그렇게 홀연히 나타나 슬레타를 도와주고는 다시 사라졌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고 다시 슬레타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정말로 엘란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자신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환각이었을까? 어쩌면 잔여 데이터스톰이 뇌에 남아있어서 생겨난, 정말로 엘란의 일부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저 극한의 통증으로 인해 고통을 호소하던 뇌가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낸 일시적인 환상일 수도 있고. 무엇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중에, 먼 나중에 직접 그를 만나게 된다면 그 때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 비는 점점 그쳐간다. 저 멀리 사납게 소리내며 흘러가던 강이 점점 조용히 수그러들기 시작한다. 얼굴에 묻은 빗방울이 눈물과 뒤섞여 소리없이 볼을 타고 주륵주륵 흘러내린다.

잘 가요, 엘란 씨.




*


비가 내려 수색에 난항이 생겨 수사가 더욱 늦춰지던 찰나 기적적으로 슬레타를 찾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자연이 그대로 보존된 숲 입구 근처에서 5호가 서 있는 것을 드론이 보았고, 무언가 전달할 게 있다는 듯 손을 흔드는 모습에 통신을 시도하니 슬레타가 본인과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최대한 같이 산 밑으로 내려가려 했으나 슬레타의 건강이 악화됨에 따라 도저히 걸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동굴에 잠시 남겨두고 5호 홀로 숲 아래까지 내려와 전화를 시도하던 찰나 하늘에 떠다니는 수색대 드론을 보았다고 한다.

긴급하게 구조대를 보내 슬레타를 구출했지만 상태는 엉망이었다. 아직 회복조차 다 되지 않은 상태로 며칠을 무리하게 걷다보니 온 몸의 기력은 빠져나가 탈진한 상태였고 크고 작은 상처들이 생겨 2차 감염의 위험까지 있는 상황이었다. 긴급구조용 모빌슈트를 보내 슬레타를 숲에서 병원까지 인계하여 치료를 시작했고, 곧 그 소식은 미오리네에게 닿게 되었다.




“슬레타!!”

잔뜩 화가 난 듯 한 목소리가 병원에서 사방으로 크게 울려퍼진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소리에 재활운동의 일환으로 어설프게나마 복도를 거닐던 슬레타는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어깨를 움찔거리고는 겁 먹은 강아지 마냥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본다.
은색의 짧은 머리를 한 사람이 씩씩거리며 슬레타에게로 다가온다. 분노로 가득 찬 표정에 괜히 기가 죽어 몸을 한껏 움츠리고는 눈치를 본다.

미오리네가 슬레타에게 빠른 걸음으로 걸어간다.
곧 한 발 자국만 더 가까이 가면 닿을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고는 걸음을 멈추고 슬레타를 가만히 바라본다.

노기로 가득찬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툭 떨어진다. 좀 전에 고성은 온데간데도 없고 울음 섞인 숨소리만 내며 슬레타와 눈을 맞춘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연인의 눈물에 슬레타는 몸이 굳어 멍하니 쳐다보다가 묵직한 통증이 일어 괴로운 몸을 이끌고 힘겹게 한 걸음을 옮긴다. 딱 한 걸음을.

“죄송해요.”
“...”

미오리네가 대답 없이 눈물만 뚝뚝 떨구자 아직 신경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 뻣뻣하고 감각 없는 손을 뻗어 미오리네의 손을 붙잡고 들어올린 뒤 자신의 흉터 투성이인 볼에다가 천천히 부비적거린다. 죄송해요. 그 어떠한 변명도 없이 그저 사과만을 반복한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이윽고 슬레타 또한 제대로 된 말을 내뱉지 못 하고 울음소리를 대신 흘려보낸다. 아주 먼 길을 떠났다 드디어 집에 돌아온 사람처럼 서럽게 소리 내며 눈물을 흘린다. 눈가가 온통 붉어지고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 앞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개의치 않다는 듯 그저 크게 소리 내어 운다. 오랜 걸음으로 지치고 망가진 다리는 힘없이 바닥으로 풀썩 쓰러지려 하지만, 미오리네가 팔로 허리를 잡아 부축인 덕분에 여전히 발은 지면을 밟고 단단히 서있다. 바보야, 왜 말 안 했어. 왜 그랬어. 내게서 도망치지 말라고 했잖아. 평생 내 곁에 있으라고 했잖아. 죄송해요.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여전히 울음에 섞여 말을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상관없다는 듯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팔에 힘을 주어 껴안는다.

에리크트가 잘 돌아왔다고,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한다. 육체가 없어 따뜻한 포옹이나 미소는 볼 수 없지만 목소리에서 다정함이 느껴져 슬레타는 천진난만하게 헤실거리며 웃는다. 프로스페라가 휠체어를 끌고 미오리네 뒤에서 천천히 다가온다. 말은 없지만 눈빛에는 나를 여전히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슬레타는 생각한다. 내가 돌아올 곳은 여기라고.
이곳이 내 집, 내 고향, 그리고 자신의 종착지임을 비로소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