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린다엘사) 근면, 성실, 정의 2

책과 집 2024. 4. 6. 02:31

폭력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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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존재하는 걸 본 순간, 엘사의 머릿속은 파도끼리 서로 부딪혀 생긴 하얀 거품이 수면 위를 온통 가득 채워 검푸른 바다를 희게 물들인 것처럼 새하얘졌다. 채 누구인지 머리로 인지도 하기 전부터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어떻게 해야할지 깨달은 몸은 진작에 다리에 힘을 주고 지면을 박차 달려나가고 있었다. 거의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 어느때보다 가볍게 느껴지는 몸뚱아리를 움직여 순식간에 현장에 뛰어들은 엘사는 곧바로 허리띠에 매인 권총 주머니에서 리볼버를 꺼내들어 조직원들에게 들이밀며 소리쳤다.

“당장 하던 일 멈추고 손 들어!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보인다면 즉시 발포하겠다!”

난데없는 사복경찰의 등장에 조직원들이 술렁이며 당황해하다 이내 전력이 한 명 뿐이란 것을 깨닫자 곧 당혹스러움은 비웃음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누군가 했더니 정부의 개잖아? 짭새가 혼자 여기까지 뛰어들어오다니, 정의로움에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렸나본데! 곳곳에서 낄낄거리는 비열한 웃음소리와 조롱이 한데섞여 엘사에게 흘러들어왔다. 삿된 말들에는 신경을 쏟지 않은 채 주변을 잠깐 고개를 휘 돌려 둘러본 엘사는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대곤 자신을 바라보는 린다에게 총구를 천천히 겨눈 채 짐짓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여기 있는 거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고? 혹시 협박 당했어? 아니면 인질로 잡힌 거야? 두서없이 평정을 잃고 간혹 삑소리를 내며 그리움과 낯섦과 혼란스러운 감정에 덜덜 떠는 목소리로 간신히 질문을 내뱉은 엘사가 말을 끝맺자, 린다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눈을 이리저리 도로록 굴려 무언가를 생각하는 양 행동하더니 이내 비웃으며 답했다.

“넌 정말 아무것도 변한 게 없구나.”
“뭐?”

순간 뒤에서 들려온 다급한 발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엘사가 본능적으로 걸음을 빠르게 앞으로 옮겨 피하자 후방에서 제압하려고 했던 듯 목에 뱀 문신을 한 조직원 한 명이 휘청이며 허공에다가 허우적거리며 큰 팔을 휘둘렀다. 뒤이어 다른 조직원 몇 명이 자신에게로 달려들자 엘사는 팔을 하늘을 향해 쭉 뻗어 총구를 위로 올린 뒤 그대로 방아쇠를 당겨 발포했다. 탕. 두텁고 거대한 종 여러개를 동시에 쇠망치로 내리친 듯 한 불쾌하고 사나운 낙뢰같은 소리가 사방에 울려퍼졌다. 엘사가 다시 총구를 내려 자신을 둘러싼 조직원들을 차례로 겨냥하며 말했다. “첫 번째는 공포탄이지만 두 번째부턴 실탄이야.” 또 다시 재차 덤벼든다면 이번에는 몸에 바람구멍이 날 것이란 경고어린 말에 조직원들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자 엘사는 다시 린다에게로 총구를 돌린 뒤 힘겹게 눈을 맞췄다.

그토록 오랜 시간 너를 찾아다녔어. 그동안 네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어디 안 좋은 일을 당한 건 아닌지, 아니, 살아는 있는지 매 순간 네 생각을 하며 지내왔어. 언젠가 다시 만날 때를 고대하며, 너를 다시 찾게 되는 날을 기다리며 경찰이 되었고. 그런데 이게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난 아직도 모르겠어. 린다…” 말꼬리를 흐리며 차마 제 이름을 끝까지 부르지 못하는 엘사를 보고 린다가 입술을 비죽이며 배릿하게 웃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총구에 이마를 들이밀었다. 커다란 폭발이 막 일어났던 뒤라 아직 뜨거운 열기가 조금 남아있어 엘사가 본능적으로 손을 뒤로 늦추려 했지만 린다는 피하지 말라는 듯 손목을 붙잡고 일부러 제 이마에 갖다대고는 엘사를 노려보았다. 머리를 앞으로 조금 숙이며 밀어내자 살짝 식어 미지근하고 딱딱한 총구의 감촉이 이마를 지그시 누르는 게 느껴졌다.

엘사가 움찔거리며 눈썹을 설핏 팔자로 휘며 뒤로 한 걸음을 물리자 그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지은 린다가 말했다. “쏴 봐. 근데 엘사, 할 수 있겠어? 네 그리웠던 소꿉친구한테?” 점점 몸이 차게 식어가며 패닉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 어차피 형사들은 허벅지 밖에는 못 쏘나?” 엘사의 창백한 엄지 손가락이 리볼버의 공이치기를 미끄러지듯 두어 번 헛돌며 스쳤다. 식은땀이 송글송글 피부 바깥에 맺히며 등허리와 목께를 축축하게 적시기 시작했다. “참 안타까워. 법에 매여가지고 범죄자를 앞에 두고 마치 제 주인에게 혼날까 봐 겁 먹고 움츠린 개마냥 발포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처지라니.” “린다.” 엘사가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린다가 손아귀에 힘을 주어 엘사의 손목을 바닥으로 훅 꺼지게 하고는 바로 반대로 꺾어버리곤 나머지 손으로 손등을 강하게 내리쳤다.
순식간에 느껴진 둔탁한 통증에 반사적으로 손가락에 힘이 풀려 리볼버를 바닥에 떨구자 린다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발로 차 저 멀리 방파제 너머 파도 위로 보내버린 뒤 턱짓을 해 무언의 사인을 보냈고, 그러자 일제히 조직원들이 달려들어 엘사를 단단히 붙잡고는 버둥거릴 틈조차 갖지 못하도록 바닥에 내리찍어 눌렀다.

갑작스레 몸이 아래로 처박히면서 자켓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이 땅으로 추락하자 이를 응시하던 린다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짓밟아 박살냈다. 처참하게 박살나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뭉개진 핸드폰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보는 엘사를 내려다보며 린다가 조소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경찰이 되었구나. 그런데 봐, 엘사. 너는 변변찮은 지원 하나 못 받고 버림 받아 홀로 잔뜩 구르면서 아등바등 애쓰고 있지만, 나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 위에 섰어. 보여? 이 수많은 사람들이 전부 내 말 한 마디면 그 어떠한 지시를 내리든 망설이지 않고 따라. 그 어떤 추잡하고 역겨운 명령이든!” 린다가 성큼 다가와 한층 거리를 좁힌 뒤 한 쪽 무릎을 꿇고는 여전히 바닥에 결박된 엘사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권력을 잡았어, 엘사.”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다정하게 만지작거리며 린다가 픽 웃음지었다. “하지만 지금 네 꼴은 이게 대체 뭐니?”

비웃음이 가득한 말들에 바로 증오가 담긴 성난 언어들이 잔뜩 들려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조용히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는 엘사에 린다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고는 자기도 따라 입을 다물고 엘사를 마주봤다. 여전히 과거와 변함없이 자신을 또렷하게 주시하는 눈. 해의 기울기와 조명의 색에 따라 언뜻 붉은색이 섞인 자줏빛으로 보이기도 하고, 바다의 푸른색이 일부 섞인 바이올렛 색으로 비치기도 하는 엘사의 보랏빛 동공을 바라보며 린다는 묵묵히 엘사의 대답을 기다렸다. 배신에 대한 원망일까, 그리움이 섞인 호소일까, 아니면 상반되는 두 감정이 서로 섞여 혼란스러운 날 것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낼까. 끈질기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던 린다를 쳐다보던 엘사가 드디어 내뱉은 말은 예상치 못 한 변수 투성이로 이루어진 문장이었다.

“그런데 넌 왜 행복해보이지 않아?”

그렇게 날 버리고 떠났으면 행복했어야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사라졌으면, 잘 살기라도 했어야지. 예측하지 못한 난데없는 답변에 잠시 벙 찌던 린다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고개를 위로 들어 린다의 표정을 살피려는 엘사의 얼굴을 그대로 구두 끝으로 겨냥해 발로 차버렸다.
눈 앞에 무언가가 돌진했다는 걸 파악하기도 전에 무겁게 자신의 코를 강타하는 커다란 충격에 엘사가 눈을 질끈 감으며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고 반동을 완화시키려 애썼다. 곧 투박하고 육중한 통증이 유리가 깨져 사방으로 쩍 쩍 게걸스럽게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거미줄 같은 금을 내는 것처럼 코로부터 시작해 얼굴 전체로 퍼지더니 목까지 스멀스멀 내려와 엘사를 감싸쥐었다.

아파. 아, 제기랄. 정말 너무 아픈데. 하도 험한 꼴을 많이 겪은 탓에 고통에는 무던한 편인 엘사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모르겠어.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어. 아픈 게 정녕 자신의 박살난 코인지, 아니면 갈기갈기 찢긴 그리움인지, 겨우 찾은 소꿉친구가 자신이 잡아들여야 하는 범인이 되었다는 절망감에서 오는 슬픔 때문인지, 어쩌면 나는 그동안 헛된 노력을 한 게 아닌가, 어쩌면 우리는 다시 만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감에서 오는 허무함 탓인지, 대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아픔인지, 육체로부터인지 아니면 정신으로부터 내려온 고통인지 어느 것 하나 확신하지 못 한 채 엘사는 이마를 땅바닥에 박은 채 밀려오는 사무치는 고통과 뼈저리게 느껴지는 비애와 이유 모를 상실감에 작게 흐느꼈다.

둔탁한 신발굽이 뒷머리를 힘주어 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애써 목에 힘을 주어 바닥과 닿지 않기 위해 버티려 했지만 고통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나약해진 육체는 실없이 무너져버려 간신히 코가 지면과 닿지 않도록 이마를 기둥 삼아 지탱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발바닥에 힘을 주어 재차 누르자 무의미한 노력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듯 속절없이 땅으로 깔아뭉개졌다. 부서진 건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부상을 당한 것이 확실한 코가 꺼끌거리고 사포 같은 시멘트 땅에 닿아 서로 짓이겨지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이 도로 밀려왔다. 엘사의 뒷머리칼을 경주마의 말발굽마냥 정갈하게 잘 관리되어 있는 뒷굽으로 세네번 비비적거리며 내리깔던 린다가 곧 발을 치우곤 조용히 엘사를 노시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하려고 애써봤지만 이미 여러 차례 충격을 겪고 크나 큰 고통에 굳어버린 뇌는 더 이상 돌아가지 않아 생각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반사적으로 손으로 상처 부위를 감싸고 싶었으나 여전히 꿈쩍도 못 하게 등 뒤로 제압당해 있어 치부를 가리지도 못 하고 이미 벌겋게 부어 제 본래 형태를 잃어버린 코에서는 불그죽죽한 코피가 하염없이 쏟아져 먼지가 섞인 듯 진회색의 시멘트 바닥을 가뜩이나 더욱 벌그숙숙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도무지 코로 숨을 쉴 수가 없어 입을 크게 벌리고는 허억거리고 있자니 멎을 줄 모르는 혈액이 인중을 타고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다시 붉게 입염시키고 턱을 타고 목과 땀에 절어 피부에 달라붙은 머리카락까지 선명한 적색으로 오염시켰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얼굴에다 못을 갖다대고는 망치로 여러번 내리쳐 고정시킨 듯 한 고통이었다. 정신을 차리기 힘든 통증 속에서도 어떻게든 본능적으로 신음을 참으려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고 흐윽거리며 코로 호흡을 내뱉자 크고작은 핏방울이 여러 갈래로 후두둑 퍼져나가 바닥에 점점이 무늬를 새겼다. 그런 엘사를 차디 찬 표정으로 냉담하게 바라보던 린다는 다시 한 쪽 무릎을 꿇고는 머리채를 잡아 들어올려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반 쯤 감고는 꿈벅거리는 엘사와 강제로 시선을 맞췄다. 자꾸만 힘없이 내려가는 엘사의 눈동자에 린다의 짙은 보라색 넥타이가 비쳤다.

노기 어린 목소리로 성난 표정을 지으며 마치 천한 금수가 거칠게 으르렁 거리듯 린다가 말했다. “우리 뒤를 밟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위에서부터 팽 당했으니 이제는 포기했을 줄 알았어. 하지만 기어이 계속 우릴 방해하려드니 이대로 냅둘 순 없지.” 코피로도 과다출혈이 일어날 수 있던가. 드물게 종종 일어날 수도 있다고는 들었지만 내가 직접 겪을 줄은 몰랐네. 단기간에 많은 혈액이 빠져나가자 정신이 몽롱해진 엘사에게 린다의 발언은 꿈 속을 떠다니는 헛된 망상들처럼 느껴졌다. 뭐라고 했어, 린다? 미안. 잘 못 들었어. 사실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모르겠어. 잘 가늠이 안 돼.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가?
불현듯 모든 것들이 불확실한 거짓말처럼 느껴져 풀어진 눈으로 자신이 아닌 자기 너머를 쳐다보는 엘사를 보고 린다는 엘사를 붙잡고 있는 조직원에게 고갯짓을 해 무언의 지시를 내렸다. 바로 알아들은 그는 고개를 작게 주억거리곤 다른 조직원으로부터 연장을 건네받아 적당히 힘조절을 하여 무방비한 엘사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순간 눈 앞이 흐릿해지다 못 해 새카맣게 점점 안개가 끼며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이미 통증에 잡아먹혀 감각이 둔해진 육체는 새로운 고통이 찾아와도 크게 반응없이 무던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물 속에 빠진 듯 소리가 웅웅거리다가 점차 작아지고 세상은 온통 정전이 된 듯 검게 물들어갔다. 눈 앞이 암전되는 순간을 마지막 기억으로 남기고 엘사는 끝내 기절했다. 그런 엘사를 조금 흔들리는 눈빛으로 내려보던 린다가 연장을 휘두른 조직원에게 노색을 띤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만약 죽었으면 너도 목숨 부지하지 못 할 줄 알아.” 그 말에 흠칫거리며 땀을 두어 방울 흘리는 조직원을 구둣발로 차 꺼지라고 성내고는 하도 피를 내보내 창백해진 엘사의 볼을 손으로 감싸안으며 자신을 쳐다보는 다른 조직원들에게 린다가 명령했다.

“뭐해? 시동 걸고 당장 차에 태워.” 알겠습니다, 부두목. 그 어떠한 머뭇거림이나 불복도 없이 모두가 심기가 한참 거슬린 듯 사나워진 자신들의 윗사람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나 둘 짐승의 울음소리와 같은 엔진음 소리가 차례차례 켜지더니 이내 곧 점점 작아져갔고 얼마 걸리지 않아 현장에는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듯 정적과 고요함만이 감돌았다.

𓍝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삐—…’
갑작스레 전화를 끊고는 여태 문자도 확인하지 않고 연락을 해도 받지 않는 엘사의 동태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한 줄리아는 황급히 자기 부서의 남은 인력을 챙기고 현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무언가 일이 터진 것은 분명하지만, 자신 또한 비밀리에 엘사에게 정보를 건네주고 있었던 터라 공식으로 지원을 요청할 수 없는 건 매한가지였기에 급한대로 자기 휘하에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서둘러 거래 장소로 뛰어갔다. “더 빨리 운전할 순 없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선배님!” 교통안전팀에서 한 소리 하겠구만. 과속과 난폭운전이면 벌금이 어느정도려나. 그래도 우린 국제공조담당관 쪽이니 어련히 급해서 그랬나보다, 하고 어느정도 참작해주겠지.
초조함에 엄지 손톱을 물어뜯으며 다리를 달달 떨며 창 밖을 주시하던 줄리아는 곧 저 멀리 시야에 부둣가가 들어오자 창문을 열고 크게 엘사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소리쳤다. “엘사!!” 그러나 현장과 거리가 점점 가까워짐에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여전히 여러 채의 컨테이너 박스들과 오랜 세월 파도에 부딪혀 이끼와 해초에 침식된 방파제들 뿐이었다. “엘사?” 분명히 여기가 맞는데, 왜 없는 거지? 차에서 튀어나오다시피 급하게 내린 줄리아가 네발로 기어가듯이 다급하게 부둣가 끄트머리로 달려갔다.

다른 사람들에게 컨테이너 박스 주변을 살펴보라 명라고는 바람소리와 파도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가운데 유심히 주변을 두리번 거리던 줄리아의 눈에 문득 유난히 검붉은 시멘트 바닥 부분이 들어왔다. 이건… 뭐지? 설마. 수많은 사건 사고를 봐왔기에 이제는 어지간한 현장에는 쉽게 동요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정말로 자신의 가까운 이를 잃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심에 줄리아의 호흡이 점점 불규칙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정처없이 떨리는 손가락을 뻗어 바닥을 슥 긁어내리듯 훑자 손에 묻은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나 변색되고 굳기는 했지만 틀림없는 혈흔이었다.

피.
대체 누구의?

안색이 점점 새파랗게 질려 푸르딩딩하게 변하며 곧 머릿속에는 온갖 가정들이 가득 차며 공간을 메우기 시작했다. 납치, 협박, 범죄 조직, 폭력, 현장에 남은 혈흔, 그리고. 곧 줄리아에 눈에 들어온 건 산산히 조각나 부서진 핸드폰이었다. 저건. 아니야. 아냐아냐아냐. 그럴리가 없어. 힘이 풀린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엉금엉금 기어가 파편들을 쓸어담아 확인해보니 엘사가 사용했던 파란색의 문어가 그려진 케이스 조각이 언뜻 보였다. 아무리 작게 조각나 눈치채기 힘들다 한들 알아볼 수 있었다. 이런 이상한 케이스를 쓰는 건 엘사 뿐이었으니까.

엘사.
그래, 오직 엘사가 유일했다.

“엘사…”

줄리아에게 연락을 받고 늦게나마 뒤따라온 센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망연자실하게 현장을 바라보는 줄리아의 뒷모습을 발견하고는 단숨에 달려와 어깨에 손을 올리곤 물었다. “괜찮냐?” 패닉으로 초점을 잃은 눈으로 센을 올려다보며 줄리아가 어깨를 잘게 떨며 말했다. “센, 엘사… 엘사가 사라졌어요. 누군가에게 납치당한 거 같아요. 바닥에 남은 혈흔을 보면, 분명히 싸움이 있었을 거고, 그럼 엘사는, 엘사는… …”
보통 고문이나 폭력을 가할 때 굳이 흔적이 드러나기 쉬운 얼굴에는 잘 하지 않는다. 배나 허리 쪽에 해야 감추기도 쉽고 피해자를 더 위축시켜 뜻대로 부리기 손쉽기 때문이다. 구태여 얼굴에 가하는 이유는 보통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거나, 혹은 애초에 살려보낼 생각이 없을 때, 정보를 캐묻는 용도로만 사용하고 처리하려 할 때 주로 얼굴에 상해를 가한다. 만약 엘사가 그런 상황이라면? 거기까지 절로 생각이 미치자 더 이상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누군가 돌로 된 문으로 목구멍을 막아놓고는 쐐기를 박아 그 아래 무엇이 있든 절대 내보낼 수 없도록 단단히 조치해 둔 것만 같았다.

그런 줄리아의 생각을 눈치채고는 무릎을 수그려 양 어깨를 붙잡고 시선을 맞추며 센이 말했다. “진정해라, 줄리아. 지금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데 이 핏자국이 엘사 그 녀석의 것이란 확신도 없고, 설사 맞다 한들 걔가 그렇게 쉽게 죽을 놈이냐? 너무 크게 걱정하지마. 나도 백방으로 수소문해 찾아볼 테니까, 네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 실종에는 골든 타임이 있어. 너도 알지? 지금으로부터 48시간이야. 우린 우선 그 시간 안에 어떻게든 엘사를 찾아내야 해. 그러니까 정신 차려라, 줄리아.”

센의 차분한 목소리에 점차 정신을 차린 줄리아가 다시 또렷한 눈빛으로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애써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의 소중한 친구가 알 수도 없는 사건에 집착하며 목 매다가 끝내 죽음을 맞이하게 둘 수는 절대로 없었다. 내가 아는 놈들한테도 어떻게든 찾아보라고 연락을 해볼 테니까, 넌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센이 부서진 엘사의 휴대폰을 잠시간 쳐다보더니 줄리아의 등을 두어 번 다독이며 조언했다. 이내 마음을 다잡은 듯 자기 부서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인 줄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꾹꾹 눌러담으며 말했다.
“현재 상황을 보고하겠습니다. 바닥에 널린 핏자국과 곳곳에 흩어진 증거인멸 흔적으로 보이는 부서진 핸드폰 파편들을 토대로 강력반 소속 형사 엘사 브라이언트가 아몬 조직이라 불리는 폭력범죄 조직에 납치당한 걸로 유추하고 있으며, 부둣가에서 발생한 사건인 만큼 국내에서 그치는 게 아닌 국외로까지 도주했을 가능성 또한 함구할 수 없어 이 시간부로 납치 및 실종 사건으로 전환하고 전 부서에 현 상황을 통지 후 국제형사경찰기구에서도 본격적인 수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몇 사람들에게 우선 현장이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폴리스 라인을 세워 출입통제하고 핏자국은 촬영하여 사진으로 남겨놓고 휴대폰 조각들은 전부 긁어모아 증거품으로 보관해놓으라 명한 뒤 짠 바닷바람이 머리칼을 간지럽히는 걸 느끼며 줄리아는 다시 본부로 돌아가기 위해 차 문을 열고 승차했다. 출발하기 전 마지막으로 부둣가를 돌아보고는 여전히 변함없이 철썩이며 제자리를 지키는 파도를 바라보며 줄리아는 속으로 되물었다.
대체 무슨 사건에 휘말린 거야, 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