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린다엘사) 근면, 성실, 정의 1

책과 집 2024. 4. 3. 18:40

강력반 형사 엘사와 한때 경찰을 꿈꿨으나 권력을 좇아 조폭 우두머리가 된 린다 라는 주제에서 시작된 글입니다
경찰 체제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저도 잘 모릅니다 어차피 허구의 세계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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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국민에게 봉사한다. 우리는 국민의 안전과 보호를 최우선으로 삼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의무를 저버리지 않는다. 근면, 성실, 정의. 경찰서 한 가운데에 정갈한 서체로 쓰여 가훈 마냥 붙어있는 액자 속에 들어있는 종이는 누렇게 변색되어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무릇 대부분의 경찰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범죄 예방 및 진압, 수사, 그리고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사명감을 품고 들어올 터이다. 하지만 엘사 브라이언트에게는 그 외에 몇 가지 목표가 마음 한구석에 박혀 있었다. 남에게는 말 못 할 그의 진실된 목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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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걸이로 겨우 경찰대에 들어와 높은 실적과 성과로 수석으로 졸업한 엘사는 어디로 배치받고 싶냐는 물음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강력반이라 답했다. 이유는? 세상에 풀리지 않은 미제 사건의 진상을 찾아 밝히고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의 원통함을 풀어주고 싶습니다. 필기 시험은 전부 줄줄이 낙방해 간신히 최소 점수만 넘은 엘사치고는 드물게 명료하게 잘 짜여진 대답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단순한 허울 뿐이 아닌 엘사의 진심이 어느정도 담겨있었다. 어릴 적 실종된 친구의 행방과 어머니의 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어떻게든 찾아내 숨겨진 실체를 밝혀내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엘사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그렇게 강력반으로 배치받은 엘사에게 한동안은 눈 코 뜰새 없이 바쁜 나날이 지속됐다. 최하위 말단으로 들어온 만큼 자잘한 사건 서류 정리부터 직접 현장에 나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며 몸으로 부딪히고 구르고 때로는 싸우면서 사무직과 현장직을 전부 겪으며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샌가 신입이던 엘사는 정신 차려보니 고참 형사가 되어 있었다. 수많은 사건 기록들을 적은 서류 뭉치를 펄럭이며 사무실 의자에 앉아 검토하던 엘사는 이래서야 자신의 목적은 언제쯤 이룰 수 있나 잠깐 한탄하며 의자를 뒤로 쭉 빼고는 반 쯤 불이 나가 껌벅거리는 전등을 올려다보았다. 눈부심에 저절로 눈가가 찌푸려져 살풋 인상을 쓰던 엘사는 오래전 일어났던 그 일을 회상했다. 그러니까, 언제였더라. 엘사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던 사건의 시작이.

엘사가 기억하는 자신의 첫 친구는 린다 메사이야였다. 머리가 대단히 영특하고 눈치가 빠르던, 조금은 싸가지가 없지만 그래도 착하고 웃음이 이쁘던 아이. 자신은 언젠가 경찰이 되어 권력을 잡아 높은 사람이 되는 게 목표라던, 그러니 너도 나와 함께 경찰이 되자고 제안하던 아이. 우리 엄마는 경찰이지만 그닥 높은 사람 같지는 않던데. 니네 엄마는 형사로 일하니까 그런 거고. 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더 높은 직책으로 단숨에 올라갈 거야.
“나는 공부머리가 없어서 안 될 걸.” “바보야, 그럼 체육 특기생으로 가면 되잖아. 넌 운동을 잘하니까 그쪽을 노리면 돼.” 자신이 갈피를 못 잡고 헤맬 때면 고삐를 잡고 기꺼이 길을 알려주던 아이. 자신은 몰라도 그 아이라면 반드시 경찰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만큼 영리하고 똑똑한 애였으니까. 그 일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지금 제 곁에서 같이 웃으며, 혹은 욕짓거리를 내뱉으며 남은 잔근무들을 처리하고 있었겠지. 그 사건만 없었더라면.

대부분의 불행은 예기치 못 한 순간 찾아온다. 심장마비, 교통사고, 실족, 혹은 실종이든 그 무엇 하나 예상을 했을 때 찾아오는 법이란 없다. 그렇기에 더욱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이겠지. 기억력이 특별히 뛰어난 편은 아닌 엘사였지만 그 일이 있던 날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자잘한 도둑질 같은 사건이 종종 일어나긴 했으나 그다지 우범지대는 아니었던 곳에서 발생한 일가족 살인 사건.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참극에 한동안 뉴스와 신문에서는 그 사건에 관한 온갖 보도와 소문으로 점철되어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었다. 강도 몇 명이 일반 가정집에 침입해 금품을 탈취하려 하다가 피해자들이 거세게 저항을 해 당황하여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질렀고 겨우 빠져나와 도망친 어린 딸만 살아남았다는 끔찍한 사건. 엘사는 그 날의 일을 떠올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참극이 일어났던 날은 원래 자신과 린다가 만나서 같이 놀기로 한 날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엘사는 그 날 따라 유독 잠이 쏟아져 깜박 낮잠에 들어 린다의 전화를 받지 못 했고, 자신의 유일한 친구가 응답이 없자 기분이 조금 상한 린다는 그대로 자신도 집에 남아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때마침, 운이 좋지 않게도, 정말로 빌어먹게도 그 사건이 벌어졌고, 린다는 자신의 눈 앞에서 자기를 키워준 부모가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꼴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버이를 버리고 본능에 따라 짐승처럼 달려 집으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인 린다는 너무나 어린아이였기에 증인으로 법정에 서지 못했고 가해자들은 재산을 노리고 주거 침입하였으나 피해자들의 예상보다 거센 반항에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을 들어 총 20년의 형을 선고 받았다. 한 가정을 파탄내고 어린아이의 삶을 박살낸 자들의 죗값치고는 터무니 없이 값싼 형벌이었다. 린다가 울며불며 그냥 강도 사건이 아니라고, 누군가가 더 있었다고 호소했지만 바로 앞에서 큰 사건을 목도한 만큼 정신 상태가 불안정하고 무엇보다 어린아이라는 점을 감안해 린다의 의견은 전부 묵인 당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경찰이 사건을 축소시키고 그대로 종결시키려 하고 있다고,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내일 다시 경찰서로 가 사정해볼 것이라며 제발 자신과 같이 가달라는 린다의 간청에 엘사는 알겠다고 답했다. “응, 갈게.” “꼭이야. 반드시 와야 해.” “알겠어, 걱정하지마. 반드시 갈게.” 자신의 손을 붙잡는 린다의 손을 꼭 맞잡으며 엘사는 몇 번이고 약속을 했다. 반드시 와달라는 린다의 말을 재차 반복하며 따라하면서.

허나 엘사의 그 말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직 어린아이였던 만큼 엘사 또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의 부모에게 무의식 중에 줄줄 토로하던 아이 중 하나였다. 가만 엘사의 말을 듣고 있던 레나가 고개를 저으며 가지 말라 하니 엘사가 의아해하며 이유를 물었다. 엄마가 담당하는 사건이잖아. 그리고 내 친구 일인데… 엘사가 무어라 항변하려하자 함부로 그런 사건에 관심 가지지 말라고, 경찰이 알아서 할 것이라 차갑게 말을 가로막는 레나의 무언가 싸늘한 눈빛에 조금 움츠리던 엘사는 알았다고 답하고는 막연하게 괜찮겠지 생각하고는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어른들 일이니까 어른들이 해결해줄 거야. 그리고 우리 엄마도 경찰인 걸.

그리고 약속 당일 날, 린다는 사라져 다시는 영영 엘사 눈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부재중 통화 기록만 몇 건 남겨둔 채로.

엘사에게 그 날의 일은 두고두고 후회할 죄책감과 미련 덩어리 그 자체였다. 만약 그 날 엄마의 말을 무시하고 린다에게 찾아갔더라면, 내가 조금 더 의견을 내 엄마와 싸웠더라면, 아니, 진작에 린다 곁에 있었더라면 많은 것들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미 한참이나 시간이 흘러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지난 순간들을 떠올리며 엘사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린다는 어디로 갔을까? 린다가 사라지고 엘사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친구의 행방을 물어보았지만 들려온 대답은 고아들을 돌봐주는 곳으로 갔겠지 하는 어찌보면 무성의한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 애는 이제 챙겨줄 보호자가 없으니까. 보아하니 친척들도 없는 모양이고. 국가에서 책임져줄 테니 걱정 마라고 어릴 때부터 보아온 자식의 소꿉친구를 완전히 자기와 동떨어진 존재인 양 덤덤하게 말하는 엄마의 낯선 모습에 살짝 거리감을 느꼈던 그 때를 엘사는 지금도 여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 후, 자신의 어머니 또한 죽음을 맞이한다. 린다의 양친과 비슷하게 강도 사건으로.

엄마. 연쇄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들에 엘사는 작게 레나를 부르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높은 보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경력이 있는 고참 형사였다. 지금의 자신이 속한 곳과 같은 강력반 출신의 형사였던 엄마가 한낱 강도에게 어이없게 당했다는 사실에 엘사는 여전히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이 또한 린다 때와 비슷하게 빠르게 종결되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장례식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으며 많은 경찰 관계자들과 때때로 신원을 알 수 없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찾아와 조문을 하고 갔다. 개중에는 분명히 다 같은 검은 양복을 입었음에도 유난히 사납고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자들도 있어 어린 엘사의 눈에도 살짝 위화감이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풀리지 않는 의문들, 사라져버린 진실들, 끝없는 질문 속에 엘사는 어떻게 해야할까 방황하던 중 어릴 적부터 자신을 보아왔던 또 다른 친구이자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인 센의 뭘 망설이나, 이미 어디로 가야할지 넌 알고 있지 않나 라는 조언의 확신을 얻고 갈팡질팡하던 마음을 부여잡고 기어코 사건의 실체를 알아내겠다 다짐하며 자신의 어머니의 발자취를 따라 이 길로 뛰어들었다. 오래 전 실종된 친구와 같이 꿈꾸었던 경찰의 길로. 친구의 행방불명과 어머니의 사망을 겪었다고 해서 엘사의 인생이 마냥 어둡고 침울하기만 한 편은 아니었다. 어찌되었건 자신의 아버지 헨리도 끊임없이 자기를 챙겨주고 시간을 같이 보내며 회복을 위해 노력했고 경찰대에 들어와 줄리아나 세라 같은 새 친구들도 많이 만났으니까.
비록 졸업한 지금은 각자 개인의 능력을 살려 유난히 머리가 좋고 계획적이던 줄리아는 국제형사경찰기구인 아이시피오로, 아버지가 경찰서장이었던 만큼 여러모로 든든한 아군이 있던 세라는 자신의 지성과 실력을 이용해 최연소 서장으로 등극했다. 조금 불공평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만큼 능력이 뒷받침해주니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려니 하고 무던하게 넘겨버렸다. 강력반으로 들어온 엘사는 초창기부터 여러 잡범과 강력범들을 차례차례 검거하며 실적을 쌓으며 수월하게 승진을 하였고, 서에서의 위상도 차츰 높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범인을 검거하고 사건을 담당했을까, 어느날 엘사에게 하나의 작은 사건이 내려왔다. 근래 들어 잘 눈에 띄지 않던 폭력배들이 수면위로 점차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어떤 조직과 연관된 것 같다면서 한 번 네가 맡아보라고 자기 담당 사수가 보내준 파일이었다.

네가 범인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맡잖아. 대강 보아하니 딱 봐도 폭력 조직인데, 어디 한 번 우두머리 찾아내서 검거해 봐. 딱히 큰 사건도 저지른 적 없는 거 보면 소규모 조직 같으니 그닥 어렵지는 않을 거야. 자신은 다른 사건들만 담당하기에도 벅차다는 듯 떠맡기듯 안겨진 사건에 엘사도 짐짓 당황했으나 차라리 빨리 처리해버리는 게 낫겠다 싶어 별 다른 불평없이 알겠다고 승낙하고는 정보를 우선 수집하기 시작했다. 진짜 생각보다 특별히 큰 사건 사고는 없네. 끽해야 몇 날 며칠 길거리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돈을 갚으라며 난동을 부렸다느니, 가게에서 도둑질을 일삼다 검거 되었다느니 하는 다른 경범죄범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동태에 정말 소규모 집단 같은데 검거하는데 그닥 오래 걸리진 않으려나 따위에 생각을 하며 마우스를 딸칵거리며 검색을 하던 무렵 문득 어떠한 의구심이 엘사의 생각을 사로잡았다.
이상하다. 너무 많아. 특출나게 큰 사건이 없는 건 맞다. 뉴스에 떠들썩하게 보도될 만큼 사건을 저지른 것도 거의 없다. 하지만 조직의 이름 자체는 너무나 많이 거론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무나 사소하고 흔해 그냥 지나치기 쉬운 도둑질과 관련된 기사에도 이 조직이 몇 번 언급된 적이 있다는 사실에 엘사는 의아함을 품었다. 아무리 자잘한 범죄라 한들 소규모가 아니라 대규모라면 골치가 아파진다. 자칫하면 언제든지 대형 범죄로 이어질 수가 있으니까. 게다가 무리가 와해되지 않고 계속 결속되고 있다는 건 이미 그들만의 무리의식이 형성된지 오래라는 이야기다. 단순히 같이 있는 것만으로 동료애니 동지애가 생기지는 않겠지. 함께 집단으로 행동하고 실행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미처 숨기지 못 해 수면위로 떠오른 이런 소소한 잔범죄들 말고, 음지에 가라앉아 사회의 그림자 속에 숨어 일어나고 있는 커다랗고 역겨운 범죄들이. 자기 선에서 끝낼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선배에게 보고를 해야하나 고민하는 중 어떠한 기사가 엘사의 눈에 들어왔다. 오래 전 일어나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지금은 세간에서 잊혀진 일가족 살인 사건. 그 사건을 다룬 기사에도 조직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아몬. 아몬이란 이름의 조직이 자신과 린다를 파국으로 몰아넣은 과거의 끔찍한 참극과도 연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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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일반적인 작은 폭력 조직이 아니라니까요!” 드물게 잔뜩 흥분하여 성내는 엘사의 모습에 상사가 석연찮은 표정으로 자기한데 금방이라도 덤벼들 듯 화내는 후배를 바라보았다. “여러 사건을 다룬 기사들에 이름이 너무 많이 거론되어 있어요. 아무리 작은 사건이라도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기에는 미심쩍은 게 많아요. 본래 대부분의 사건이 그렇잖아요. 하인리히 법칙 아시잖아요, 1번의 큰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는 작은 사고가 29번 정도 생기고, 그 전에는 자잘한 사고가 300번은 일어난다는 법칙 말이에요! 이것도 마찬가지예요. 그냥 경범죄라고 무시할 게 아니에요. 아무리 죄의 경중이 낮다한 들 이 조직과 관련된 사건 빈도수가 너무 높다고요!”

“엘사, 우선 진정 좀 하지.” 엘사에게 직접 사건을 건네준 상사가 한숨을 후 내쉬고는 마음을 가라앉히라는 듯 손바닥을 보이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안 그래도 직접 말하려고 했는데, 자네가 이렇게나 이 사건에 열중할 줄은 몰랐군 그래. 내 잘못이야. 자네한테 괜히 그 사건을 건네주는 게 아니었는데…” 상사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말을 이었다. “윗선에서 말씀이 내려왔어. 이런 자잘한 사건들 따위에 괜한 시간 빼앗기지 말고 다른 중범죄에 더 집중하라더군. 이런 건 다른 지부 관할로 넘기겠다면서.”
“강력범죄수사반이 아니면 누가 폭력조직을 맡아요?!”

터무니 없는 소리에 엘사가 항의하자 한껏 미간을 찌푸리고 인상을 쓴 상사가 따라 언성을 높이며 강압적으로 외쳤다. “엘사, 지금 자네 평판이 어떤지 알기나 해? 시답잖은 폭력배들의 잡다한 사건에만 집중하고 다른 사건에는 통 신경을 쓰지 않아 점점 실적도 떨어지고 성과도 미미해지고 있잖아! 내가 너한테 말하려고 했던 게 뭔지나 아나? 자넨 이미 이 사건에 대한 수사권이 없어! 이미 위에서 명령이 떨어졌네. 시정잡배 놈들에 대한 집착은 그만하고 다른 범죄 사건부터 우선시하라고! 이 시간부로 자네는 이 사건에서 열외야. 그래, 뭐라고 했지? 아몬 조직이라 했나? 당장 여기서 손 떼게. 그리고 본래의 업무로 돌아가. 더 이상의 직무 유기는 그만하고 형사로서 할 일을 하게.”

불공평한 처사에 볼 멘 소리를 내며 엘사가 노려봤지만 번복은 없다는 듯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상사에 작게 혀를 차고는 알겠다는 대답도 없이 돌아섰다. 아무리 위에서 다른 사건에 집중하라해도 도무지 찝찝함이 가시질 않았다. 본래 특출나게 감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다년간의 형사 생활로 발달한 촉이 무언가 기이하다고 자꾸만 자신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권한을 뺏어버리시겠다, 그러면 다른 방법을 찾지 뭐. 엘사는 천장 구석에 박혀있는 방범 카메라를 흘깃 보고는 몸을 돌려 문자 내용이 보이지 않도록 한 뒤 줄리아와 세라에게 연락을 보냈다. ‘저번에 내가 추적하던 조직 있잖아. 아몬조직. 혹시 그와 관련된 정보가 뭐라도 나오면 꼭 알려줄래? 사소한 거라도 상관없어.’ 국내 조직인지 국외까지 뻗어나간 조직인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타 부서의 도움이 있다면 훨씬 수월하게 찾아낼 수 있을 터였다.

본디 태생이 무덤덤하여 쉽게 감정의 동요가 찾아오지 않는 엘사였지만 아몬 조직과 연관된 일에는 자꾸만 마음이 흐트러지고 조급함이 들었다. 선천적인 기질마저 엇바꿔놓는 이 사건에 엘사는 커다란 의심과 갈망을 품으며 날이 갈수록 점점 크게 집착해갔다. 아무리 몰래몰래 수사한다한들 주변에서 이를 영원히 눈치채지 못하리란 힘들었다. 분명히 으름장을 놓았음에도 여전히 사건에 매달리는 엘사에 상사가 몇 번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주었지만 그때마다 어물쩍 빠져나갈 뿐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진전없는 수사를 지겹게도 반복할 무렵, 비번이라 집에서 느긋하게 누워 꾸벅꾸벅 졸던 엘사에게 난데없는 알람 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져 귀를 깨웠다. 오늘은 휴일인데 무슨 일인가 싶어 확인해보니 줄리아로부터 또 다시 연락이 와 있었다. 이번에도 또 어떤 가게에서 강도질을 하다 잡혔다느니 하는 일이겠지 싶어 심드렁한 표정으로 문자를 확인한 엘사는 뜻밖의 내용에 눈을 크게 뜨고는 자켓만 대강 걸쳐입곤 탄창을 확인하고 형사에게 기본 지급되는 소형 리볼버를 허리춤에 찬 뒤 곧바로 집을 뛰쳐나갔다. 문자에는 아몬 조직과 타 조직이 어느 지역 근처 부둣가에서 암거래를 할 예정이며, 그 장소에 아몬 조직의 부두목도 올 거라는 정보가 입수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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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 철썩거리며 인공적으로 만들어져 시멘트로 이루어진 곶을 바다가 파도를 보내 세차게 부딪히며 때리고 있었다. 비릿하고 짠 바닷내음이 바람에 섞여 엘사의 코를 쉴 새 없이 자극했다. 자꾸만 근질거려 기침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고 컨테이너 박스 더미 사이에 숨어 줄리아가 말한 약속 장소를 유심히 관찰하며 엘사는 초조히 때를 기다렸다. 사건에서 제외된 만큼 상부로부터 추가적인 지원을 기대할 순 없어 홀로 여기에 잠복하고 있지만, 그래도 물적인 증거를 잡으면 분명 원호가 내려올 터였다. 날 추궁하는 건 나중 일이고 우선 눈 앞에 놓인 범죄자들을 소탕하는데 급급하겠지. 뒷일은 추후에 생각하고 아몬 조직을 붙잡는데에 집중하자 다짐하면서 엘사는 끈질기게 한 자리에서 누군가가 오는지 곁눈질로 살피며 인내했다.

손목 시계를 틈틈이 내려다보며 시간이 어느정도 지났는지 파악하는 것도 하나의 습관으로 자리 잡았을 무렵 저 멀리 누군가가 하얀 세단을 선두로 여러 차량을 끌고 나타났다. 차량은 총 여섯 대, 거기서 내린 사람은… 하나, 둘, 셋, 넷… 생각보다 많네. 어림잡아 20명 쯤 되려나. 혹여 순간이라도 놓칠까 갈급한 마음에 엘사는 줄리아에게 전화를 걸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지금 네가 말한 장소에서 대기 중이야. 지금 조직원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는 거 보면 아무래도 정보가 사실인 거 같아. 생각보다 수가 많아서 나 혼자로는 제압이 힘들 거 같아 일단은 지켜보고 있는데, 만약 내가 더 이상 연락이 안 되면 이쪽으로 인력 좀 보내줘.” 나지막한 전화 소리마저 새어나가 혹여나 들킬까 조마조마해하며 줄리아의 대답을 채 마저 듣지 않고 성급히 끊어버린 엘사는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마저 아까운지 천천히 숨을 고르며 현장을 계속 응시했다.

부두목이 누구냐, 빨리 나타나라. 저 놈? 아니야, 건들거리는 행동거지를 보아하니 그냥 일개 조직원일 뿐이야. 방금 검은색 SUV에서 내린 저 놈일까? 아냐, 옷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타 조직의 일원이겠지, 저 놈 또한 부두목은 아니야. 제기랄, 어서 나와봐. 어디 얼굴이나 한 번 보자고. 얼마나 큰 거물이길래 이렇게 젠체 거드럭거리며 늦장을 부리는지 궁금하네. 어쩌면 이제야 아몬 조직의 정체에 대해 한발짝 다가워진 걸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목을 쭉 빼며 기다리고 있던 엘사의 눈에 익숙하지만 낯선 누군가가 들어왔다.
마치 서로 잘 어우러진 음들 사이로 불쑥 불쾌감을 드러내며 존재를 나타내는 불협화음처럼, 흰 양떼 무리들 사이에 끼어 거슬림을 유발하는 검은 양처럼, 삼삼오오 모여 물가에서 목을 축이는 누떼를 노리고 기어코 비집고 들어와 평화를 깨트리는 악어처럼, 이 장소와는 모로 봐도 도저히 어울리지 않고 여기에 있어서도 안 될 존재가 이곳에 있었다. 검은 정장을 입고, 자신의 눈색을 꼭 닮은 어두운 보라색 넥타이를 매고, 어렸을 때 모습과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틀림없이 기억 속 그 아이인 사람이 저곳에 있었다.

린다 메사이야.
어릴 적 실종되어 여태껏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자신의 소꿉친구가 지금 현재 제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