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린다엘사) 근면, 성실, 정의 4

책과 집 2024. 4. 15. 04:44

쉬어가는 편이라고 생각하며 썼는데 또 분량 조절 실패함
다음편부터 엘사 인생이 본격적으로 나락갈 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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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삶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기란 힘들었다. 분명히 더 이상 네 담당 사건이 아니라고 했는데도 파헤치고 다른 부서 관할로 넘어갔으니 손 떼라 일렀건만 기어코 건드린 대가로 납치까지 당하고 서에서 지급하는 리볼버까지 분실하고 근무까지 무단으로 며칠 빠진 엘사에게 분노한 윗선은 그에 대한 징계로 강력반에서 퇴출시키고는 이름도 몇 번 들어보지 못 한 어디 한적한 지방 근무처로 전근 시켰다. 몸도 채 다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상사의 사무실까지 절뚝이며 기어들어와 내부에 조직과 결탁한 공모자가 있다고, 당장 찾아내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납치 및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정신 상태가 불안정하여 내는 허무맹랑한 소리라며 당분간 시골에서 머리 좀 삭히며 요양하라고 묵언되었다.
“총기 분실이 얼마나 큰 징계 사유인지 모르나? 지금 그것 말고도 충분히 제적 당할 까닭은 차고 넘치네. 지금껏 이뤄온 실적을 보아 그나마 이 선에서 그친 거야. 그러니 이제 그만하게. 현재 자네 상태가 어떤지 알기나 해? 정신이 나가서는 미친 듯이 그 아몬이라는 조직에만 집착하며 제 한 몸 하나 스스로 돌보지도 못 하고 내팽겨치고 있잖나. 이제 그만 현실을 직시하고 주변을 좀 둘러보게.” 이번 일에서 교훈을 좀 얻었기를 바라네. 전근가서도 잘 지내고. 한줄기 희망을 붙잡고 애처롭게 사정을 설명했으나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끝났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냉정히 답변을 끝낸 상사는 손짓을 해 엘사를 사무실 밖으로 물렀다. 완고한 행동에 말문이 막힌 엘사는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가 자신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동료들의 눈초리를 느끼며 잔뜩 까지고 멍들어 반창고 투성이인 손을 느릿하게 움직여 의자에 놓인 커다란 박스에 책상 위 물품들을 천천히 담았다.

자신의 짐이 담긴 박스를 들고는 멍하니 텅 비워진 책상을 내려다보던 엘사가 마지막으로 눈에 담으려는 듯 고개를 나릿나릿 돌리며 사무실을 쭉 둘러봤다. 근면, 성실, 정의. 누렇게 변색되어 세월의 흐름을 여실히 보여주는 종이를 품고 벽에 걸려있는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가만 쳐다보며 한 글자 한 글자 곱씹고 되내이며 읽은 엘사는 여러 착잡하고 답답한 마음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겨 서를 떠났다. 아무도 자신을 붙잡지 않았고 위로나 조언의 말 한 마디 건네주지 않았다. 그저 복도를 걷는 동안 저들끼리 조용한 목소리로 속닥거리며 눈치를 볼 뿐이었다. 몇 년 동안 근무하며 지겹도록 보았던 건물을 이제는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꽤나 오랜 시간 일했는데도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은 짐을 트렁크에 실은 뒤 엘사는 차 시동을 켜고 주차장을 빠져나와 자신의 새 근무처로 향했다. 경로를 알기 위해 켠 네비게이션에서는 도착하기까지 약 3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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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박살난 전 핸드폰을 대신하여 새로 구매해 아직 금 하나 가지 않고 깨끗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사무실 의자에 앉아 몸을 축 늘어뜨린 엘사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소식을 들은 줄리아와 세라에게서 위로를 담은 몇 개의 문자가 도착했지만, 엘사는 그것을 읽기만 하고 별 다른 답장은 하지 않은 채 무심하게 넘겨버렸다.

[이상하게도 타 조직에 비해 이 범죄 조직만 수사 속도가 더디고 난항이 많아. 그냥 작은 폭력 조직이라며 어물쩍 넘기려는 흔적도 종종 보이고. 네 말대로 내부에 공조자가 있을 가능성이 커. 하지만 한 두명일지 아니면 그보다 많을지 예상하기 힘든 만큼 함부로 전처럼 들쑤시기는 힘들 거야. 이미 납치까지 당한 마당에 당분간은 몸을 좀 사려야 해.
그리고 센한테도 연락 좀 하고. 너 충격 받아서 많이 힘들까봐 전화도 못 하고 혼자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전전긍긍하고 계시더라.]

사실상 앞으로 아몬 조직에 대한 정보를 보내주기는 힘들 것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연락에 엘사는 짧게 그래. 라고 답장을 보냈다.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딱히 떠오르는 말들도 없었다. 그것을 아는지 읽음 표시가 뜸에도 답장이 거의 없는 엘사에게 줄리아와 세라 또한 뭐라 말을 얹지 않았다. 다리를 휘 저으며 의자를 반바퀴 도로록 굴린 엘사는 먼지 한 톨 묻지 않아 말끔한 핸드폰을 가볍게 주무르듯 만작거리다 센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 연결음이 얼마 가지 않아 곧바로 받은 센은 받자마자 엘사, 하고 이름을 부르고는 조금 망설이다 오랫동안 고르고 고른 듯 신중하게 단어 하나하나 끊어말하며 엘사에게 안부를 물었다. 너 괜찮냐. 힘든 거 안다. 낯선 타지지만 그래도 금방 적응할 거다. 살림에는 영 재주없는 거 알지만 그래도 밥은 꼭 챙겨먹어라.
헨리마냥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며 챙기려드는 센에 얌전히 네, 네 하며 말을 듣던 엘사가 돌연 떠오른 생각을 입 밖으로 옮겼다. “아, 맞다. 센. 케이블 타이 끊는 법 알려줘서 감사했어요. 덕분에 탈출할 수 있었거든요.” 덤덤하게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듯 말하는 엘사에 당황하여 말문이 막혀 벙 찌던 센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전화 너머로 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고 크게 꾸짖다가 종국에는 제발 주변 사람들도 생각 좀 하라고 한숨을 쉬며 어르고 달랬다. 별 생각없이 한 귀로 흘려가며 말들을 듣던 엘사는 알겠다고만 답하고 그 외에 대답은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단기간 내에 너무나 많은 일을 겪은 탓인지 주변의 걱정과 다르게 엘사의 머릿속은 하얗다 못 해 텅 비어 공허한 수준이었다. 별 다른 생각도 없었고 생각을 하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시간만 보낼 뿐이었다. 타고나길 튼튼한 체력과 경이로운 회복력으로 육체에 일어난 손상은 금방 복구되어 부서진 뼈는 서서히 늘어나며 금간 틈을 메웠고 찢어진 피부는 빠른 속도로 지들끼리 얽히고 설키며 그 자리에 상처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듯 희끄무리한 흉터만 조금 남기고는 깨끗하게 복원되었다. 허나 여전히 이따금씩 그 때의 통증이 몰려와 아리는 코와 이마는 마치 꼭 꿈을 꾼 것만 같은 그 때의 일들이 사실은 현실이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상기시켜 주었다.
그렇지만 엘사에게는 그 모든 것이 귀찮았다. 나태와 게으름이 그를 좀먹었으며, 한때 존재했을 총명함과 기지는 새로운 주인을 찾아 그의 육체와 정신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떠나간지 오래였다. 기껏해야 사건이라고는 누군가가 내 농작물을 훔쳐갔다, 논두렁에 끌차가 빠져 이도저도 못하고 있다,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두위가 아니라 미위여서 도움이 필요하다(엘사는 결국 밤늦게 호출되어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질 입구로 빼꼼 나온 송아지의 다리를 줄로 묶어 당기며 소의 출산을 도왔다.) 따위의 신고가 태반인 시골에서 엘사는 드물게 무료함과 지루함을 느끼며 어찌보면 평온하다 할 수 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한 때 투우마냥 오직 하나의 사건만을 바라보며 세찬 기세로 거침없이 나아간 적이 있었다. 걱정, 불안, 호기심, 거슬림 등의 다양한 생각과 감정을 품고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여러 시선들은 싸그리 무시한 채 맹렬하게 제 눈 앞에서 잡힐 듯 말 듯 벌건 깃발을 펄럭이며 도발하는 그 사건 하나 만을 쳐다보며 성난 콧김을 내뿜고 죽어라 돌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결국 깃발에 큰 무쇠 뿔이 닿았으나 그것은 곧 허무하게 너풀거리며 자신의 머리 옆을 스쳐 지나갔을 뿐이고, 기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방심한 틈을 타 옆구리에는 무식하고도 날카로운 창 여러개가 박혀 쓸쓸하게 흙바닥 한가운데에 누워 서서히 기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멍청하게도 본질을 보지 못 하고 당장 시야 앞에 흔들리는 천조각에 눈이 멀어 휘둘린 결과가 이 꼴이었다.
그래서 엘사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의욕도 마음도 없었다. 기나긴 기근이 찾아와 육신과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었지만 정작 그 땅의 주인은 비를 내려달라 빌지도, 새 터전을 찾아 떠날 생각도 하지 않고 메마른 대지에 발이 박힌 듯 그대로 가만 서있을 뿐 이었다. 그저 그러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적극적으로 사건을 찾아헤매지도, 사건을 해결하지도, 그렇다고 마음 놓고 푹 쉬는 것도 아닌 애매하고 두루뭉술한 태만의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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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한 사건사고도 없고, 농기계들도 모난 데 하나 없이 우직하게 돌아가며 묵묵히 제 할 일을 하고, 소와 돼지 같은 가축들은 얌전히 축사와 정원을 누비며 저들끼리 시시덕거리고, 이따금씩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새들이 나뭇가지나 지붕에 앉아 제 짝과 무리를 부르는 듯 지저귀는 울음소리 만이 전부였던 어느날 엘사는 문득 이대로 있다가는 몸이 굳겠다 싶어 깍지 끼고 하늘 높이 두 팔을 쭈욱 뻗곤 어깨와 허리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찌뿌둥한 육체를 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평온하고 고요한 날 잠깐 서를 비운다한들 그 사이에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을 터였다. 어차피 좁은 마을인 만큼 일이 생겨도 알아서 찾아오겠지. 들풀과 가축의 누린내가 항상 떠돌아 꼭 문명이 발달하기 전 먼 과거로 돌아간 것만 같은 착각을 주는 한적한 시골 내음을 코로 깊게 습 들이마쉰 뒤 엘사는 숲으로 발걸음을 옮겨 걸었다.
곱게 잘 정돈된 길은 아니었으나 꽤 오랜 세월 여러 사람이 오간듯 밟히고 짓이겨져 더 이상 식물이 뿌리내리지 못 해 군데군데 누런 흙들이 드러난 산길을 걸으며 엘사는 가만히 적막감을 받아들였다. 항상 시끄럽고 우악스러운 도시에서는 잠시의 고독도 허용되지 않았다. 가해자들의 거칠고 반항 섞인 말투와 피해자의 분노와 절박함이 섞인 말소리, 부지런히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들기는 소리, 여러 서류들이 바쁘게 출력기에서 뽑혀나가 상자에 스윽스윽거리며 쌓이는 소리, 귀를 찢을 듯이 높게 치솟는 호각 소리, 피곤과 귀찮음과 고단함에 침닉되어 힘없이 중얼거리며 서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여러 조언과 법률을 읊는 소리만이 끊임없이 들려오던 도회에서 지내다 태초의 모습을 간직한 듯 한없이 평온하고 잔잔한 산수 속에 있자니 기분이 영 이상했다.

어찌되었건 지금은 이 평화를 즐기자고, 좌천이라 생각하지 말고 휴가를 온 거라 여기자고 스스로에게 되뇌며 숲을 걷던 엘사의 눈에 문득 저 멀리 건물 한 채가 들어왔다. 이런 외딴 곳에 왜 건물이 있지? 반복되는 무료한 날들에 지루함을 느끼다 간만에 호기심이 동한 엘사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 시간 방치된 듯 외관에는 여러 덩굴들이 벽을 감싸고 때때로 갈라진 틈 사이로 뿌리를 박아 넣어 새로운 싹들을 피워냈으며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때로는 내부에 존재하여 드러나지 말아야 할 철근이 모습을 보이며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사람의 발길이 이미 한참 적에 끊긴 듯 전혀 관리받지 않은 모습에 잠시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던 엘사는 문고리에 있던 잠금장치가 이미 예전에 박살난 듯 잘게 부서져 삭은 채 바닥에 엉망으로 나뒹구는 걸 보고는 어차피 문도 열려있겠다 한 번 내부나 구경해보자고 마음 먹었다.
육중하고 무거운 철문을 손으로 밀어 열자 잔뜩 녹슬어 예진작에 굳어버린 경첩이 억지로 비틀어지며 고통에 찬 끼이이 소리를 내며 건물의 내부를 엘사에게 드러냈다. 사람이 떠난 후 한 번도 청소되지 않은 듯 화려한 색들이 서로 어우러져 장식된 스테인드글라스는 탁하고 어두운 흙과 먼지에 더럽혀져 자신의 색으로 완전히 햇빛을 물들이지 못 하고 미묘한 갈색이 섞인 텁텁한 빛을 성당 내부에 비추고 있었다. 주로 신부나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앉아서 참회와 낭독을 하던 양 옆에 늘어선 긴 의자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며 문을 열자마자 바로 보이는 곳에 위치한 지금은 잊혀진 건물에 방치된 옛 신의 발자취를 바라보았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건물 내부 중앙에 위치한 조각으로 현신한 버림받은 신은 옛 적에 만들어진 모습 그대로 몸 위에 가라앉은 먼지들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금 하나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 때는 여러 충직한 신도들로 북적였을 성당을 둘러보던 엘사의 눈에 순간 낯선 무언가가 보였다. 맨 앞 오른쪽 구석에 위치한 의자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아직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 한 듯 엄숙하게 고개를 숙여 무어라 중얼거리며 기도하는 낯선 이에게 오랜 형사생활로 인해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추고 고양이마냥 살금살금 다가간 엘사는 언제든지 돌발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시선을 고정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이런 인적 드문 곳에 찾아오는 사람이면 대게 세 부류로 나뉜다. 말 그대로 호기심에 가득 차 방방곡곡 온 장소를 누비는 탐험가 같은 사람들이거나, 온데간데도 갈 곳이 없어 마음 편히 몸을 뉘일 장소를 찾는 노숙자이거나, 혹은 범죄를 저지르고 도주 중인 범인이거나.
이런 시골까지 흉악한 범죄자가 내려오는 건 그닥 드문 일이 아니다. 본래 사람이란 죄를 저지르면 어떻게든 주변 눈에 띄지 않고 숨을 장소를 본능적으로 찾는 법이다. 제 눈 앞에 앉아있는 저 사람도 그런 유형의 인간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도 이리뛰고 저리뛰며 사건을 해결하느라 맞는 것에는 질리도록 익숙해진 엘사였지만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만에 하나 흉기라도 지니고 있으면 골치 아파질 테니까.

‘더 이상의 상처는 싫은데.’

무의식중에 코를 만지작거리며 약 2m의 거리를 남겨두고 살금살금 걸어가던 그 때, 바닥에 떨어져 그대로 방치되어 바짝 말라 비틀어진 나뭇잎을 인지 못 하고 실수로 밟은 엘사는 갑작스레 밑에서 들려오는 무언가 파사삭 부서지는 소리에 스스로가 더 놀라 흠칫하며 몸을 경직시켰다. 조용한 성당에 갑자기 일어난 소음은 꼭 누군가 소리를 크게 지른 것처럼 건물 내부로 넓게 퍼져나갔다. 그제야 자기 말고도 누군가가 이곳에 존재한단 걸 깨달은 듯 기도하다 말고 고개를 훽 돌린 낯선 신도는 웬 이방인이 자기 바로 뒤까지 접근해 쳐다보는 걸 보고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황급히 의자를 두어 개 연달아 타넘고는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파뜩 정신 차린 엘사가 곧바로 다리에 힘을 주어 의자들 틈 사이로 힘껏 달려갔다.

“거기서!!” 자신이 형사라는 걸 알지 못 할 텐데도 일단 사람을 보자마자 도망치는 걸 보아하니 확실히 수상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저 나그네처럼 떠돌아다니며 세상을 누비는 방랑객 같은 사람이었다면 뒤늦게 타인의 존재를 알아도 차라리 뒤에서 뭐하는 짓이냐 욕을 하며 잔뜩 성내고 귀신이 아니라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릴지언정 저렇게 도망갈 필요는 없었다. 도망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분명히. 사냥개처럼 시선은 도망자의 뒷모습에 고정한 채 열심히 발을 놀려 쫓아가던 엘사는 점점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걸 알아채고는 마지막으로 온 힘을 전부 허벅지로 끌어올려 전속력으로 달려가 낯선 외지인을 끝끝내 붙잡았다.
“무의미한 도주는 그만두시고 잠깐 수사에 협조해주시길 바랍니다. 과도한 저항은 공무집행방해로 간주되어 처벌 받을 수 있으며…” 아무리 그래도 함부로 수갑을 채울 수는 없어 일단 도망가지 못 하도록 몸 위에 올라탄 뒤 얼굴을 보기 위해 어깨를 붙잡고 상체를 뒤집던 엘사는 뜻밖에 얼굴에 눈을 크게 뜨고는 말을 하다 말고 상대를 내려다봤다. 작은 욕짓거리를 씹으며 뭐라 중얼거리던 상대 또한 자신의 위에 올라탄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따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버벅거리며 웅얼거렸다.

  “에, 에, 엘사 형사님?” 믿을 수 없다는 듯 말까지 더듬으며 반항을 멈추고 자길 올려다보는 사람은, 바로 예전에 자신이 직접 잡아다 구치소로 집어넣었던 폭력 조직의 일원이었다. 강도질이나 상해 등 여러 범죄를 저지른 죗값으로 분명 6년 형을 선고 받았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여기 있는 건지 의문이 든 엘사가 슬며시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딱딱해진 얼굴로 조용히 낮추어보자 속내를 눈치챈 조직원이 다급한 말투로 황급히 외쳤다. “모, 모범수로 지낸 덕에 형량이 줄어 가석방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있어?” 엘사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괴가 그르렁거리듯 사납게 물었다. “출소한 이후로는 조직을 나와 여기서 농사일을 거들며 성실하게 살고 있습니다. 지, 진작에 회개한 지 오래입니다. 성당에는 가끔 기도하러 찾아가는 것 뿐입니다. 착하게 살겠다고 신께 다짐했으니까요. 아, 아야야, 잠깐만! 진짜라니까요!” 의심을 떨치지 못 한 엘사가 다시금 손에 힘을 주어 어깨를 터뜨릴 듯이 꽈악 쥐자 고통에 신음하며 조직원이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의심되시면 같이 서로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제 출소 기록을 찾아보십쇼. 교도소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가석방 후 이 마을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다 상세히 적혀있을 겁니다. 당장 마을 주민들에게 물어봐도 알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얼마나 착하게 지내왔는데요!”
“그럼 아까 폐성당에서는 나를 보고 왜 도망친 건데?”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 소리소문 없이 뒤까지 다가와 갑자기 잡으려 드는데 누가 그 모습을 보고 도망을 안 치겠습니까?!”

억울한 듯 잔뜩 울분이 담긴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는 조직원을 보며 엘사는 잠깐 이 말이 정말 사실일지, 믿을 수 있는 게 맞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근 몇 년간 범죄자란 범죄자는 질리게 검거하고 취조하면서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는지 진실을 고하는지는 조금만 집중하면 금방 눈에 들어와 진의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까의 추격전과 당황으로 인해 동공이 조금 수축하긴 했지만 거짓말을 해서 그런 건 아니야. 어느정도 바닥에 누워있었으니 호흡을 고를 시간도 있었을 거고, 지금도 조금 거칠긴 해도 그리 불규칙적이진 않은 걸 보니 심박수가 딱히 높게 올라가지도 않았어. 조직 폭력배들은 공갈에 능하지 않아. 그 치들은 협박을 주로 하는 족속들인 만큼 무언갈 숨기는데에 큰 재주가 없지. 이 자도 마찬가지일 거고. 그러고보니 마을 주민들이 도시에서 내려온 건지 멀쑥하게 생겨선 잡다한 허드렛일을 나서서 도맡아 하는 사람이 있다고 종종 이야기를 했었지. 그때는 그저 흔하디 흔한 도시 생활에 지쳐 귀농하러 내려온 사람이겠거니 했는데, 지금보니 이 자를 뜻하는 거였나.

흐음거리는 콧소리를 내며 가만가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굳어있는 머리를 굴려대던 엘사는 혹시나 옷 안에 숨기거나 소지한 흉기는 없는지 몸을 더듬대며 간략하게 조사한 뒤에 비무장 상태인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손을 떼고는 자리에서 비켜났다. 자신을 내리깔던 하중이 없어지자 그제서야 안색이 밝아진 조직원은 엘사에게 연신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왜 여기 계세요? 원래 대도시 근처 부서에서 근무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리 순수한 의문에서 비롯한 질문이라 한들 자칫 자신의 치부를 건드릴 수도 있을 만한 말이었지만 엘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덤덤한 어조로 답했다. “강력반에서 쫓겨났어. 사고를 좀 쳤거든.” 아. 그제야 눈을 왼쪽으로 도록 굴리며 눈치를 보던 조직원이 할 말을 찾는 듯 입을 두어 번 뻐끔거리다 곧 합, 하고 다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어색하게 숲길을 같이 내려오던 둘 사이의 적막을 먼저 깨려고 시도한 것은 조직원이었다. 숨 막히는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환기시키기 위해 연신 입술을 달싹이며 말할 거리를 찾던 조직원은 겸연쩍은 말투로 혼잣말하듯이 우물거렸다. “처음에 볼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꼭 레나 님을 빼닮으셨네요.” 이젠 또 뭘 해야 하나, 나도 농사일이라도 도우며 시간을 보낼까 따위의 생각을 멍하니 하고 있던 엘사의 귀에 순간 믿을 수 없는 이름이 들려오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훽 돌린 엘사가 자기도 모르게 커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자신이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 흠칫하던 조직원이 조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엘사에게 대답했다. “레, 레나 님이 종종 형사님 이야기를 하시곤 했거든요. 어디보자, 형사님이 지금 스무살 후반이시죠? 그러면 그때가 아마 15년 전 쯤인가? 내 딸이 경찰이 될 거라 하던데 어디 지켜보겠다고 가끔 웃으며 이야기하곤 하셨죠. 사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이제보니 알겠네요. 얼굴은 몰라도 형사님과 레나 님이 분위기가 무척 비슷하시거든요.”
그래서 형사님을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감이 오긴 했어요. 설마 이 사람이 레나 님이 말하던 딸애 분인가 싶어서요. 그래도 확신할 수는 없어서 반신반의하며 말한 거였는데 정말이라니! 세상 진짜 좁네요.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감을 자랑하듯 이야기하는 조직원의 뒷말은 작게 분해되어 공기 중으로 흩날려 엘사의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네가 우리 엄마를 어떻게 알아?” 스스로 인지하지도 못 한 사이 목소리가 조금씩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알다마다요. 꽤 오래전부터 저희 사무실에 종종 찾아오시곤 했습죠. 다만 왜 찾아오신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 같은 말단 나부랭이가 뭘 알겠습니까? 대장이 따르라고 하면 따라야지요. 처음에는 웬 사복 경찰이 찾아왔길래 식겁해서 잡혀가나보다, 했는데 저희 대장이 웃으면서 반기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고선 두 분이서 사무실에 들어가 한참을 이야기 나누고 돌아가시곤 했는데 경찰 나리가 저희같은 조폭들에게 무슨 볼일이 있다고 그렇게 찾아오셨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네요. 경찰 쪽에서도 아주 유명한 인물이던데 어느날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엄마가 폭력 조직에 찾아와서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고? 소탕이나 검거가 아니라, 대화를 목적으로 내방했었다고? 한 두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엘사가 말문이 막힌 듯 어이없어 하는 투로 중얼거렸다. “레나 님이 한 번도 말씀해주신 적 없으십니까? 그분이야 뭐,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분이시니 제가 뭐라 함부로 추측할 순 없지만… 그래도 따님분께도 말을 안 했다는 건 조금 놀랍네요. 하긴, 그닥 자랑스럽게 말할 것도 아니긴 하지만요.” 생각해보니 엄마는 출근날이 아닌데도 종종 밖을 떠돌아다니곤 했지. 하지만 범죄조직을 만나러 간다는 건 예상치도 못 한 일인데. 고작 담소를 나누기 위해 찾아간 건 아닐 텐데, 대체 왜 찾아간 거지? 그것도 한 두번이 아니고 여러번이나 갈 이유가 있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질 늘어지며 텅 비어 황량했던 머릿속을 다시금 꾸역꾸역 채워나갔다.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불안한 기색을 감출 생각도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엘사가 물었다.

“너, 어디 조직 소속이라고 했었지?”
“예? 예예, 그게, 아몬입니다. 다만 나온지 2년 쯤 됐어가지고 아직도 조직 이름이 그대로일진 모르겠네요.”

아몬. 또 그 조직이다. 어릴 적 소꿉친구에게 일어났던 끔찍한 사건에도 숨어들어있고, 실종됐던 자신의 친구가 부우두머리로 속해있던 조직이, 경찰이었던 자신의 어머니가 비밀리에 음지에서 그들과 접촉했다는 사실과 함께 도로 제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서없이 던져지는 질문들과 커지는 의문 속에서 진실에 대한 끝없는 갈망이 또 다시 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일가족 살인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도 엄마였지. 이 모든 게 우연일까? 우연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나는 누구를 믿어야 하는 거지? 수면 아래 잠들어있을 사건의 실체를 찾아야 했다. 조직의 흔적을 따라가다보면 빠르든 늦든 진상을 깨우칠 수 있을 터였다. 이제야 겨우 실마리를 잡았는데 또 다시 놓칠 수는 없었다.
잠시 주변을 살핀 뒤 엘사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정말로 지금까지 여태껏 조직과 연락한 적이 한 번도 없냐고, 아무리 손을 털었다 한들 사람과의 연락을 바로 끊기란 힘들었을 텐데 뭐라도 연결거리가 남아있는 것은 없냐며 추궁하는 엘사를 보고 무언가를 생각하듯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곤 입을 작게 벌린 채 대답 않던 조직원이 마침내 깨달은 게 있다는 것처럼 작은 탄성을 뱉었다. “한참 연락원일 때 쓰던 핸드폰이 하나 있네요. 아직까지도 그 번호를 유지하고 있을 진 모르겠으나, 제가 가지고 있는 연락망은 그게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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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원으로부터 핸드폰을 건네받아 이리저리 만져보며 건드리던 엘사는 소수의 번호를 제외하고는 거의 텅 비어있는 전화번호부를 보곤 잠깐 전화를 걸어볼까 고민했지만 이내 곧 철회했다. 번호의 주인이 일반인으로 바뀌었다면 별 다른 문제가 없겠지만, 만약 정말로 현재까지도 조직이 이 번호를 사용하고 있다면 자칫하다간 자신이 또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본디 위험을 감수하는데에 큰 두려움이 없던 엘사였지만 최근 몇 개월 간 일어난 일들은 무의식 중에 위름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머리로는 그리 무섭지 않다고 생각해도 이미 무리한 고통을 학습한 몸은 거세게 반발하며 헛생각 따위는 하지 말라며 세찬 도리질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기껏 기회를 손에 쥐어놓고는 어쩔 줄 몰라하며 그대로 멍하니 시간을 낭비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강력반으로부터 쫓겨났으니 번호를 추적하기 위해 함부로 문서들을 뒤져볼 수도 없었다. 다른 방도가 없나 애써 머리를 사방팔방 굴리며 다리를 부산스럽게 떨던 엘사가 끄응거리는 앓는 소리를 내며 죄 없는 자신의 휴대폰과 조직원의 휴대폰을 번갈아가며 실없이 손가락으로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여러 혼란과 생각으로 가득 차 후끈 달아오른 머리에서 두통이 밀려왔다. 무슨 수가 없으려나 막막히 고민하며 의미없이 전화번호부의 통화 버튼 주변을 손가락으로 휘 돌며 장난치던 엘사의 머릿속에 갑자기 누군가가 떠올랐다. 자신은 비록 기존 직위에서 강등당해 권한이 없지만 다른 동료들은 아직도 복무하고 있을 테니 마음만 먹는다면 번호 한 두개 추적이야 그리 어렵지 않을 터였다. 개인적인 일로 그러는 것은 원래 사법이지만, 그렇다고 크게 징계받아 마땅한 일도 아니니 그리 큰 부담감도 없을 것이다. 엘사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줄리아에게 간략한 문자 하나를 보냈다.
[줄리아, 나 좀 도와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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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에게 또 다시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다급히 전화를 건 줄리아가 연락을 받자마자 냅다 허둥거리는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너 괜찮아? 설마 또 잡혀간 건 아니지? 지금 어디야? 어디 다친데는 없어?” 뭐라 변명할 새도 없이 다다다다 쏘아붙이는 줄리아에 핸드폰을 잠시 얼굴에서 멀리 떼고는 먹먹해진 귀를 쓰다듬던 엘사가 헛기침을 잠깐 하곤 대답했다. “아무 일 없으니까 걱정마, 줄리아.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전화번호로 상대방의 신원을 특정하거나 위치 추적을 할 수는 없어?” 난데없는 엘사의 당돌한 부탁에 말문이 막힌 줄리아가 허, 하고 짧은 탄성을 내뱉고는 전화기 너머로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설마 안 된다는 건 아니겠지. “줄리아?” 괜히 초조해진 엘사가 이름을 한 번 더 부르자 목소리의 주인이 약간의 분노가 섞인 언사로 음정을 낮게 깔며 대답했다.

“너, 대체 어떤 사건에 손을 대려는 건데?” 노기 어린 질문에 엘사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는지, 과연 어디까지 털어놓아도 되는지 좀처럼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단순히 범죄 조직을 소탕하겠다는 게 목적이 아니지? 숨기는 게 대체 뭐야? 말하지 않으면 이젠 더 이상 안 도와줄 거야.” 진심이야. 확언에 찬 말투로 간결하게 진실을 요구하는 줄리아의 심문에 뒷덜미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힌 엘사가 주저하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실종된 소꿉친구와 관련된 일이야. 어쩌면 우리 엄마와도 연관되었을지 모를 일이고. 너도 알잖아, 내가 얼마나 그 사건에 절박하게 매달려왔는지.”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어렵게 잡은 단서인데 이대로 허무하게 놓쳐버릴 순 없어… 말꼬리를 흐려가며 엘사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속삭임에 가까우다시피 할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진심이 담겼으나 차마 솔직히 털어놓지 못 한 비밀이 수면 아래 깔려있는 고해를 들은 줄리아는 한숨을 연거푸 쉬고는 으음거리며 앓는 소리를 얼핏 내뱉다가 결국 체념했다는 듯 푸념 섞인 투로 답했다. “알겠어, 번호를 보내주면 그걸 기반으로 최대한 관련있는 것들을 찾아볼게. 주소지나 신원을 찾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만… 공식으로 허가 받고 수사하는 게 아닌 이상은 엄연한 위법인 건 너도 알고 있지? 들키면 나도 곤란해지고, 너도 이번에는 정말로 위험해져.”

제발 부탁이니 무턱대고 사건에 달려들지마. 알겠지? 걱정과 불안이 섞인 조언에 엘사가 연신 고맙다고, 걱정하지 말라며 몇 년 지기 친구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줄리아의 마음을 위로하며 안심시켰다.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고 무언가 알아내면 다시 연락 달라며 전화를 끊은 엘사는 드디어 사건의 진상을 푸는 길에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에 묘하게 들떠 실룩이는 입꼬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몸무게가 실리자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등받이가 요의자 마냥 뒤로 기울어졌다. 아직 제대로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지만 앞으로는 조금씩 실체가 밝혀질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간만에 머리가 맑아진 기분을 느끼며 엘사는 한껏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여전히 전화번호부 화면이 떠있는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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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지만 기대와 다르게 줄리아로부터 온 연락은 거의 없었다. 간혹 알람이 울려 부랴부랴 핸드폰을 확인해봐도 개인적인 조사를 할 겨를이 별로 없어 네가 원하는 답을 내주려면 시간이 어느정도 걸릴 거 같다는 내용이었다. 시간이라니, 얼마나? 독촉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한가로운 시골로 전근 온 자신과 다르게 한참 세계의 여러 경찰 기구들과 공조하며 국제적인 사건을 해결하느라 이리뛰고 저리뛸 줄리아를 생각하면 바쁜 시간을 쪼개 자신에게 이 정도 할애해 준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었다. 세라에게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연락해 보았으나 그 또한 서장인 만큼 바쁘면 더 바빴지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음에 엘사는 결국 초조한 마음을 뒤로 하고 애써 느긋하게 기다려보기로 다짐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성격 급한 인간이었나 그동안의 자신에게서는 볼 수 없던 면모에 새삼 놀라며 간만에 비번이라 밤 늦게까지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혹시 모를 줄리아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던 엘사의 귀에 전화벨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책상 위로 손을 뻗어 확인해보니 수신인 이름에 센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문득 시계를 돌아보니 오후 11시에 다가워져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웬일이지 싶어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자 조금의 기다림도 없이 바로 연결된 게 짐짓 당황스러웠는지 전화를 건 주체인 센이 몇 번 군기침을 내며 목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얼굴 못 본지 오래됐는데, 너 괜찮냐? 요새는 별 일 없지? 줄리아가 너 또 이상한 짓 한다고 걱정하더라.” 위로나 조언 같은 걸 하는 게 아무래도 어색한지 중간에 몇 번이고 인위적인 기침을 하며 생각할 틈을 만들던 센이 약간은 횡설수설해하며 말을 이었다. “아, 늦은 시간에 전화한 건 미안하다. 나도 요새 일 때문에 통 바빠서 도저히 시간이 안 나더라고. 엘사 너에게 최근 소홀해진 거 같아 안부 차 전화 건 거야. 혹시 너 오늘 쉬는 날이었냐? 내가 방해한 건 아니지? 그러니까 먼저 연락 좀 해라, 이 자식아. 연장자가 이렇게 하나하나 신경써야겠냐.”
언뜻 보면 툴툴거리는 말들에 불과해 보이지만 기저에 깔려있는 애정과 걱정에 엘사가 장난끼 서린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마요, 센. 여긴 시골이라 그런지 사건 하나 없어요. 가끔 있는 거라고는 누군가가 농작물을 절도해갔다 이런 류의 신고가 끝이고요.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돼요.” 본인 때문에 속이 타들어가는 주변 사람의 처지도 모른 채 너무 크게 괘념치 말라는 듯 가벼이 이야기하는 엘사에 분노가 조금 치미는 것을 느낀 센이 그럼 신경 쓸 짓을 하지를 말라고 한소리 하려다가 단념하고는 엘사에게 토로했다. “어차피 네가 이렇게 말해서 들어먹을 놈이었다면 진작에 일이 이 지경까지 안 됐겠지. 제발 몸 좀 잘 챙기고, 네 주변인들 생각도 좀 해라. 연락도 자주 하고.” “네, 네, 선생님.” 장난스레 대답하고는 발끈한 센이 무어라 더 화내기 전에 재빨리 전화를 끊어버린 엘사는 슬슬 잠에 들 준비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씻으려고 욕실로 향했다.

그 순간,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골로 좌천되고 서에서 의식주를 해결할 순 없으니 근무할 동안 지낼 집을 구한 후 손님이 찾아온 적은 이제껏 한 번도 없었다. 사실상 외부로부터 단절된 폐쇄되고 자기들끼리 똘똘 뭉친 고립된 공동체 사회인 시골 생활에서 제아무리 경찰이라 한들 외지인인 엘사를 개인적으로 찾아오고 연락할 만큼 친밀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막말로 범죄가 일어난다 한들 자기네 사람이 저지른 일이면 서로 쉬쉬하며 넘어가는 게 태반인 곳이 바로 시골이다. 물론 여기가 위법행위를 은닉하고 저들끼리 숨기고 외부인을 배척할 정도로 고이고 썩은 동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늘 마음 한구석에는 아무리 해이해졌다 한들 최소한의 경계심은 갖추고 있었다. 근 몇 년 간의 형사 생활을 허투루 보낸 것은 아니었으니까.

자신이 너무 과하게 의심을 한 것이고 실제로는 별 볼일 없는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사고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니, 가령 이런 야심한 시각에 소가 급작스럽게 출산을 시작하여 도와줄 인력을 찾아왔다던가, 혹은 밤눈이 어두운 노인들 특성상 저녁에 마실을 나왔다가 길을 잃은 건지 집에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아서 실종 신고를 하러 이 동네 유일한 경찰인 자신을 찾아왔다던가 하는 자질구레한 사건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경찰로서 시민의 도움 요청을 무시하고 넘어간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문을 열어줘야 할까? 미동도 없이 가만히 굳어 문 쪽을 계속 빤히 바라보고 있자, 집 안의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다시금 열라는 듯 아까보다 좀 더 강한 힘으로 쾅쾅쾅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집 안 불이 켜져있고, 어쩌면 방금 전화하던 소리까지 외부에서 들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사람이 없는 척을 해봤자 소용없을 터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바깥에 서서 연신 문을 두드리는 저 자는 어째서 자신의 신원을 먼저 나서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인가? 마을 주민 중에서 경찰인 엘사가 이 집에 산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자신이 경찰이라는 걸 분명히 알고 찾아온 게 확실했다. 보통은 도움이 필요하면 나는 누구누구인데 이러한 일이 있으니 도와달라, 하고 신분을 먼저 밝힌 뒤 요구사항을 털어놓는 게 관례다. 그런데 저 자는 누구인데 말없이 문만 계속 두드리는가? 혹시나 크게 다치거나 하는 이유로 말을 못 해 간신히 문만 두드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이대로 계속 방치하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엘사가 결국 결론을 내리고는 문을 열기 위해 신중한 발걸음으로 천천히 현관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았다. 바깥과 내부가 이어지지 않도록 가로막던 철문을 밀어 훅 들어오는 밤공기의 냄새를 맡으며 어디 누군지 함 얼굴이나 보자, 하고 어두컴컴한 공간으로 몸을 내민 엘사의 눈에 커다랗고 낯선 물체가 일순 시야를 한가득 채웠다. “누구신데 이런 한밤중에 찾아와 문을 두들기십…” 빗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는 고요하고 맑은 날씨였는데도 불구하고 탁한 흑색의 우비를 머리까지 깊게 뒤집어쓴 거구의 인물이 우두커니 서서 엘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림자가 짙게 깔려 누구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엘사가 문을 사속히 닫으려고 시도했지만 순간 문 사이에 발을 끼워넣어 강제로 개폐를 막은 방문자가 잔뜩 흉지고 굳은 살이 박힌 두터운 손으로 문을 잡고는 억지로 열어재끼곤 집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밝고 화사한 내부와는 정반대로 대비되는 어둡고 칙칙한 환영받지 않은 방문객에 엘사가 방어 자세를 취하며 일단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며 도망갈 순간을 노리던 찰나, 거대한 몸집의 침입자가 문을 내부에서 잠가버리고는 엘사를 향해 위압적으로 천천히, 하지만 큰 보폭으로 다가왔다. “원하는 게 뭐야?” 돈? 재물? 아니면 개인적인 원한? 그도 아니면 다른 걸 노리고 찾아온 건가? “원하는 게 뭐냐니까!” 아무리 소리쳐도 대답 않고 부답하는 침입자에 엘사가 어떻게 하면 절체절명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 연신 머리를 굴리며 생각했다. 환한 전등 빛 아래 서있어서 어느정도 가늠할 수는 있을 정도로 얼굴이 드러났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는 일면식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마을 주민 또한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지? 혹시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날 찾아온 건가?

그렇다면 목적은 대체 뭐지? 폭력? 다시는 경찰로 복직할 수 없도록 영구적인 장애라도 남기려는 건가? 하지만 제게 이 정도로 원한을 살 만한 자들은 모두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테다. 범죄자의 증오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상징인 형사는 본래 신변의 위협과 목숨이 오가는 상황과 늘 함께하는 법이었다. 지금까지 구속한 범법자들이 아무리 자신에게 복수할 거라고, 죽여버릴 거라고 협박해도 대게 무덤덤하게 (때로는 코웃음치며) 수갑을 채우며 신경쓰지 않고 넘긴 채 살아오던 엘사에게 이 상황은 낯설고 당황스럽기 그지없었고 근래의 납치당하고 고문 당했던 경험을 되살려 두려움을 유발시키기에 충분했다. 귀 먹은 노인들이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마을 특성상 이 밤중에 아무리 소리를 지른다 한들 밖에서 누군가가 듣고 신고해주기를 바라는 건 헛된 믿음이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경찰인데 누가 누굴 돕겠는가. 유일한 출입구가 저 거체에게 막혔으니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할 터였다.

아무리 엘사라 한들 맨몸으로 덩치 차이가 심하게 나는 사람과 맞붙기는 힘들었다. 일단 방으로 뛰어들어가서 문을 막고 버텨볼까? 분명 침실과 이어진 베란다에 논두렁에 깊이 빠진 소를 구할 때 썼던 삽이 보관되어 있었지. 하지만 상대방과 거리가 너무 가까운데 방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차라리 먼저 최대한 강하게 달려들어 상대방을 조금이라도 중심을 잃고 휘청이게 만들고 그 사이에 도망치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하지만 몸에 어떤 흉기를 소지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대와 비무장 상태로 대치한다는 건 너무나 위험도가 컸다. 점점 자신과 가까워지는 침입자를 바라보던 엘사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어차피 이래나 저래나 위험하다면 조금의 승산이라도 있는 곳에 걸어보자, 하고 마음을 먹고는 달려들려고 자세를 잡는 순간 분명 짧은 찰나였지만 엘사에 눈에 무언가가 확실히 들어왔다. 저건. 우비를 쓴 침입자가 주머니를 뒤적이곤 손에 꺼내든 것은 다름아닌 전기충격기였다.

지지직거리며 전류가 저들끼리 서로 튀기며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하얗고 푸른 불규칙한 선들이 찢어질 듯 한 사나운 노이즈 섞인 소리를 내며 눈 앞에 가까이 접근했다.

아차.

이미 방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앞으로 기울어진 상태라 반동으로 인해 뒤로 물릴 수도 없는 상태인 엘사가 좀 더 상대를 면밀히 살피지 못 한 자신을 자책하며 곧 다가올 고통을 예지하며 숨을 들이켰다. 목 언저리에서 등시 따끔거리며 잔뜩 달구어진 막대기로 지지는 듯한 감각이 들다가 삽시간에 온 몸으로 놕뢰가 혈관을 타고 육체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가며 근육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도록 옭아매고 마비시키는 느낌이 들더니, 곧 눈 앞이 칠흑같이 캄캄해지며 제어를 잃은 몸뚱이가 힘없이 잘게 경련하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