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린다엘사) 내 오래된 배신자에게

책과 집 2024. 3. 29. 02:03

린다엘사라 썼지만 사실상 린다의 독백에 가까움
마지막 문장 몇 개는 Back to life 가사를 차용했습니다

짧음

-

이게 몇 번째 편지지? 이젠 세는 것도 잊어버렸어. 이미 구겨지고 흉져 아무리 애써 펴보아도 잔뜩 뭉개지고 엉망이 된 편지들과 서러움에 미처 참지 못 하고 흘러내린 눈물에 번져 읽기가 힘들어진 편지들, 쏟아져 내리는 거친 물살을 역류하여 올라가 힘겹게 더듬어 찾아낸 나의 최초의 편지들, 그 모든 것들을 한데 모아 바라보니 도저히 새 편지를 쓰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 그러니 감히 너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들과 추악하고 속된 죄를 어깨에 짊어진 채 느릿하고 무거운 손가락에 힘을 주어 네게 하고 싶은 말을 이 편지에 고할게.

고작 오랜만이니, 반갑다느니, 보고 싶었다느니 같은 말로 단순명료하게 감정을 풀어낼 사이는 아니지. 잔존하는 원망과 갈무리되지 않은 서운함이 여즉 남아 우리 사이를 맴돌고 있어. 누구의 잘못이라 확실하게 명시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작 대화로 해결될 일이 아니란 걸 알아. 아무리 머리가 나쁜 너라도 그건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

의도된 실수를 운명이라 할 수 있을까? 네 어머니의 계획, 베키의 모든 생각, 그들이 저질렀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 우린 그 모든 사건의 희생자야. 엘사, 나는 네가 단순히 레나의 자식이기 때문에 선택 받은 거라고, 그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았기 때문에 계획을 이끌 선두자로 낙인된 거라고 생각했었어. 그러나 지금은 잘 모르겠어. 레나가 내게 말했었지. 너는 나와 비슷하다고,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기에 영웅이 될 수 없다고. 나는 그래서 버려졌어. 그렇기에 한 때는 네가 미치도록 증오스러웠고 갈 곳 잃은 들끓은 분노가 너를 향해 흘러갔지. 하지만... 엘사.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너 또한 사랑받고 자랐다고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어. 나도, 네 어머니도 서로 비슷한 신세라고 했으니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건 피차 마찬가지야. 그렇기에 제대로 된 사랑을 주는 법을 모르지. 그렇기에 거부당했고. 그렇다면 엘사, 너는 과연 어떨까?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기에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 아래 자란 너는 어떤 사랑을 받은 걸까?
네 아버지 헨리는 좋은 사람이니 충분한 감정교류와 정서적인 안정을 쌓을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레나는? 그와는 어떠한 교류가 있었지? 단순히 어머니와 딸이라는 말로 이 관계를 단언할 수가 있을까? 그래, 물론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되지. 사랑을 몰라도 줄 수는 있어. 그게 비록 세간의 기준과는 많이 다르더라도 말이야. 내가 생각하기에 네 어머니는 그조차도 제대로 못 줬을 거 같지만.

사랑하긴 했겠지, 애정을 쏟기는 했겠지. 하지만 그건 레나의 기준일 뿐이야. 네가 원하는 감정에는 한참 못 미칠 걸!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도 입이 움직이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넌 항상 거짓말을 못 했으니까. 네 감정에 솔직해져봐, 엘사.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역겹고 더럽고 지저분한 감정들을 숨기지 말고 간솔하게 털어놓으란 말이야. 네가 레나를 원망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 너는 어쩜 어렸을 때와 변함없이 감정이 항상 얼굴에 드러나니? 뭐, 그런 네 모습이 좋았지만. 오래간만에 너를 다시 만났을 때 전혀 변치 않은 모습에 울컥 그리움이 솟아 하마터면 일을 그릇칠 뻔했어. 아니, 이미 엉망이 되었던가. 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귀신이 이곳에 있나니, 죽은 네 어머니의 흔적이 아직도 여기에 남아 머무는구나. 어쩌면 지금 내 곁에 있을지도 모르지. 혹은 네 곁에 말이야. 있어야 할 곳으로 마땅히 돌아가지 못 하고 헛된 미련에 구천을 떠도는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
나는 네 어머니를 원망해, 엘사. 이건 변치 않을 사실이야. 너 또한 나와 비슷한 마음이리라 생각해. 우리가 다시 만나면 그때는 저번과는 다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야. 어쩌면 좀 더 가까워질지도 몰라. 기억나? 땅바닥에 누워 하늘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던 지난 날들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끊임없이 날 살아가게 만들고 있어. 너와의 추억이 없었다면 지금쯤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이 점은 네게 감사해. 너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놨으니까. 그게 어떤 쪽이든 말이야.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날이 언젠가 올까? 바라건대, 바다에 침몰한 그리운 옛친구를 다시 내 손으로 되찾기를 간절히 빌어봐. 그 때는 네게 글이 아닌 말로 전해줄게. 속마음을 전하기에는 편지도 좋지만 직접 얼굴을 맞댄 상황에서 굳이 쓸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어쩌면, 이 편지는 영영 네게 전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네.

네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기억해?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물었지. 그때는 의문형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야. 내가 널 찾아낼 테니까. 너는 나와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널 다시 삶으로 데려올 테니까. 네가 없어졌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렇지만 분명히 넌 여기 있어. 다시는 사라지지 않을 거란 걸 느껴.
너도 날 다시 살려냈잖아. 찾을 수 없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는데, 네가 내 마음 속 깊이 심어줬다는 느낌이 들어.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어. 세상이 아무리 외면하더라도 내게 돌아오는 네 불빛이 보여.

그러니까 엘사.
죽지 마. 넌 죽으면 안 돼.

내가 반드시 널 찾아낼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