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린다엘사) 근면, 성실, 정의 3

책과 집 2024. 4. 9. 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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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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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 하늘이 정말 이쁘지. 응. 너와 같이 올려다봐서 더 그런 거 같아. “무슨 소리야, 바보야!” 린다가 꺄르르 웃으며 몸을 일으켜 팔을 뻗고는 엘사의 가슴을 가볍게 때렸다. 난데없는 폭력에 당황한 엘사가 왜 웃으면서 때리는 거냐 묻자 린다는 글쎄, 알아맞춰봐. 하고 장난끼 어린 목소리로 말하고는 벌렁 풀밭에 도로 누워 하늘을 다시 올려다봤다. 너와 평생 이 여름을 같이 보내고 싶어.

나도. 주먹에 맞아 조금 쓰라린 가슴을 손으로 슬슬 문지르며 엘사도 린다의 곁을 따라 벌러덩 풀밭에 누워 파랗다 못 해 바다처럼 푸르게 색을 내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꼭 네 눈색 같아 이쁘다.” “말은 잘하네.” 너는 왜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렇게 퉁명스럽게 반응하는 거야? 알게 뭐야, 바보야. 어릴 적 기억이다. 같이 풀밭에 누워 정처없이 바람을 따라 흘러가던 구름을 바라보았지. 바다를 거꾸로 뒤집은 듯 새파란 하늘을 쳐다보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더라. 시시콜콜하고 잡다한 이야기들, 가볍지만 때로는 진지함이 한 끗 섞여있던 고백들, 나는 이 때를 기억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평온하고 잔잔하던 순간을.

다시는 이 때로 돌아갈 수 없는 걸까? 린다, 너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어? 무슨 감정을 품고 있는 거야?
린다, 가끔은 과거의 네가 꿈에 나와 내게 말을 걸어. 그렇지만 꼭 깨고 나면 전부 다 잊어버려. 내가 머리가 좋지 않아서 그런 걸까.
린다, 만약 너도 내 꿈을 꿨다면 너는 꿈 속의 나와 네가 나눴던 말들을 깨고 나서도 전부 기억하고 있을까?
린다, 너와 같이 올려다보던 하늘이 아직도 종종 그리워서 불현듯 머릿속에 생각나.
린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어?
린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린다, 너와 나는 대체 어디에…


𓍝

헉. 마치 물 속 깊이 잠수하느라 오랜 시간 참았던 호흡을 수면 위로 올라와 한 번에 몰아쉬며 내뱉듯 크게 숨을 내뱉은 엘사가 흠칫거리며 감았던 눈을 떴다. 잠들었었나? 정신이 들자마자 뒤통수에서 찌릿거리며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는 걸 보아하니 순순히 잠들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꽤나 험하게 다뤘나보네. 곧 코에서도 강한 통증이 밀려와 저절로 눈가를 찌푸린 엘사는 아까 자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단편적으로 기억이 떠오르자 으, 하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코를 감싸고 있는 걸 보니 누군가가 더 이상 출혈이 일지 못하도록 지혈하고 거즈로 감싸기까지 하며 치료를 해준 모양이었다. 대체 누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안개가 낀 듯 흐릿한 정신을 애써 맑게 만들기 위해 눈을 두어 번 깜박거리곤 고개를 푸드득 양 옆으로 가볍게 털어낸 뒤 엘사는 통증에 마비된 듯 무거운 머리를 힘겹게 좌우로 돌리며 주변을 살펴봤다.
외부에서 빛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듯 구멍 하나 없이 막힌 어두컴컴한 공간을 조금이나마 환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천장에 엉성하게 줄로 매달려 조잡하게나마 전등을 흉내낸 듯 오래되어 잔뜩 긁히고 깨져 사용의 흔적이 있는 손전등이 유일했다. 비루한 간이 조명 아래에는 커다란 낡은 철제 책상이 놓여있었다. 꼭 취조실처럼 꾸며놓은 공간에 엘사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항상 취조하는 건 나였는데 당하는 건 처음이네.

점차 정신이 들수록 사방에서 밀려오는 고통의 근원을 찾으려고 반사적으로 손을 얼굴을 향해 뻗으려는 순간 무언가가 덜컥거리며 방해했다. 아직 완전히 제정신이 들지 않아 막 꿈에서 깬 듯 비몽사몽한 상태의 엘사는 방금 무엇이 자신의 행동을 방해했는지 단숨에 알아차리지 못 하고 재차 같은 행위를 여러번 반복해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나 의자에 결박당해 있잖아. 손목이 단단히 묶여있어 어깨와 팔을 꿈틀거리며 빠져나가려 애써봐도 그닥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무리 힘을 주어 풀어내려해도 케이블 타이를 무작정 끊어낼 수 있기란 만무했다. 이럴 땐 어떻게 했더라. 예전에 센이 알려줬었는데. 엘사가 처음 강력반에 배치되던 날 전직 군인인 센은 이미 너도 호신술이나 관절기는 경찰대에서 대부분 익혔겠지만 이런 건 배우지 못했을 것이라며, 언젠가 유용하게 쓸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특수부대 복무 시절 써먹었던 기술들을 자신에게 웃으며 가르쳐줬었다. 그때는 별 생각없이 그러려니 하고 옆에서 배웠지만 지금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 당시 거부하지 않고 기술을 받아들였던 것이 천운이 아닐 수 없었다.

‘결박 당한 상태에서 물에 빠졌을 때 수영법을 처음 배웠을 때는 정말 고통스러웠지…’

당시에는 다 널 위한 길이라며 군인마냥 자길 훈련시키는 센에게 형사가 이렇게 싸울 일이 뭐가 있겠냐고, 경찰대에서 질리도록 운동을 배웠는데 지금 여기서 또 이래야 하는 거냐고 악을 쓰며 성도 내보고 도망도 쳐봤지만 어찌되었건 지금은 센에게 감사해야했다. 여기서 탈출하면 뭐라도 사서 인사드리러 가야지. 한참을 꿈지럭 거리며 결박을 푸는데 집중하던 엘사의 귀에 익숙하지만 반가워 할 수 없는, 들리면 안 되어야 할 게 분명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금물에 부식되고 오래되어 녹슨 철판이 양옆으로 흔들릴 때 나는 소음과 같은 끼익거림, 거대하고 거친 물들이 서로 부딪히며 싸울 때 나는 환호성과 같은 철썩거림, 이따금씩 희미하지만 들려오는 먼 바다 위 하늘을 누비는 신천옹과 갈매기의 울음소리, 차르르르 육중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그르렁대는 쇠사슬 소리. …설마. 아니겠지. 한참 정신이 없어 인지를 못 했지만 차분히 눈을 감고 움직임을 느껴보니 그제서야 바닥이 일정하게 정지해 있지 않고 미세하게 좌우로 끼익끼익 쇠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 세상에. 엘사는 한탄에 가득 찬 신음을 내뱉었다.

여긴 바다 한가운데다.
그리고 자신은 컨테이너들을 실어 나르는 불법 밀항선 위에 고립되어 있었다.

𓍝

점점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에 당혹감을 느끼며 신세를 탓하기에는 엘사에겐 그리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아직 놈들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납치 당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지금쯤 줄리아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을까? 저들은 지금 밖에 있나? 내가 깨어난 것을 아직 모르고 있나? 근데 대체 왜 치료를 해준 거지? 나를 죽일 생각이 아니었나? 내게서 무언가 쓸모를 찾았나?
수많은 생각이 사정없이 엘사의 머리를 두드리며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어 이성을 감추고 마음을 다급하게 먹도록 채찍질했다. 전방을 제외하곤 그 외에 것들에 시선을 둘 수 없도록 가리개를 씌워 무작정 끊임없이 앞으로 돌진하며 달려가는 경주마처럼, 엘사의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구속을 풀어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서둘러 손의 결박이라도 풀어야 반항을 하든 도망을 치든 일이 한결 수월해질 터였다. 잠깐, 바다 한가운데가 맞다면, 이미 출항한 지 시간이 꽤 지나 만경창파 한복판에 표류된 것이 확실하다면, 어디로 가야하지? 만약 도망친다 한들 변변찮은 소형 보트나 구명조끼, 하다 못 해 몸을 기대고 숨을 돌릴 튜브 하나 없이 사방이 바다인 곳에서 수영하여 뭍으로 도달할 수가 있나? 제아무리 체력에 자신이 있는 엘사라 한들 자신은 철인 3종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가 아니었고, 이런 일 또한 겪어본 적 있을리 만무시리 했다. 자꾸만 머리를 찌르고 들어오는 최악의 상황들에 욕짓거리를 작게 내뱉으며 손목을 움직이던 찰나, 드디어 자신을 옭아매던 케이블 타이가 벗겨지고 자유를 되찾았다.

그리고 그 순간 굳게 닫힌 컨테이너 문이 열리고 태양의 밝은 빛이 그림자를 안쪽 구석까지 깊게 몰아세우며 어두컴컴한 공간으로 환하게 밀고 들어왔다. 난데없는 크고 광활한 빛에 눈을 질끈 감은 엘사가 천천히 가늘게 뜨며 명순응 되기를 기다렸다. 시야가 온통 하얀 탓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귀를 통해 들려오는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로 인해 저편으로 누군가 들어왔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상대가 누구이던간 구속을 풀었다는 걸 들키면 좋을 게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목을 도로 의자 뒤로 물려 감춘 엘사는 최대한 찡그리며 빛이 눈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방어한 뒤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려 애썼다. 누군가가 자신의 코 앞까지 다가와 유일한 장애물인 철제 책상을 사이에 두고 섰다는 걸 알았지만 역광으로 있는 통에 상대의 모습은 온통 짙게 그림자가 끼어 검은색으로 보여 도저히 누군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긴장과 경계심이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며 온 몸의 솜털을 바짝 서게 만들고 오직 두 사람 분의 숨소리만이 귀를 가득 채우며 신경을 예민하게 자극했다. “머리는 좀 어때?” 익숙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눈을 크게 뜬 엘사가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빛에 고개를 떨구곤 갑작스런 눈부심에 쓰라린 눈을 여러번 깜박거리며 중얼거렸다.

“린다? 린다, 너야?” 뒤늦게 빛에 적응된 눈에 점차 그림자가 옅어져가며 사람의 형상이 눈에 새겨들어왔다. 제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여전히 낯선 검은 정장을 입고 짙은 보라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지만 노을에 물들여진 황금빛 갈대밭 같은 머리색과 광활한 생명을 품고 세찬 물결을 일으키며 파도를 보내는 바다마냥 퍼런 대해를 품은 눈은 자신이 어릴 적 알고 지내던 소꿉친구의 모습과 여전히 똑같았다. 비록 그러한 친우가 지금은 악우가 되어 자신의 코를 부수고 머리를 바닥에 짓이기고 납치까지 해버렸지만. 천과 거즈를 덧대 지혈을 했지만 아직도 조금 부어오른 코를 제외하고는 상태가 멀쩡해보이는 엘사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샅샅이 살펴본 린다는 철제 책상 앞에 놓인 의자를 손으로 잡아 드르륵 뒤로 밀어낸 뒤 그 위에 앉았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엘사를 쳐다보던 린다가 눈을 잠깐 내리깔아 책상을 어루만지곤 다시 시선을 엘사에게로 돌리곤 말했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 바로 바다 한가운데야.” 역시나. 엘사가 예상했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람 한 명 없어진다고 해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 해. 이제 네 처지가 좀 실감나지 않아?” 엘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리 빛에 눈이 적응되어 시야가 밝아졌다한들 여전히 바깥을 등지고 앉아있는 린다에게 드리운 역광 때문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디까지 알아냈어? 경찰 내부에도 우리 애들이 좀 있어서 최대한 방해했는데 대단하네.” 경찰이면서 폭력 조직이랑 공모한 놈들이 있었다고?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사건에서 내쫓으려 하더라니, 한 패여서 그랬구나. 빌어먹을, 줄리아한테 어서 이걸 알려야 하는데. “하지만 너무 까불었어.” 린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빛을 향해 걸어가 문을 닫고는 다시 돌아와 의자에 도로 앉지 않고 미약한 콧소리를 내며 섰다. 순식간에 밝았던 공간이 유약한 손전등 빛으로 연명하던 원래의 어둑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린다가 엘사를 내리깔보며 서늘한 목소리로 죄 지은 자에게 어떤 판결을 내릴지 고뇌하는 법관마냥 중얼거렸다. “이제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만손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해도 바로 코 앞에서 꺼낸 말들을 엘사가 못 들었을 리는 만무했다. 허나 여전히 대답 않고 무언갈 생각하듯 눈을 사방으로 한 두번 휘적이며 골똘히 골몰하던 엘사가 꺼낸 말은 또 한 번 린다의 심기를 건드렸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왜 넌 이렇게 불행해보이냐.” 그 순간 눈 앞에 무언가 번쩍이며 뇌굉이 내리치듯 우레 같은 통증이 일었다.
방금은 또 대체 무슨 일인가 파악할 새도 없이 또 한 번의 천둥이 눈 앞을 스치고 사라졌지만, 통증은 그대로 남아 머리를 강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엘사의 뒷머리채를 부여잡고 철제로 만들어진 책상에 머리를 그대로 내리찍은 린다는 화가 풀리지 않는 듯 몇 번이고 연거푸 철로 이루어진 책상에다 사정없이 엘사의 머리를 박아댔다. 빠르게 아래로 거듭 추락하여 단단한 무쇠 덩어리에 짓이겨진 연약한 피부는 점점 시퍼렇게 멍이 들며 제 본래 색을 잃어가기 시작했고 가죽 아래 보호받는 얇은 머리뼈는 쉴 새 없이 느껴지는 충격에 둥둥 울리며 뇌가 어떻게든 생각을 하며 상황을 파악하려 하는 것을 방해했다. 귀에서는 이명이 메아리치듯 울렸고 목에서는 잔뜩 기력이 쇠한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다물지 못 한 입 사이로 침과 함께 흘러나왔다.

충격으로 찢겨진 이마에선 시뻘건 피가 주르륵 흘러내려 눈썹과 한 쪽 눈을 적시고는 볼을 타고 입술을 스치곤 턱을 맴돌며 끝에 방울방울 달려있다 끝내 중력을 못 이기고 책상 위로 뚝뚝 떨어져 작은 웅덩이를 이루었다. 비릿하고 역겨운 맛이 혀를 슬슬 건드리며 입 안으로 느릿하게 퍼졌다. 끈적하고 미적지근한 액체가 눈으로 새어들어가 따가움과 근지러움을 유발해 절로 눈가가 찌푸려졌다. 찢어진 이마 아래 위치한 눈의 시야는 점점 검붉게 물들어갔으나 다른 한 쪽 눈은 여전히 밝은 시계를 유지하며 엘사에게 한 층 더 혼란스러움과 어지러움을 유도했다. “말 조심해.” 노기 어린 목소리로 씩씩거리며 온색을 띤 얼굴로 엘사를 노려보던 린다가 으르렁거리며 겁박했다. 이마를 책상에 찧으며 같이 부딪힌 코에서 또 다시 스멀스멀 아픔이 밀려오기 시작하자 엘사는 입을 닫고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짐승이 혀를 쭉 빼고 헥헥거리며 거친 숨소리를 내는 것 마냥 화를 삭히려 애쓰는 듯 한숨을 거세게 내쉬며 컨테이너 박스 안을 서성거리면서 흥분에 찬 숨을 얼마간 다스리던 린다가 조금 진정된 듯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을렀다.

“지금 네 처지가 이해가 안 되나본데, 너는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있는 거야. 사람이 물에 빠져서 익사하는데 얼마나 걸리는 지 알아?” 린다가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리고는 잠시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자 방심한 틈을 타 진작에 결박에서 벗어난 엘사가 그대로 철제책상을 훌쩍 뛰어넘고는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자기에게로 다시 급하게 고개를 돌리려는 린다에게 황소처럼 우악스럽게 돌진했다. 왼팔을 굽혀 팔꿈치를 귀 가까이 붙이고 오른손은 자신의 머리를 감싸 충격을 완화하는 자세를 취한 뒤 바로 있는 힘껏 달려 린다에게 몸을 날리자 본능적으로 충격을 견디기 위해 상체를 수그리고 다리에 힘을 줬으나 급작스런 공격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린다는 그대로 퉁, 하고 부딪혀 뒤로 밀려나 넘어지고는 먼지 투성이의 지저분한 바닥을 몇 번 굴렀다. 하, 린다가 조소와 짜증이 섞인 허탈한 숨을 내뱉으며 상금 충격이 남아있는 몸을 애써 추스리며 곧장 바닥에서 일어났다. “나랑 거칠게 놀고 싶으시다?”
거리가 짧아서 힘이 그닥 안 들어갔나. 이미 머리에 몇 번이고 충격이 갔던 터라 더 이상의 격돌은 위험하다 판단한 엘사가 슬금슬금 옆걸음질을 하며 곁눈질로 출구를 흘깃 쳐다봤다. 안에서 소란이 일자 외부에서도 들은 듯 웅성거리는 말소리들이 얼핏 들려왔다. 이런 좁아터진 한정적인 공간에서 다수와 싸우는 건 힘든데. 출입구도 하나 뿐이고. 결국 이 방법 밖에 없나. 난데없는 반격에 눈썹을 실룩이며 샐쭉 배린 웃음을 지은 린다가 엘사에게 달려들자 가볍게 몸을 틀어 회피한 엘사는 반 걸음 움직여 단숨에 뒤로 이동하곤 팔을 뻗어 왼팔로 목을 감싸고 오른팔은 린다의 어깨 위에 올린 뒤 바로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 이두를 붙잡고는 목을 조르며 제압했다.

올무처럼 단단히 옭아맨 팔에 오만상을 쓰고 이를 아득바득 갈며 린다가 소리쳤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엘사? 날 이대로 기절시키려고?” 고개를 살짝 틀어 출입문을 바라본 엘사가 잠깐 무언가를 고민하다가 말했다. “글쎄, 필요하면.” 그대로 자신을 질질 끌어 문쪽으로 향하는 엘사에 힘을 주어 최대한 버티려 했지만 제아무리 며칠 납치 당해 힘이 빠졌다한들 오랜 형사 생활로 다져진 체력과 근력을 쉽사리 떨쳐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한 자리에 가만 버티고 있으려니 점점 졸려오는 목에 더 이상의 반항은 미련한 짓이라 판단한 린다는 탐탁지 않은 듯 작은 욕짓거리를 내뱉으며 엘사가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따라 옮겼다. 부술듯이 발로 세차게 쾅 차서 문을 열은 엘사는 사정없이 자신에게 내리쬐는 태양빛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대뜸 큰 소리로 외쳤다. “다가오지마! 조금이라도 접근하면 목을 꺾어버릴 테니까!” 흐리멍텅한 낡은 손전등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환한 한낮의 빛에 최대한 시야가 흐려지지 않도록 눈가를 찌푸리며 엘사는 린다를 데리고 난간 쪽으로 이동했다.

갑작스레 문이 열리더니 자신들의 윗사람을 제압한 상태로 배 끄트머리 쪽으로 끌고 가는 형사를 보고는 소란을 듣고 컨테이너 박스에 대기하고 있던 조직원들이 당황하여 자기네들끼리 웅성거렸다. 누군가가 무어라 욕을 하며 가까이 접근하자 엘사가 팔에 힘을 주어 린다의 목을 순간 강하게 압박했다. “비켜!” 목이 졸려 울대를 자극한 탓에 린다가 반사적으로 흣, 하고 앓는 소리를 내뱉자 엘사를 공격하려던 조직원이 주춤거리며 망설였다.
아무리 인질이 잡혔다한들 계속 저대로 둘 수는 없었기에 조직원들이 자기를 둘러싸고 천천히 점차 거리를 좁혀오자 엘사가 오른손바닥을 린다의 뒷머리에 위치시켜 좀 더 단단히 목을 조이고는 린다에게 중얼거렸다. “네 부하들, 당장 전부 해산하라 해. 정말로 목 졸려 죽고 싶은 거 아니면.” 오래되어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을 자주 맞아 삭은 난간에 엘사가 몸무게를 조금 실어 허리를 기댔다. 끼익하고 덜 고정된 나사가 조금씩 밀리면서 풀리는 소리가 났다. 자신의 불안정한 상태와 감정을 숨기려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자기에게 속삭이는 엘사에 린다가 무언가 눈치챈 듯 여유 섞인 목소리로 따라 속삭이며 말했다. “정말 할 수 있겠어, 엘사? 네가 날 죽이겠다고? 사람 한 명 제대로 죽여본 적도 없는 네가?” 이미 자신의 속마음을 간파한 듯 눈을 방긋 휘며 조롱섞인 투로 말꼬리를 잡는 린다에 엘사가 떨리는 호흡을 코로 미세하게 내쉬었다.
별 다른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좀 더 건드려볼까 생각하던 찰나, 엘사가 몸에 힘을 주어 난간을 조금 더 밀어냈다. 불법으로 밀거래를 할 때 쓰이는 배인 만큼 안전장치를 소홀하게 관리한 선박의 난간은 금방이라도 더 힘을 준다면 허무하게 뿌리 뽑혀 바닥으로 추락할 것만 같아 보였다. 순간 진심으로 경황하던 린다가 여전히 웃음은 유지한 채로 눈썹만 찌푸리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뭐하는 짓이야, 같이 죽을 셈이야?”

아까의 실색은 어디가고 진정을 찾은 듯 놀랍도록 차분해진 엘사가 덤덤한 목소리로 아래를 슬쩍 내려보곤 답했다. “못할 건 없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몸에 힘을 주며 난간을 가일층 밀어내자 린다의 얼굴에 사색이 돋아났다. 엘사는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 아무리 악을 쓰고 협박을 하고 윽박을 질러도 죽이진 못 할 것이다. 그러나 같이 죽을 수는 있다. 엘사라면 그럴 것이다. 자신을 목졸라 죽이지는 못 해도, 같이 바다로 뛰어드는 선택은 기꺼이 따를 놈이었다. 몸 안의 피가 저 밑의 바다처럼 차게 식어가는 걸 느끼던 린다는 이를 악물고는 조용히 가슴만 오르락내리락하며 호흡하다 몇 미터 내외로 거리를 두고 자신과 엘사를 둘러싼 채 눈치만 보던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다들 뒤로 물러나.” 그 말에 저들끼리 쳐다보며 시선을 공유하던 조직원들은 윗사람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아니꼬운 시선으로 엘사를 노려보곤 살살 걸음을 뒤로 옮기며 엘사로부터 멀어졌다.
여전히 자신을 붙들어맨 팔에 힘을 풀지 않고 버티는 엘사에게 린다가 평정심을 되찾으려 노력하며 제안했다. “있잖아, 엘사. 우리 손을 잡자. 아무리 좌천되었다 한들 넌 이미 어느정도 경력이 있으니 우리 조직이 저지른 일의 증거인멸이나 사건파일을 말소 시키는 것 정도는 쉬울 거야.” “나보고 부패 경찰이 되라고?” 엘사가 짐짓 인상을 쓰며 린다를 노려봤다. “옛날처럼 다시 잘 지낼 수 있어. 그간의 서먹했던 거리와 묵혀뒀던 감정은 전부 차치하고서, 다시 어렸을 때로 돌아가는 거야. 우리 그때 정말 행복했잖아. 기억 안 나?” 응? 엘사. 함께 풀밭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거워했잖아. 그 때가 그립지 않아? 다시 돌아갈 수 있어. 간사한 혀를 놀리며 끈적한 죄와 타락을 뒤집어쓰라 조언하는 린다의 말에 엘사가 거부감을 드러냈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자꾸만 수긍하며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자신의 죄책감의 근원지인 린다가 거푸 자기의 감정을 건드리며 옛 기억을 끄집어내자 아랫 입술을 짓씹은 엘사는 자신도 모르는 새 조금씩 린다의 의견에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어쩌면 나쁘지 않은 생각일지도 몰라. 형사로서의 자신과 엘사 본연의 자신, 어릴 적 소꿉친구와 웃고 떠들며 감정을 공유하던 치기 어리고 무모한 시절의 자신이 한데 섞여 엘사의 생각과 정신을 흐트려놓았다. 우리는 국민에게 봉사한다. 우리는 국민의 안전과 보호를 최우선으로 삼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의무를 저버리지 않는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나는. 형사인 나는. 범죄자인 린다는. 우리… 나…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나는, 나는… 범죄자, 범법자, 가해자, 폭력 조직, 소꿉친구, 죄책감… 일가족 살인 사건의 피해자, 내 어릴 적 기억을 대부분 함께한 사람, 나와 같이 경찰을 꿈꾸었던… 린다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엘사가 눈에 띄게 흐트러지며 점차 팔에 힘이 풀리는 걸 눈치챈 린다는 참을 수 없이 밀려오는 같잖음과 우스움에 웃음을 참지 못 하고 큭큭거리며 중얼거렸다. “것 봐, 엘사. 넌 정말 어릴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니까.”
이렇게 조금만 자극하면 곧바로 반응하잖아. 넋이 반 쯤 나간 엘사가 린다가 무어라 말했는지 순간 이해하지 못 해 다시 되물으려는 순간 린다가 머리를 세게 뒤로 젖혀 엘사의 안면을 뒤통수로 강타했다. 예상하지 못 한 충돌에 머리가 찡 하고 울리며 타는 듯 한 고통이 차오르자 엘사가 반사적으로 양 눈을 질끈 감고 컥, 하고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팔꿈치로 강하게 옆구리와 명치를 가격하고는 고통에 휘청이는 엘사의 발목을 빠르게 발로 차 넘어뜨리자 잔뜩 상처를 입고 구석에 몰려 최후의 발악을 일삼던 사슴을 애워싸고 마지막 기회를 노리던 굶주린 늑대들 마냥 호시탐탐 엘사를 처리할 때만을 기다리던 조직원들이 일제히 덤벼들었다. 몇 몇이 분노를 참지 못 하고 죽이려는 듯 연장을 집어들자 손짓하여 무른 린다가 엘사에게 다가가더니 여전히 괴로움에 빠져 힘없이 허우적거리며 앓는 군소리를 내는 엘사의 등을 꾸욱 밟으며 말했다.

“뭐, 고민할 시간은 줘야겠지. 잘 생각해봐.” 엘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감히 날 공격한 값은 치뤄야겠지.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날 망신 시키다니, 내 체면은 어떡할 셈이야?” 끄응거리며 무거운 머리를 간신히 비틀어 엘사가 위를 올려다봤다. 작열하는 태양빛에 하늘을 올려다보기가 힘에 부쳤다. 태양 아래 서 있는 린다의 얼굴에 그림자가 덧씌워져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리 아프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팔을 뻗어 약품향이 나는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더니 그대로 꾸욱 눌렀다. 최대한 숨을 참아보려 애썼지만 한계의 순간은 얼마 안가 찾아왔고 결국 승복하여 코로 호흡을 들이마시자 병원에서나 맡아봤던 지독한 약품 냄새가 강하게 코를 찌르며 폐 안으로 구석구석 기어들어왔다. 점점 머리가 몽롱해지며 눈 앞이 흐리터분 해졌다.
아, 오늘 대체 몇 번이나 얻어맞는 거지. 그것도 코와 머리만. 잠깐, 오늘이 아니고 어제던가? 그것도 아니면 엊그제? 며칠이나 지난 거지? 금방 가수면 상태에 접어들어 이미 제정신을 유지하길 포기한 뇌는 온갖 떠오르는 사념들과 밀려오는 기억들을 정리하지 못 하고 닥치는 대로 휘저으며 머릿속을 채웠다. 여전히 무엇이 꿈인지 환상인지 실존하는 현실인지 구별하지 못 한 채 잠에 빠져들려는 찰나, 엘사의 귀에 린다의 웃음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이건 내 어릴 적 기억에서 비롯된 환청일까, 아니면 정말로 린다가 웃고 있는 걸까. 모르겠어, 일단 지금은 잠부터 잘래… 곧 몸의 모든 기운이 차례차례 빠져나가며 근육이 축 늘어지고 이완되는 것이 느껴졌다. 주변에서 들려오던 온갖 시끄러운 소리들이 점점 멀어져갔다. 시야가 완전히 어두워지며 장막에 싸이더니 곧 암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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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파도가 철썩거리면서 서로 부딪히며 물결을 일으키는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바다. 아직도 바다 근처인가. 짜디 짠 바닷냄새에 자극된 코가 근지러워 여러번 작게 킁킁거리며 콧등을 찌푸리려 하지만, 마치 근육이 굳어버린 듯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다. 잘 들어보니 파도 소리 말고도 다른 소음들이 존재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당황한 듯한 언사로 저들끼리 무어라 떠드는 소리 또한 같이 섞여있다. 뭐라하는 건지 궁금해 잠시 귀를 기울였으나,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투성이다.
아무리 애써봐도 종잡을 수 없이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낯선 단어들의 조합에 이상함을 느끼며 추를 매단 듯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올려 슬그머니 눈을 뜬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바닥에 누워있는 자신을 둘러싸고 내려다보고 있다. 눈을 뜬 것을 확인하고는 누군가는 잡고 일어나라는 듯 손을 뻗고, 누군가는 한 쪽 어깨를 조심스레 부여잡고 뭐라 말하고, 또 누군가는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며 흘깃흘깃 자신을 쳐다본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아 여전히 의미심장한 눈으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천천히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은 어떤 상태인지 파악하려 노력해본다. 낯선 언어.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낯선 집들과 문장들. 아. 주변에 보이는 여러 요소들을 조합해 여긴 자신의 조국이 아닌 머나 먼 타지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는다.
정확히 알아들을 순 없지만 대강 말투나 목소리의 높낮이로 자신을 걱정하는 말들을 하고 있음을 눈치챈다. 나를 왜 걱정하지? 잠깐, 나는 왜 여기 있지? 고개를 숙여 몸 이곳저곳을 살펴보니 온통 피부에는 생채기가 나고 옷에는 흙먼지와 이미 시간이 지나 검게 변색된 핏자국과 찢어진 흔적들이 널려있다. 코와 이마에서 익숙한 통증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듯 밀려오자 작게 입을 벌리고 고통스런 소리를 짧게 내뱉는다. 타인의 괴로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 하는 다정한 어느 현지인이 낯선 이방인에게 손거울을 가져와 얼굴을 비추어준다. 그곳에는 잔뜩 멍이 들어 진한 녹색과 파란색이 어지럽게 섞여 얼룩진 피부와 갈색 터럭과 피딱지가 엉켜붙어 지저분해진 이마와 피에 물들여져 조금 갈색으로 변색된 한 때는 흰색이었던 코를 덮고 있는 거즈가 보인다.
비천하고 한심한 모습에 엘사는 절로 하, 하고 허탈한 웃음 소리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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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언어를 알 리 없는 엘사는 손짓발짓을 하며 최대한 자신의 입장을 현지인들에게 알리려 공들였다. 전화기를 좀 쓸 수 있을까요. 아니면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경찰서가 어디일까요. 자신의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너무나 처참한 몰골에 당연히 응당 해야할 일이라 생각하며 배려해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건 엘사는 전화기를 빌려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생소한 이역만리에서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거림을 들으며 엘사는 줄리아의 전화번호를 머릿속으로 곱씹으며 기억해내려 최선을 다했다. 힘없는 손가락에 애써 기력을 불어넣어 숫자 하나하나를 간절한 마음을 담아 누르곤 연결 버튼을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달칵 눌렀다. 제발, 연결되라. 몇 분이 지나도록 계속되는 전화 연결음을 들으며 억겁의 시간을 보내던 엘사는 마침내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익숙하고도 그리웠던 상대의 누구냐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화색하며 대답했다.

“줄리아, 나야. 어디 부둣가에 버려졌는데 정확히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어. 아마 외국인 거 같은데, 주변에 큰 건물이나 제대로 된 경찰서 하나 없는 걸 보면 시골 바닷가 변두리에 위치한 작은 마을 같아.” 나 좀 데리러 와줄래. 며칠이나 말도 없이 실종되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타인에 대한 생각이나 이해도 없이 뜬금없는 말을 줄줄 뱉어내는 엘사에 잠시 멍하니 벙쪄있던 줄리아가 안도와 분노가 섞인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말했다. “너 우리가 얼마나 찾아다닌 줄 알아? 센도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어떻게든 네 행방을 찾겠다고 밤이고 낮이고 쉬지 않고 돌아다녔어. 서에서도 발칵 뒤집혀서 난리가 났었고!” 점점 언성을 높이며 크게 소리치던 줄리아가 잠시 침묵하더니 화를 꾹꾹 눌러담으며 감정을 추스리려 노력했다. 불같은 언사에 전화기 너머 상대방이 실제 눈 앞에 서 있다는 듯 눈을 이리저리 도록도록 굴리며 답지 않게 눈치를 보던 엘사가 미안하다고 말하자 줄리아가 근심어린 짧은 숨을 내쉬고는 이어 말했다.

“그래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자세한 건 어차피 나중에 서에서 다시 이야기해야겠지만, 그래도 간략하게나마 설명해줘. 네가 쫓던 조직이랑 관련된 일이지?” 줄리아의 물음에 엘사가 무어라 답하려다가 멈칫하고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말이 쉽사리 나오지가 않았다. 린다의 제안이 돌연 머릿속에 또 다시 떠올라 가뜩이나 여러 생각과 감정에 복잡한 머릿속에 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같이 손을 잡자고 했다. 사실상 나보고 부패 경찰이 되라고 한 거다. 다시 어릴 적 소꿉친구일 때로 돌아갈 수 있다는, 쉽사리 거절하지 못 할 달콤한 제안을 하면서. 뭐라고 말해야 하지? 사실대로 털어놓는 게 나을까? 내가 쫓던 조직의 부두목이 사실 오래전 실종되었던 나의 소꿉친구였고, 그 소꿉친구는 과거 엄마가 담당했던 일가족 살인 사건의 피해자이자 유일한 생존자였다고? “엘사?” 말문이 턱 막혀 숨소리조차 내지 못 하고 입만 뻐끔거리며 굳어있는 엘사에 줄리아가 전화기 너머로 의아한 소리를 내며 재촉했다.

잠시간 말없이 침묵을 지키던 엘사는 건조한 입술을 혀로 살짝 핥고는 어딘가 갈라진 목소리로 차분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대답했다.
“아몬 조직에게 들켜서 납치당했어. 민간인인 줄 알았다가 총기와 형사증을 소지한 걸 보고는 경찰이라는 걸 깨달은 건지 죽이진 않고 외딴 장소에 날 버리고 가버렸어.” 무언갈 생각하듯 한차례 숨을 들이마쉬고 내쉬며 잠깐 쉬고는 뜸을 들이다가 엘사가 다시 말을 이으며 중얼거렸다.

“부두목은 보지 못했고. 네 정보 중 일부는 사실이 아니었나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