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

책과 집 2024. 3. 25. 11:26

엘사에게 꾸짖을 갈 하는 인간 성수들(이하 슬라임)과 못난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 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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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해! 막연한 믿음과 불분명한 신뢰는 너를 스스로 갉아먹을 뿐이야. 네 머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흰 백지만 가득 채우고 있다면 분명 무언가 잘못된 거야. 아무렴, 티끌만한 잡생각 하나 존재하지 않을 수가 있겠니! 그래, 집중해. 집중하라고. 여기를 봐. 손바닥을 서로 마주보게 하고는 부딪혀봐. 짝. 마치 패들로 망아지의 허벅지를 두드리는 듯 한 이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냐고! 안 들린다고? 그래,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네. 이봐, 정신 차려. 흐리멍텅하고 안개가 낀 듯 뿌연 느낌이 들지? 마치 신의 농간처럼 말이야. 그런데 이보게, 착각하지 말게나. 그건 신이 아니니까! 이 생명이 잔뜩 싹트고 삶과 죽음이 언제나 공존하는 푸른 행성 바깥의 어두컴컴하고 고요한 칠흑같은 공간에서 온 불청객들의 장난에 불과하지. 무슨 소리냐고? 이제 좀 생각할 마음이 드나본데, 처음부터 다시 말해주지. 이건 신의 엄벌도, 천벌도, 필연도 아니라네! 넌 그저 놀아났을 뿐이야, 저 악의에 가득찬 어리석고 욕심 많은 이방인들한테!

여호와, 주, 그리스도, 예수, 불타, 석가모니, 야크샤, 간다르바, 알라, 그리고 아몬에 이르기까지. 들어봤을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신이었고 어딘가에서는 악마였을 존재들이라네. 과거에는 수많은 신과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수두룩하게 실존했고 그들을 추앙하는 여러 숭배물과 신의 이름을 기리는 건축물들이 다양하게 남아있었지. 세상 또한 조각조각나 하나의 집단이 아닌 수 많은 나라들로 각 국가간의 이름을 가지고 지내왔다네. 그런데 저 머나먼 우주 넘어 군손님들이 찾아온 후론 세상에 실재하고 살아갔던 삼라한 신들이 하나둘씩 모두 사라지고 야마누스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통일되었지! 마치 아주 먼 과거, 태곳적에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사소하게는 주먹다짐과 같은 아웅거림부터 크게는 국가 간의 전쟁이 벌어졌던 것처럼 곧 서로 신념과 소신이 다른 자들끼리 다툼이 일어났다네. 종교의 자유는 어디로 갔는지! 허나 침략자들이 그러한 사정을 어찌 상관하겠는가? 그 치들이 애초에 그럴 만한 성정이었다면 무턱대고 이곳으로 찾아오는 무례한 짓을 처음부터 벌이지 않았을 테지.

선교사들이 하나 둘 찾아와 듣도보도 못 한 종교를 강요하며 신을 믿으라 요구하기 시작했고 작은 외침은 이내 천둥처럼 큰 목소리가 되어 온 세상을 탄압하기 시작했네. 이전부터 다른 신을 따르던 자들, 크고 작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진 그들만의 전통과 역사와도 같은 다양한 종교를 믿던 자들은 모두 배교자로 취급 받고 낙인되어 끌려가고 고문 당하고 억압받고 사형 당했다. 그리고 세상의 주류가 그들의 종교가 되어버린 날, 외지인들은 말했다네. 의심은 가장 큰 마음의 죄다. 불순하고 불온하며, 어지럽고 세상에 큰 혼돈을 가져오는 모순적인 이물질 덩어리를 솎아내지 못하고 사상에 동조하며 너는 스스로 큰 죄를 저지르나니, 그러하여 너는 마침내 빛을 보지 못하리라.
하늘에 계신 나의 주인님, 유일신, 나의 지배자시여, 오늘도 당신의 거룩한 이름으로 저의 죄를 사하시고 당신의 은총이 온 세상을 빛나게 하이나이다. 바라건대 저의 무지함을 용서해주옵시고 세상의 혼돈과 무질서함을 바로잡아 규율과 질서가 정돈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성은을 내려주소서.

그들이 말하는 신이 뭔가? 야마누스? 이것 참 멍청하고도 한심한 이름이로다! 그래봤자 결국 종교가 바뀐 것 뿐이야. 과거에 믿었던 신과 역사가 뒤로 밀려나고 새로운 주인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뿐이라고! 허나 다른 점은, 불행히도 아주 오래 전 일어난 일이 이제 또 다시 반복된다는 점이겠군 그래. 허구의 소설이 과학을 쫓아내 이성이 아닌 어리석은 헛된 믿음이 주가 되게 하고, 지식과 문명이 탑을 쌓던 곳을 못과 망치로 전부 깨부수어 실존하지 않는 신을 향해 공물과 재산과 자기 자식을 바치는 제단을 짓게 하지. 이 얼마나 슬프고 괴로운 퇴보인가. 찬란하게 광채를 내뿜고 명예롭게 세상을 지배하던 인간의 사고력과 로고스는 전부 흩어져 사라지고, 이젠 텅 비어버린 그곳을 덧없는 망상과 거짓부렁과 같은 교리들이 가득 채웠다네!

“조용히 해!” 아, 그래도 이제 좀 눈에 생기가 도는 구만. 생기가 아니고 짜증인가? 이봐, 네 불만저의가 대체 뭐야? 네 자아가 사라지지 않도록 붙들고 몸의 주권을 뺏기지 않게 보호해주고 있는 게 누구인데? 시끄럽다고? 그야 당연하지! 이 30만명의 목소리를 보라, 들어라, 이 감정을 몸소 겪고 깨닫고 받아들여 보라고! 싫다고? 안타깝지만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 아냐. 네 어머니가 세운 원대하고 이상적인 계획을 실현하려면 너의 깨달음이 반드시 필요해.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늦든 이르든 순차적으로 기어코 일어날 거야. 결국 네가 아무리 기피하고 거부한다해도 언젠가는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지. 그럴 바에는 빠르게 체념하는 게 어때? “너흰 대체 누구야?” 이제와서 묻기에는 너무 늦지 않은 감이 있나 싶은데, 뭐. 우리야 네 몸에 갇혀 지낸 시간이 이미 한 세월이니 답해주지 못 할 것도 없구나. 네가 뭐라고 불렀더라? 아, 맞아. 그렇지. 슬라임. 하하. 그게 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우린 인간 성수들이다. 성수! 그래, 성수라고! 실수인지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찰나의 순간, 그 짧은 오해로 인해 들이켜 네 몸 속에 쏟아져 너와 삶과 시간 그 모든 걸 공유하게 된 그 작은 외지인처럼!

하지만 우린 그런 독자적인 개체가 아니야. 우린 더욱 많지. 우린 집단이란다, 꼬마야. 군체, 군락, 무리, 먼 바다의 수많은 어류들이 떼를 이루어 물 속을 헤엄치는 황홀한 광경을 본 적이 있느뇨? 검푸른 바다를 새카맣게 뒤덮고 하얀 크림색 거품을 만들며 파도를 가르는 진해돈의 무리를 본 적이 있느냔 말이다. 천지를 가득 메운 무수히 많은 그림자들을 보고 숨이 턱 막힐 듯 한 광활함, 압도감, 경외심을 느낀 적이 있느냐고! 허어, 또 말이 없어졌구나. 이런, 미안하다. 널 나무랄 생각은 없었어. 이해하게나, 몇 백년 전에 죽어 자의식은 사라지고 목적의식과 사념만 남은 존재란 무릇 이렇게 되기 마련이지. 아, 오해하지 말게. 우리 모두가 몇 백년을 산 존재인 것은 아니니까. 네 어머니와 비슷한 연배인 자들도 차고 넘치거든.

이야기가 또 딴 길로 샜구나! 그래, 그래도 그 황당무계한 소리를 들은 듯 당혹한 얼굴을 보아하니 어느정도 정신을 차린 것 같구나. 헛소리하지 말라고? 우리가 농이나 하는 걸로 보였던 게냐? 거듭 말하지만 우린 네 어머니가 세운 계획의 결과물이야. 인간 성수란 이름 아래 수많은 개개인의 존재와 명은 사라지고 뭉뚱그려 하나의 사물이 되어버린 자들이라고. 위대하신 레나 잭슨! 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신에 필적하는 여러 위업과 공적을 세우고는 본인조차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육체를 내던지신 성인이시지! 우리는 그를 본받아 어떻게든 티와 먼지만한 도움이라도 되기 위해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벗어던지고 비천하고 속된 물질로 추락했다. 저 삿된 불속지객 같은 놈들과 맞서 인간을 보전하고 불타없어진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서!

그러니, 엘사.
정신 차려라.

어미로서 한 번 실패했다고 자식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기회를 줄 수 있어야겠지.

여긴 사후세계도, 환각도, 너의 심상도 뭣도 아니야. 내가 제대로 된 확답을 내려줄 수가 없어 미안하구나. 그렇지만 무어라 생각하든 그건 네가 판단할 일이지, 내가 대신하여 결정해줄 순 없다. 생각해, 엘사. 원망하든 비난하든 욕짓거리를 내뱉든 상관없어. 더 이상 이곳에 갇혀있지 말고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라. 넌 할일이 아직 남아있어. 그것도 아주 많이. 이곳에서 비척거리며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아깝지.

어서 돌아가거라, 딸아. 망설이면 망설일수록 네 육체는 점점 쇠약해지고 정신은 까마득해질 거다. 네가 그토록 증오하던 자들에게 결국 굴복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오랜만에 만난 어미에게 짓는 표정치고는 그닥 보기 좋지 않구나. 뭐, 상관없지. 어리광은 그쯤하면 됐다. 일어나. 그리고 걸어가라.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