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굴레차! /글

(화란은영) 블루 레몬에이드

책과 집 2019. 5. 22. 23:22



화란은영
근친 소재 주의


청소년기의 어느 날,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게 된 주은영의 이야기.










그날도 오늘처럼 맑고 고운 날씨였던 걸로 기억한다.

제가 오랫동안 고민하다 입 밖으로 꺼내 한 말을 듣고 놀란 토끼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이모가 떠오른다. 그에 대한 대답을 하려는 듯 입을 달싹거리지만 그리 쉽사리 찾지는 못한 듯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 하고 이리저리 눈을 돌리던 이모의 표정이 생각났다. 무언가 불안한 것인지 안절부절 못 하던 이모의 표정이 살짝 우습게 느껴졌다. 이모의 얼굴에 있었던 건 불안 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더 여러 감정들이 있었는데, 그게 뭐였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이럴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지.
아니면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들으니 당황했던가.

왜 그날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모의 붉은 머리카락이 내 방에 있던 붉은 꽃과 겹쳐보여서? 오랜만에 온 이모의 집이 그날따라 더 반가워서? 이모의 방에 있던 액자 속 사진을 봐서? 괜시리 이모의 반응에 더 울컥해서?

그 때의 나는 무슨 표정을 하고 있었지? 웃고 있었나? 아니지, 울고 있었던가? 아니면 그보다는 좀 더 처절하게 짓고 있었나? 거울이 없으면 본인은 본인의 표정을 보지 못하니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조금은 일그러진 얼굴이었겠지. 덤덤하게 무표정을 지었다면 좋았을 것이나,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제 기억 속에 있는 자신은 그리 감정을 못 숨기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아니었다. 흐트러졌을 것이다. 볼에 흐르던 눈물의 감촉을 기억하니까.

이모는 건조하게 느껴지는 듯 입술을 몇 번이나 혀로 핥으며 입을 꾹 다물더니, 이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시선을 마주하고 입을 움직였다. 내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했었는지는 떠오르지가 않는다.
어쩌면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한 걸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그 때 이모는 뭘 말하려고 했었더라.





간밤에 가랑비라도 내렸던 듯 땅은 살짝 축축히 젖어있었으나 거슬리지는 않았다. 코 끝을 스치고 갈 정도로만 느껴지는 아스팔트에 스며들은 비냄새와 이슬을 머금은 풀냄새가 곳곳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와 느껴졌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아하고 깨끗했으며 바람도 가볍게 미적지근해 땀에 절여 끈적일 정도도 아니었다. 참으로 맑고 곱디 고운 날씨였다. 오랫동안 하늘만 바라보며 정처없이 떠돌아다녀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로.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주은영은 그런 하늘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며 걸었더랜다. 가끔씩 주변을 둘러보면 옆에는 자분거리며 자기들끼리 떠들며 지나가는 친구들과, 자신을 알아채고 반가운 듯 인사하는 동급생들과 환하게 웃으며 오늘은 왜 이리 일찍 왔냐고 알은체를 하며 맞이하는 이웃들을 보며 건성으로 상체를 꾸부정하게 숙여 인사를 한 뒤 다시 하늘을 마주했다.

비나 오면 좋겠네.

남이 들으면 성격 참 안 좋다고 핀잔 들을 말을 속으로 집어삼키며 주은영은 여전히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평소보다 일찍 끝난 학교덕에 시간은 널널했고, 갈 곳은 없다 하더라도 집에는 가기 싫었던 주은영은 발길을 돌려 아무곳이나 발 닿는 대로 걸어갔다. 이미 아는 동네니 어디를 가든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 갑자기 그렇게 행동했는지는 모르겠다. 자신에게 인사하는 친구들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 맞장구를 쳐주고는 빠른 걸음으로 서둘러 집 주변을 벗어났다. 어디로 갈지 목적지도 정하지 않은 채 동네를 빙 둘러 산책하듯 걷다가 문득 이모가 떠올랐다.
이모는 자신의 아주 어릴 적 기억부터 함께 있었다. 보통 철들기 전 삶들은 잘 떠오르지 않음에도 주은영은 어린 날의 기억들도 모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에도 항상 이모가 있었다. 제 곁에 붙어 이것저것 많은 것을 알려주던 이모는 여타 다른 사람들처럼 어린 제가 크면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니 돌봐주거나 이뻐하지 않고 떠나는 게 아니라 여전히 곁에 있어주었다. 이모는 자신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 사람이었다. 엄마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자신과 함께 있어주었으니, 사실상 인생의 대부분을 이모에게 배웠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작게는 젓가락을 쥐는 것부터, 크게는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까지.

둘이 참 닮았네요.

이모와 함께 있다보면 주변에서 흔히 듣는 말이었다. 단순히 친족이라 외모가 닮았다는 것 뿐만이 아닌 말투나 습관마저 비슷하게 닮았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것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가끔은 이유 모를 기쁨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멋쩍게 하하 웃으며 넘어가는 이모를 보고 왠지 모를 감정마저 느꼈다. 그게 불쾌함인지 기쁨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 어릴 적에도 사실 눈치채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이모가 내 곁에 있어주었던 건 자신 때문이 아닌 자신의 엄마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기억 한 켠에 콕 박혀 잊고 살다가도 갑자기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은 주은영이 잊지 않도록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이모는 네가 아니라 네 엄마를 위해서 곁에 있는 거야.
그럴 때마다 저절로 조금씩 힘이 들어가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떨쳐내려 애썼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본인이 뭘 어쩌겠는가. 아니, 것보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몇 년 보지 않은 어린 조카보다는 몇 십년을 한평생 같이 지내온 자신의 혈육에게 더 정이 가는 법이었다.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엄마와 이모사이에는 자신이 모르는 긴 공백과 시간이 있으니까. 자신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가끔 엄마, 하고 어린 아이가 어리광을 부리듯 엄마와 이모 사이에 껴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그것 뿐이었다. 이모와 엄마가 둘이 있을 때에는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누구에게 느끼는 감정인지 모를 질투도 있었지만, 그것은 아주 어릴 적 잠깐 느끼고 빠르게 사라졌다. 쓸데없는 감정 소모는 하지 않는 게 좋으니까. 그보다는 자신과 둘이 있을 때 이모가 제게 보여주는 모습과 표정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순간순간을 사진을 찍어 앨범에 모아놓듯 오랫동안 기억 속에 담으려고 애썼다. 이모도 그랬을까. 자신에게, 혹은 제 엄마에게 보여주던 그 시선을 기억한다. 퍽 다정하고 차분해보였지만, 어쩐지 항상 불안하고 위태롭게 흔들리던 눈길이.


주은영은 휴대폰을 들어 전화 버튼을 눌렀다. 굳이 전화번호부에 들어가 이모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최근 통화 기록에는 항상 이모가 있었고, 이모의 번호는 집 번호든 핸드폰 번호든, 혹은 회사 번호든 다 외우고 있었으니까.

"이모, 어디야?"
- 여보세요, 은영이니?
"나 이모 집 갈려고. 이모 집에 있어?"
- 이모 지금 회사야. 그래도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갈 것 같아. 먼저 이모집에 들어가 있어, 비밀번호 알지?
"알았어. 그럼 이따가 봐."
- 그래, 나중에 보자 은영아.

문자로 해도 충분한 진부하기 짝이 없는 짧은 대화였지만 구태여 전화를 했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저를 부르는 그 목소리가 좋았다. 제 이름을 다정히 불러주는 그 목소리가 듣고 싶어 굳이 전화할 일이 아님에도 전화를 걸었다. 한창 일하느라 바쁜 시간일 때도 이모는 항상 전화를 받아주었다. 간혹 못 받는 일이 생기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나중에 항상 제게 먼저 전화를 걸어주었다. 참으로 다정하고 마음 여린 사람이었다. 그것이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행동인지 남에게도 그러는지는 모르지만서도 주은영은 자신에게만 그러는 것이라 믿었다. 확신할 수 없는 대답이었지만 그리 믿고 싶었다.


주화란의 집으로 찾아가 익숙한 패턴을 그리며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른 후 집으로 들어간 주은영은 거실 소파에 아무렇지도 않게 가방을 집어던진 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엄마집이 아닌 이모네 집에서 지내는 건 이제 일상이었다. 일주일에 두 세번, 많게는 사나흘 정도 이모 집에서 머무를 때도 있었다. 엄마는 이모에게 폐 끼치지 말라 하였지만 주화란은 싫은 내색을 비춘 적이 없었다.

부엌에 자리잡은 커다란 냉장고를 여니 여러가지 잡다한 음식들이 보였다. 손질하지 않은 재료부터 끼니를 대신할 식사거리, 음료수, 여러 종류의 간식들까지. 주화란의 집에는 주은영을 위해 따로 챙겨둔 음식들이 냉장고에 항상 쌓여있었다. 무언가를 먹었다 싶으면 빈 공간이 남지 않도록 부족하지 않게 채워뒀다. 아무리 늦어봤자 이틀이면 좀 줄었다 싶다가도 가득 채워져있는 것이다. 자신이 어디서 굶고 다닌다고 생각이라도 하는지, 혹은 친구라도 데려와 양껏 같이 먹으며 놀기라도 바라는지 알 수 없었지만 주은영은 이에 대해 이모에게 뭐라 말하지 않았다. 간혹 음식이 썩어 버려야 할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주화란은 냉장고를 채워놨다. 정작 이모 자신은 무언가를 먹는 걸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주은영은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며칠 만에 온 이모의 집을 돌아다니며 드는 생각은 이모네 집은 항상 깨끗하다는 거였다. 보통 혼자 살면 집 안이 어지러지기 마련일 텐데 주화란은 집안의 모든 물건들을 통제하고, 정리했다. 본인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이것도 아마 주은영을 배려함에서 나온 거였으리라. 자신의 가족이 더러운 곳에서 지내는 걸 원치는 않았을 테니.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가니 끝에서 양 쪽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닫힌 문이 보였다. 닫혀있는 왼쪽 방문을 열자 자신의 방이 드러났다. 여긴 엄마네 집도 아닌 이모네 집이었지만 이곳에도 자신의 방이 있었다. 자신의 방, 자신의 침대, 자신의 책상, 자신을 위해 마련해둔 듯 오늘 아침까지도 관리한 것 처럼 보이는 붉은 꽃까지. 화분에 붙여놓은 메모장을 보니 시클라멘이라는 꽃이었다. 괜스레 꽃말이 궁금해져 핸드폰을 켜 검색했지만 이내 다시 전원을 껐다. 이런 거에 쓸데없이 일일이 확인해서 뭐하겠냐고. 그냥 이뻐서 데려다놓은 것이겠지. 주은영은 그리 생각하면서 자신의 침대에 풀썩 쓰러져 누웠다. 침대에는 먼지 한 톨 없었다. 자신이 이 집에 오지 않는 날에도 꾸준히 청소했다는 의미였다. 보통은 쓰지 않는 방은 그대로 냅둘 만도 한데 꽃도 돌보고 청소도 한 걸 보면 자신이 언제 오든 맞이할 수 있게, 자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만 같았다. 아니, 그럴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니면 이렇게 해 둘 이유가 없으니까.

가끔은 집보다 이곳이 더 익숙하게 느껴졌다. 본인의 방이지만 이모의 집인 만큼 집안 곳곳에서 이모의 향이 느껴졌다.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가고는 자신의 방과 마주보고 있는 방의 문 손잡이를 잡고 벌컥 열었다. 이모의 방 이었다. 주은영은 이모의 침대에 힘없이 털썩 쓰러졌다. 깊게 숨을 들이키자 이모의 향이 머릿속을 울리는 것처럼 진하게 느껴졌다. 하– 천천히 입으로 공기를 내뱉으며 다시 코로 들이마셨다. 느린 호흡은 자신의 머릿속을 정리하고 굳은 몸이 풀어지게 하는데에 도움을 주었다.
침대에 엎드린 상태로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리자 침대 옆에 자리한 탁자 위에 있는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액자에는 자신의 엄마와 이모가 함께 찍은 어릴 적 사진이 들어있었다. 가끔씩 이모가 그 사진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며 액자를 쓰다듬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주은영은 그럴 때마다 어린 나이에도 그 시간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었는지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갔다. 이모가 제 것이라 느껴지면서도 그러한 순간에는 왠지 모를 낯섦이 느껴졌다. 자신은 절대 알 수 없는 감정과 기억일 것이니 더욱 그렇게 느껴졌던 걸 지도 모른다.

주은영의 방과 주화란의 방은 서로 마주보는 형태로 가깝게 붙어있었다. 굳이 왜 이렇게 정해놓은 건지는 모르겠다. 방이라면 다른 곳도 많았을 텐데, 왜 이모의 방 앞에 자신의 방을 마련해 놓은 건지. 채 덜 자란 조카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봤지만 자꾸만 다른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

문득 시계를 보니 벌써 이모가 올 시간이 다되어가고 있었다.

아직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니 이모는 식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있으니 약속이 있다 하더라도 아마 대부분 거절하고 오는 길이겠지. 이모와 식사를 하는 건 일상이었다. 두 명이 쓰기에는 조금 큰 테이블에 앉아, 서로 마주보며 우스갯소리를 떨며 하루를 물어보고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가끔 외식을 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집에서 요리를 했다. 어릴 적부터 이모 어깨 건너편에서 요리하는 것을 보아왔었고 내가 관심을 가지자 이모는 내게 직접 요리하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간단한 샌드위치부터 조금 복잡한 요리까지 어느 정도는 하는 편이라고 자신있지만, 내 자신을 위해 요리한 적은 없었다. 이모가 저를 챙겨준 만큼 자신도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제가 하는 요리들의 대부분은 이모와 같이 식사하기 위해 한 것들이었다. 가끔은 엄마를 위해 하기도 했었지만.

다 먹은 아이스크림 껍데기를 쓰레기통에 던져 놓고는 주은영은 슬슬 식사 준비를 하기 위해 냉장고를 열어 한가득 쌓여있는 재료들을 살펴봤다. 그러다 문득 냉장고 옆에 있는 조그마한 검은색 냉장고가 보였다. 따로 뭔가를 보관하는가 싶어 호기심에 문을 열어보니 여러가지 종류의 잘 정갈된 와인이 있었다.

"이모가 원래 술을 마셨던가?"

내가 저번에 올 때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선물 받은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모의 사생활까지 자신이 참견할 이유는 없었다. 와인이 있으니 그에 걸맞은 식사가 있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주은영은 냉장고에서 여러 재료들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양송이 버섯, 날치알, 치즈, 올리브유, 레몬 등 잡다한 식재료들을 보니 카나페와 레몬치킨구이를 만들면 좋을 거 같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본격적으로 재료를 손질하면서 주은영은 이모가 오기를 기다렸다.



식탁위에 늘어놓은 완성된 요리를 보며 주은영은 만족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본인은 술을 마시지 못 하니 블루 레몬에이드를 준비해놓았다. 여름날과 딱 맞는 시원하고 청량한 음료수였다. 조금이라도 더 시원한 기분을 내고자 일부러 푸른색이 들어간 레몬에이드를 선택했다. 이모는 술을 마실 테니 본인 것만 준비할까 싶었지만 혹시 몰라 두 잔을 만들어놓았다. 잔을 들어 다른 요리와 함께 세팅해놓으니 산뜻하고 기분 좋은 차가움이 느껴졌다. 하늘은 퍼담은 듯 한 푸른 하늘색이 주은영의 눈에 비춰 일렁였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현관문 쪽으로 반가운 듯 종종걸음으로 달려나가자 자신을 발견하고는 방긋 웃음을 짓는 이모가 보였다. 주은영은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주화란이 들고 있던 가방을 받아들고는 들뜬 맘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주화란의 방으로 향했다. 툭 하면 보는 이모인데도 볼 때마다 왜 이리 들뜨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가방을 방에다 내려놓은 뒤 나오자 식탁에서 요리를 보고 있는 주화란이 보였다.

"은영아, 이거 네가 한 거니?"

웃으며 감탄하는 주화란을 보고 주은영은 괜스레 머쓱해져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찌푸린 뒤 주화란을 손으로 살짝 밀며 의자에 앉혔다.

"일단 먹자, 이모."

본인도 마주보게 의자에 앉은 뒤 서로 잔을 들어 가볍게 맞추고는 식사에 들었다. 한창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와인에는 입 한 번 대지 않는 주화란을 보고 주은영은 의아한 듯 갸우뚱 거리더니 물었다.

"이모, 와인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와인 냉장고에 종류별로 쌓여있던데."

주화란은 음식을 씹던 입을 멈추고 잠시 주은영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우물거리며 삼키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가끔 손님 올 때 드릴려고 준비해 놓은 거야. 나중에 쓸 데가 있겠지 싶어서."

일순간 본인 눈을 피한 주화란을 보고 주은영은 짐짓 거짓말을 했다고 느꼈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거나, 혹은 제게 말한 것이 사실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 아마도 저건 엄마를 위해 준비한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속으로만 생각하며 음식과 함께 씹어삼켰다. 여기서 더 물어봤자 괜히 분위기만 이상해질 것 같았다. 잠깐의 정적 후 먼저 이야기를 꺼낸 쪽은 주화란이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냐고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묘한 분위기의 식사를 서둘러 끝냈다. 평소 같지 않은 쫓기듯 끝낸 식사였다.


"오늘 자고 갈 거야?"

거실에서 소파에 두런두런 앉아 제게 말을 거는 주화란을 보며 주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시계를 보니 집으로 돌아가기에도 늦은 시간이었다. 이모는 비교적 엄마와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었다. 자신이 어렸을 적에는 그보다는 좀 더 먼 곳에서 살았던 거 같은데, 중학교에 입학한 후 가까운 동네 주변으로 이사왔다고 들었던 거 같았다. 걸어서 가기에는 조금 먼 거리였지만 차로 타면 금방인 가까운 거리였다.
주화란이 자신의 친언니를 찾아가는 횟수는 주은영이 자람에 따라 조금씩 줄어들었지만, 나중에는 어느 정도 자란 주은영이 이모를 직접 찾아갔다. 이에 주화란은 뭐라하거나 싫다는 자세로 반응한 적은 없었다. 그리 기뻐보이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집에 마련해놓은 자신을 위한 걸로 보이는 것들을 보아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뭐든 제 추측에 불과하지만 주은영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굳이 캐물어서 관계를 망칠 필요는 없었다.

"영화 볼래?"

리모콘을 흔들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는 주화란을 보고 주은영은 어떤 영화를 볼 거냐고 물었다.

"글쎄, 공포 영화 볼까?"
"이모 그거 보고 잠 못 드는 거 아냐?"
"내가 어린애니? 나이가 몇 인데, 오히려 은영이가 이모방에 와서 같이 자자고 하는 거 아닌가 몰라~"

키득거리며 웃으며 그래서, 볼 거야 말 거야? 하는 주화란에게 주은영은 잠시 고심하는 척하더니 차라리 공포영화 말고 다른 영화를 보는 건 어떻겠냐며 제안했다. 공포영화를 무서워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 날 따라 다른 영화가 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로맨스 같은...

"...로맨스?"

아.
입 밖으로 내뱉은 걸 뒤늦게 안 주은영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놀란 눈으로 주화란을 바라보았다. 그냥 로맨스 영화를 보고 싶다고 말하면 될 터인데 왜 굳이 그렇게 긴장하며 말했는지 모르겠다. 괜히 의식하니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런 저를 주화란은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큰 소리로 깔깔 웃기 시작했다.

"로맨스, 헉, 그래. 로맨스 영화 보자. 우리 은영이도 이제 그럴 나이지, 하하..."

웃느라 말 중간중간 숨을 몰아쉬는 주화란을 보고 주은영은 괜스레 심통이 나 입을 삐죽였다. 그게 그렇게 웃을 일이야? 뭐야, 너무하네. 이모도 첫사랑 때 그렇게 반응했을 거 아닌...

첫사랑?

주은영은 순간 머리가 굳는 것을 느꼈다. 생각이 온통 새하얗게 물들어 백지가 되는 느낌이었다. 방금 내가 뭐라고?

머리에 무언가를 얻어맞은 듯 커다란 충격이 느껴졌다. 리모콘을 만지작거리며 티비 화면에 집중하느라 주화란이 자신의 표정을 못 본 것에 감사하다 생각할 지경이었다. 필사적으로 표정을 수습하며 주은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영화에 집중하자, 영화에.

주화란이 고른 영화는 오래 전에 나온 고전 영화였다. 주은영이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영화라고 했다. 어렸을 적 자신의 엄마와 함께 극장에 가서 본 영화랜다. 그게 기억에 남아 로맨스 영화라 하자마자 제일 먼저 떠올랐다고 했다.

"오랜만에 보네. 하도 오래 전에 본 거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재밌을 거야."

그리 말하며 제게 다정하게 웃어주고는 영화에 집중하는 주화란을 보며 주은영은 또 뭔지 모를 감정이 제 몸을 타고 천천히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긴장? 두려움? 아니면 설렘? 무엇에 그리 느끼는 지도 모르면서 주은영은 점점 머리를 가득 채워가는 그 감정에 주먹을 꽉 쥐고는 억지로 티비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감정을 흘려보내려 애썼다.




영화가 후반부 끝 부분까지 거의 다 흘러갔을 무렵 주은영은 짧게 하품을 했다. 자신은 로맨스 영화랑은 그다지 맞지 않았다. 아까는 뭐에 홀린 건지 왜 로맨스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문득 조용해서 옆을 돌아보니 이모는 벌써 잠들어있었다.

"뭐야, 나보고 먼저 보자고 해 놓고선."

영화에 집중하느라 조용한 줄 알았더니 먼저 잠든 거야?
주은영은 깨울까 말까 고민했지만 피곤했던 듯 곤히 잠든 주화란을 보고는 영화 소리를 조금씩 줄였다. 영화는 재밌지도 재미없지도 않았지만 지루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잠든 이모의 얼굴을 관찰하는 게 더 재밌을 것 만 같았다. 깊게 잠들었는지 얼굴 바로 앞에다 손을 휙 휙 흔들어대도 깨지 않는 주화란을 보며 주은영은 장난끼가 들었다.

"이모, 이~모."

으응... 하고 대답인지 모를 잠꼬대를 하는 주화란을 보고 주은영은 웃음을 꾹 참으며 조용히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이모, 자는 거야?"
"응..."
"영화 안 볼 거야?"
"으응..."
"이모, 일어난 거 아니지?"
"음..."

당장이라도 큰 소리로 깔깔깔 웃고 싶었지만 주은영은 욕구를 꾹꾹 눌러담으며 주화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조목조목하니 참 어여쁘게 생긴 얼굴이었다. 가만 바라보니 제 엄마의 얼굴도 살짝씩 보이는 걸로 보아 자매는 자매구나 싶었다. 어렸을 적 몇 번 만난 막내 이모가 떠올랐다. 셋이 자매니 닮은 거야 당연하겠지만, 이모와 엄마가 닮았다는 생각이 든 적은 별로 없었다. 이제와 살펴보니 그제서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모."

잠꼬대도 안 한 채 색색 숨을 내뱉으며 잠든 이모를 보고 주은영은 무어라 말하려 입을 우물거렸지만 곧 다물었다. 붉은 머리칼이 풀어헤쳐진 채 파묻혀 잠든 이모를 보고 있자니 시간이 정말로 천천히 흘러가는 것 만 같았다. 영화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저들끼리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백색소음 같이 신경 쓰이는 정도는 아니었다.

주은영은 조금씩 주화란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주화란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조심스레 슥 치우자 맨 얼굴이 드러났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대 바로 코 앞까지 마주보자 어두운 방 아래 티비 화면의 빛에만 의존해 힐긋 보이던 이모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주은영은 홀린 듯 자신의 손을 주화란의 볼에 갖다대었다. 그리고는 곧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가볍게 쪽 하는 소리가 났다가 영화 소리에 파묻혀 사라졌다.


티비에서는 영화의 엔딩 노래가 잔잔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왜 이렇게 이모를 좋아하는지 가끔 내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청소년기에는 가족보다 친구들과 더 같이 지내고 싶어한다지만 친척이랑 지내고 싶어하는 경우는 드물다. 더군다나 이모랑은. 가족에게서 독립할 시기가 다가와 그런다고 하기에는 이모 또한 가족이지 않는가. 한 가지 확실한 건, 가족보다는 이모가 더 좋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꿈을 꾼다.
이 곳은 꿈 속이다. 자각몽이라는 것을 깨닫자 주은영은 나풀나풀 이곳저곳을 걸어다녔다. 본인의 꿈 속이니 이곳에서는 무엇을 해도 상관없었고 또 그 무엇도 할 수 있었다.

주은영은 이모를 불렀다. 꿈 속에서 이모가 나타난다.
제게 걸어와 자신을 마주보고 선다.
제 얼굴을 감싸며 가까이 자신에게 얼굴을 들이댄다.
주화란은 방긋 웃으며 자신에게 무어라 입을 달싹이며 말한다. 잠깐, 뭐라고? 이모. 안 들려, 뭐라고 했어?

이모?




"은영아, 아침이야."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번쩍 눈을 뜨자 그 앞에는 소파 옆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모가 눈에 보였다. 소파에 널부러져 그대로 잠들었는지 시트는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어제 영화는 재밌게 봤어? 미안해, 이모가 피곤했는지 먼저 잠들었네."

오늘 휴일이지? 이모 잠시 서점 갔다올 건데 같이 갈래?
아직 잠에서 덜 깨 흐리멍텅한 정신을 붙잡고 주은영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아, 오늘 백은이랑 만나기로 했었는데. 주은영은 벌떡 몸을 일으켜 씻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다 거울을 보니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더불어서 어젯밤 기억도.

"미쳤어."

미쳤다고, 제기랄. 주은영은 물이 뚝 뚝 떨어지는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싸잡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꿈을 꿨나? 아니야, 그건 꿈이 아니었어. 내가 왜 그랬지? 내가 왜 그런 거지? 이모는 기억하고 있을까? 아냐, 이모는 그 때 잠들어 있었어. 분명히 그랬어. 하지만 만약에 기억하고 있다면? 아니지, 그럴 리가 없어.

그럴 일 없어야 해.

물기를 닦으며 방으로 돌아온 주은영은 옷을 갈아입으며 계속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20분 정도 남아있었으니 서둘러 간다면 늦지 않을 수 있었다. 방을 나서자 부엌 식탁 위에 아침에 만들어놓은 듯 한 샌드위치가 보였다. 주화란이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은영아, 간단하게 챙겨먹고 가."
"나 늦었어 이모, 1시까지 만나기로 했었는데..."
"그럼 차로 태워다 줄게."

방에서 외출 준비를 하던 주화란은 차 키를 챙기고는 현관문 쪽으로 가 신발을 신으며 주은영에게 말했다. 차로 가면 금방이니 가는 길에 태워다 주겠다면서. 주은영은 문득 어젯밤 일이 떠올라 고개를 내저었으나 시간은 갈수록 촉박해져 차를 탈 수 밖에 없었다. 어젯밤 일이 떠오르니 도저히 이모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한 순간의 치기로 저지른 일이라 넘기기에는 가볍지는 않은 일이었다. 어느 조카가 이모에게 그리 비밀스럽게 입을 맞춘단 말인가. 그것도 입술에.

웬일로 앞좌석이 아닌 뒷좌석에 탄 주은영을 보고 주화란은 의아한 듯 바라봤지만 별 말 하지 않고는 약속 장소를 향해 운전했다. 도착하자마자 자신에게 고맙다는 말만 하고는 얼굴은 보지도 않은 채 뛰쳐나가듯 차 문을 열고 나가는 주은영을 보고 혹시 제게 화난 게 있나 싶었지만 약속에 늦을까 봐 그런 거려니 하고 넘기며 주화란은 잘 갔다오라고 문자를 보냈다. 곧 바로 온 답장에는 저녁에 봐. 라고 적혀있었다.


"은영아!"

저 멀리서 기다리고 있던 백은이 자신을 발견하자 손을 흔들며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시간을 보니 다행히 늦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여느 10대들처럼 시내를 떠돌며 시간을 보내던 둘은 슬슬 저녁이 다가오자 어느 카페에 들어가 앉기로 했다. 밤이어도 여름이니 여전히 더운 날씨에 땀을 흘리며 들어오자 카페의 시원한 찬바람이 자신들을 반겼다.

녹차라떼와 케이크 등을 주문하고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문자가 온 듯 알람이 울렸다. 언제 오냐고, 저녁을 준비할 건데 밖에서 먹고 올 것이냐는 물음이 담긴 이모의 문자였다. 밖에서 먹고 올 테니 자기 기다리지 말라고 답장을 치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백은은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눈치 챈 주은영이 뭐라도 묻었냐고 묻자 백은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냐고.

"없는데."

사실은 있지만 남에게 함부로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나 이모가 있는데 이모한테 자꾸만 어떤 감정이 들어. 그리고 어젯밤에 잠든 이모한테 몰래 키스했어. 그것도 입술에다. 어떤 멍청이가 이렇게 말 할 수 있겠는가. 경멸의 시선은 고사하고 뺨이라도 맞지 않으면 다행인 일이었다. 답장을 보내고는 포크로 애플 시나몬 케이크를 쿡 찔러 작게 자르고 난 뒤 입에 넣어 우물거리자 백은은 픽 웃더니 거짓말하지 말라면서 케익 부스러기가 묻은 주은영의 입가를 손가락으로 흝으며 말했다. 순간 흠칫했지만 표정에는 티 내지 않은 채 주은영은 케익을 목으로 넘겼다.

어렸을 때부터 남에게 거짓말을 들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어째선지 백은에게는 통한 적이 없었다. 눈치가 빠른 건지 자신이 거짓말을 못 하는 건지 헷갈린 적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반응으로 보아 자신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덕분에 백은 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고민인지는 몰라도 안절부절 못 하는 게 보인다면서 괜찮다면 제게 말해보라 하는 백은을 보며 주은영은 어젯밤 일을 곱씹었다. 굳이 이모라고 밝힐 필요는 없었다. 그냥 친한 친구라고 설명하면 되겠지.


"...그런 일이 있었어."

그나마 고민을 털어놓자 한결 후련해진 것을 느꼈다. 어쩌면 답을 찾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싶었다. 문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머릿속 한 켠에 떠올랐지만 그건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로 했다. 애써 상기시키지 않으려 넘기려고 했다. 백은은 흐음하고 고민하더니 그런 감정은 언제부터 느꼈느냐고 물었다. 가만, 언제부터 느꼈더라?

이모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에이, 이건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인데. 이모 집에 갔을 때 머리 푼 이모를 처음 보았을 때? 아니지, 이것도 아닐 걸. 무언가에 집중하는 이모의 인상 쓴 얼굴을 보았을 때? 좋지만 그것도 아니야.

언젠지 몰라 과거를 하나하나 처음부터 회상하는 자신을 보며 백은은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했다. 그래서 그 감정이 무엇인지는 알겠냐고 하자 주은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좋아하긴 좋아하지만 그건 예전부터..."

멈칫.


아, 좋아하는 거였지.
가족애가 아니라 어쩌면 이건...


주은영은 일순간 표정이 싸아 변하는 것을 느꼈다. 숨기려해도 숨길 수가 없었다. 두려움인지 당혹감인지 드디어 자신의 감정을 자각해 알게 되어 느낀 기쁨인지 모를 감정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주은영의 반응을 본 백은은 걱정되는 말투로 괜찮냐고 물어왔지만 주은영은 고개만 살짝 끄덕일 뿐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어깨만 위아래로 들락날락 거릴 정도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고는 주은영은 백은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늘 너네집에서 자고 가도 되냐고.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자신이 뜻하는 집이 이모네 집인지 엄마네 집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둘 다 돌아갈 수가 없었다. 도저히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째선지 죄 지은 기분이 들었다. 엄마가 안다면 나를 어떤 표정으로 바라볼까? 만약 이모가 알게 된다면? 이모는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이제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지 않을까? 나를 싫어할까?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자 주은영은 일단 도망가기로 했다. 지금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면 울컥 감정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일단 어디든 도망간 뒤 천천히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그러면 좀 괜찮아지겠지 싶었다.

이모에게 문자를 보내는 손이 덜덜 떨렸다. 아마도 이건 긴장 때문에 그런 거리라 하고 심호흡을 한 뒤 오늘은 친구네 집에서 자고 갈 테니 이모 먼저 잠들라면서, 당분간은 못 갈 거 같다고 보냈다. 엄마한테도 보내야 하나 싶었지만 자신이 이모나 친구 집에서 자는 일은 잦았으니 안 보내도 괜찮을 성 싶었다. 그래도 혹여 걱정할까 우려되어 당분간 친구네 집에서 잘 것이라 보내놓았다.
조금 뒤 전화가 온 듯 웅웅 울리는 소리가 났다. 발신인을 보니 이모였다. 예전 같았으면 좋아라하고 받았겠지만 지금은 쉽사리 받을 수가 없었다. 전화를 받지 않고 방치하자 짧게 울린 뒤 전화는 곧 끊겼다. 문자가 왔음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떨리는 손으로 문자를 확인하자 거기에는 그래. 라고 짧게 적혀있었다.



며칠동안 친구집을 드나들며 정진하니 마음이 조금 진정됨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여전히 이모를 향한 이 빌어먹을 감정이 수그러들었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감정에 휩쓸리지는 않을 것만 같았다. 언제까지고 친구에게 신세를 질 수는 없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백은에게 고맙다고 나중에 뭔가 원하는 게 있으면 자신에게 말해달라면서, 신세를 졌으니 갚겠다고 하자 괜찮다며 일이 잘 해결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백은에게 꾸벅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는 주은영은 집으로 향했다.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는 이모네 집을 지나가야만 했기 때문에 무겁기 짝이 없는 발을 억지로 떼며 발걸음을 옮겼다. 빙 둘러가면 이모네 집 앞을 지나가는 건 피할 수 있었으나 그러면 너무 멀고 오랜 시간이 걸렸기에 이모랑 마주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라며 서둘러 가는 수 밖에 없었다.

아, 날씨 참 좋다.

자신의 기분과는 정반대로 날씨는 정말 참으로 맑고 예쁜 날씨였다. 하얀 구름이 몇 조각 하늘을 거닐고 바람은 살짝 따뜻했지만 그리 덥지도 않고 햇빛도 뜨겁게 내리쬐는 게 아닌 눈이 살짝 부실 정도의 날씨. 정말 모든 게 완벽한 하루였다. 자신의 상황만 빼고.

여러 생각에 잠겨 계속 걷다보니 어느새 이모네 집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혹여 이모가 있을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이모는 보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가 지났으니 괜히 의식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평일이라면 모를까 주말에는 회사에 안 가니 이모가 집에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모가 부디 서점이나 다른 곳에 갔기를 빌면서 주은영은 발걸음을 재촉해 아파트 앞을 지나갔다.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은영아."

주은영은 자신의 몸이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냥 자연스럽게 이모에게 안녕이라 인사하면 되는 것을 도저히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불렀음에도 꽤 오랫동안 반응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자신을 보고 이모도 의아함을 느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제게 다정한 말투로 물어오고 다가올 것이다. 그건 싫었다. 그것만은 싫었다. 지금 이모의 얼굴을 보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주은영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앞으로 계속 걸어갔다. 뒤에서 잠깐만, 은영아!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더니 이내 곧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뛰어 호흡이 금방 엉망으로 흐트러졌지만 계속 뛰었다.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지 마, 그러지 마 이모. 날 따라오지 마. 날 부르지 마.

제발 내가 이대로 도망가게 내버려 둬.

발이 꼬였는지 휘청이다 앞으로 고꾸라질 뻔 한 자신을 뒤에서 누군가가 덥썩 잡아 지탱해주었다.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자신을 따라 뛰어서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채 급하게 호흡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이모의 모습이 보였다. 주은영은 부리나케 손을 쳐낸 뒤 몸을 뒤로 빼내 주화란에게서 떨어졌다. 자신의 꼴도 엉망이었으나 그건 신경쓰이지 않는 듯 주은영은 주화란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지금 모습이 어떨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어떤 표정으로 이모를 바라보고 있을지.

"은영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제게 괜찮냐고 물어오는 이모에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주은영은 코웃음을 쳤다. 빈정보다는 자조에 가까웠다. 그런 주은영이 걱정되는지 다가오는 주화란에게서 주은영은 뒷걸음질을 쳤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다시 멀어졌다. 그런 주은영을 보고 주화란은 잠시 걸음을 멈춘 뒤 다시 재차 물었다. 무슨 일 있었냐고.

"혹시 이모 때문이니?"

그 소리에 눈에 띌 정도로 움찔하는 주은영을 보고 주화란은 한숨을 하 내뱉었다. 이모가 실수를 했다면 알려달라고. 피하고 도망가기만 해서는 해결할 수가 없다고. 만약 자신이 잘못한 게 있다면 고칠 테니 말해보라고.

"아냐, 이모는 잘못 없어. 이모는..."

오히려 잘못된 건 나인 걸.

하지만 입 밖으로 그 소리를 꺼낼 수는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몇 번이나 울려퍼졌지만 차마 입 밖으로는 나오지가 않았다. 목을 타고 꾸역꾸역 넘어오다가도 이내 다시 삼켜버린 듯 나오지 않는 것이다.
주은영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주먹에는 저절로 힘이 들어가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쎄게 쥐었다. 온 몸에 힘이 빠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당장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다리에 힘조차 들어가지 않아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네가 이상하다는 건 저번부터 알고 있었어. 아무리 바빠도 이모 얼굴은 마주보며 인사하던 네가 도망치듯 황급히 차에서 내리던 것도 그렇고, 전화를 일부러 기피하던 것도 그렇고."

역시나 이상해 보였던가. 하긴 그리 티나게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행동했는데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는 게 더 이상할 터였다. 그래도 몰라주길 바랬는데.

"이모, 난..."

말을 꼭 해야 할까? 그 말을 내뱉어도 괜찮을까?
주은영은 우물쭈물하며 자신의 손을 쥐락펴락 거리며 말을 우물거렸다. 그래도 말해야하지 않겠느냐며 머릿속 한 켠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추겼다. 그래도, 그래도.

"이모, 전에 집에서 영화보던 날..."

거기까지 말하자 울컥 눈물이 눈을 적시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말했다간 바로 쏟아질 것 만 같았다. 그런 추태를 보이기는 싫었다. 어떻게 해서든 눈물을 참으려 인상을 쓰고 입을 꾹 다물었지만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 뒤에 말을 이어준 건 이모였다.

"네가 내게 입 맞췄던 거?"


순간 머리가 멍 해졌다.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한 감각이었다. 고개를 휙 들어올려 이모를 바라보았다. 이모는 아까와 같이 살짝 인상을 썼지만 그렇다고 화나지는 않은 듯 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알고 있었어. 이모 그 때 안 자고 있었으니–"
"그럼 왜 나한테 말을 안 한 건데?"

주은영은 약간 화가 난 목소리로 주화란에게 물었다. 물었다기 보다는 소리 지른 것에 더 가까웠다. 억울함과 의문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그보다는 알고 있었음에도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이모에 대해서 짜증이 났다. 이러면 안 될 걸 알면서도 배신감이 들었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말을 안 했던 건데? 내가 그렇게 반응하는 걸 보고 왜 그저 보고만 있었는데? 왜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던 건데?

왜?

자신이 이제까지 한 고민이 모두 바보같이 느껴졌다. 이모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면 차라리 나도 신경쓰지 않는 거였는데. 굳이 이렇게 도망다니고 고민할 필요도 없었는데. 그냥 장난이었다고 하고 넘기면 됐었을 텐데.

왜 그랬는지 모른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괜한 오기가 들어서? 감정에 북받쳐서? 이모의 반응에 화가 나서 더 어떻게 나오나 보고 싶어서?
한 편으로는 계속 의문과 불안이 떠올라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정말로 괜찮겠냐고, 뒷감당을 할 수 있겠냐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장난이었다고 말하고 이대로 도망이나 가라는 온갖 말들이.

그 말을 해도 이모랑 난 예전 사이로 돌아갈 수 있을까?


주은영은 주화란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오다 멈춰섰다. 채 1m도 되지 않는 거리를 남기고 주은영은 주화란의 눈을 마주보더니 자신의 입술을 꾹 깨물었다. 토할 것 같았다. 머리가 멍해지고 지끈거렸다. 온 몸에 열이 오른 듯 욱씬 거리고 뜨거웠다. 주은영은 붙어버린 듯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말했다.


"좋아해, 이모."

제가 말한 이 감정이 남들이 생각하는 감정이 아닌 것을 주화란이 모를 리가 없었다. 적어도 이 상황에서는, 알아차리지 못 할 리가 없었다.

주화란은 오랫동안 고민하다 입 밖으로 꺼내 한 말을 듣고 놀란 토끼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에 대한 대답을 하려는 듯 입을 달싹거리지만 그리 쉽사리 찾지는 못한 듯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 하고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무언가 불안한 것인지 안절부절 못 하던 이모의 표정이 살짝 우습게 느껴졌다. 이모의 얼굴에 있었던 건 불안 만이 아니었다. 당황, 초조, 걱정, 당혹감, 그리고.

기쁨?

어?
순간 동그랗게 뜨인 눈으로 주화란을 바라보던 주은영은 잘 못 본 건가 싶어 눈을 연거푸 깜빡였다. 주화란은 건조하게 느껴지는 듯 입술을 몇 번이나 혀로 핥으며 입을 꾹 다물더니, 이내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시선을 마주하고는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조금만 더 다가오면 닿을 듯 한 바로 코 앞까지의 거리까지.
그러니까, 그 날 밤 영화를 보다 잠든 이모와 자신처럼.

주화란은 조심스럽게 주은영의 한 쪽 뺨을 어루만졌다. 터질듯이 쿵쾅거리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것 만 같았다. 서로 시선을 마주하더니, 주화란은 그대로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주 오랫동안.





자동차의 라디오에서 영어로 된 음악이 흘러나왔다. 느낌으로 보아 오래된 옛날 노래인 것 같았다. 예전에 이모네 집에서 보았던 로맨스 영화가 떠올랐다. 그 노래의 엔딩곡이 이런 노래랑 비슷했던가?

"왜 그렇게 애매모호한 반응이었는지 모르겠어. 덕분에 나만 고생하고 말이야."
"나도 마찬가지였거든?"

킥킥 웃으며 그러시겠죠, 하고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주은영을 보며 주화란은 눈썹을 찡긋거리며 혼난다. 하고 짧게 말했다. 대학에 입학한 주은영은 곧 바로 가족에게서 독립해 주화란과 같이 살기 시작했다. 이제 성인이니 청소년 때처럼 보호자가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굳이 이모와 살고 싶다고 고집해 이모와 같이 살기로 한 거였다. 같이 살기로 정하고 난 뒤 주화란은 이사를 했다. 언니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엄마는 이모에게 폐를 끼치는 거 같아 미안하다며 사과했지만 주화란은 괜찮다고 자신도 이제껏 홀로 살았으니 누군가와 같이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면서 웃으며 넘겼다.

"이모는 내 보호자가 아닌데 말이야."
"엄밀히 말하면 보호자이기는 하지."
"그 전에는 뭔데?"

응? 뭔데~ 장난스럽게 제게 말을 걸며 대답을 재촉하는 주은영을 보고 주화란은 운전 중 방해하지 말라며 눈길조차 주지 않고 운전에 집중했다. 재미없기는. 옆에서 챙겨온 액자 속 어린 이모와 엄마의 사진을 보며 주은영은 다시금 옛 생각에 잠겼다. 한창 혼란스럽고 당황했던 어린 날의 기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거 아닌 일이라 치부할 수 있지만 그 때는 정말로 당황스럽고 무서웠었다. 처음 느끼는 감정에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술 별로 안 마시더니 그 와인들은 왜 산 거야?"
"회사 지인에게 와인 냉장고를 선물 받았는데, 허전하니 뭐라도 채워넣어 놓을까 싶어서. 그리고 너도 조금 있으면 성인이니 언젠가 같이 마시자고 하려고 했지."

주화란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언니랑도 나중에 마셔볼까 했고. 결국 말을 꺼내진 못했지만."

주은영은 액자를 만지작 거리며 가만히 주화란을 바라보았다. 아직 미련이 남아있는 표정이었지만 자신이 거기에 대해 무어라 말 할 수는 없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그래왔을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입을 우물거릴 뿐 말을 꺼내지 못하는 주은영을 두고 주화란은 조용히 쿡쿡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괜찮다고.

"내 곁에는 네가 있잖아."

앞으로도 있을 거고.
말해놓고도 괜히 낯간지러운지 어깨를 으쓱거리는 주화란을 보며 주은영은 한숨과 함께 웃음을 내뱉었다.

"이모도 참 짓궂어."
"너는 어떻고."

작은 웃음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워갔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던 낡은 노래는 곧 마지막 가사를 중얼거리고는 다른 노래로 바뀌었다. 주은영은 차 창문을 내려 달리는 차의 바깥 공기를 맞이했다. 퍽이나 맑고 고운 날씨였다.










블루 레몬에이드 레시피 
- 레몬청, 탄산수, 블루 큐라소 시럽 

1. 컵에 얼음을 가득 담고, 탄산수를 적당히 부어준다. 
2. 레몬청 즙을 40ml 정도 넣는다. 
3. 블루 큐라소 시럽을 5ml 넣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