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굴레차! /글

(화란은영) 꿈

책과 집 2019. 6. 9. 06:28




주은영이 떠나간 후 가끔씩 주은영이 나오는 꿈을 꾸는 주화란.





​​

"안녕, 이모."
"이거 꿈이지?"

"응, 꿈 맞아." 그는 쿡쿡 웃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이건 이모가 꾸는 꿈이야. 나도 이모가 만들어낸 환상이지.

"내 무의식이 만들어낸 환상이니?"
"이모가 그렇게 믿는다면 그런 거야."

정말로 죽은 내가 나타난 거라고 믿어도 돼. 그래봤자 이건 모두 꿈이니까.

주화란은 제 앞에 나타난 아이가 주은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불어서 모두 환상이라는 것도.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자신과 대화를 나누겠는가. 그래, 가끔 그런 이야기가 있기도 했지. 오래전에 죽은 조상이나 친구가 꿈에 찾아오기도 했다는 그런 이야기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 존재가 정말로 주은영일수도 있지 않는가.

"은영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이모만이 아는 조카의 비밀~ 뭐 그런 걸로 내가 진짜인지 확인하려 들지는 마."

그리 말하더니 주은영은 발장난을 치며 한바퀴 빙 돌더니 성큼성큼 주화란에게로 걸어왔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제 조카의 모습이었다.
주화란은 자신의 몸이 살짝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건 이모의 꿈이야. 이모가 아는 건 나도 알아."

그러면 나는 널 어떻게 대해야 하니.

네가 꿈이고, 환상이라면, 혹은 정말로 너라면.
만약 꿈에서 깨어나서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다면.

"평소처럼 대해, 평소처럼. 간단하잖아."

나는 자주 장난을 치고, 이모는 대부분 속아넘어갔잖아. 그랬던 것처럼.

주화란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만약 다시 만난다면, 널 다시 보게 된다면 네게 들려주고 싶은 말들이 많았는데. 해주고픈 말들이 속이 곪아터지도록 쌓여있었는데.

눈가가 조금씩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앞이 흐릿해졌으나 흘리지는 않으려 애써 표정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만나자마자 울 수는 없었다. 이것이 거짓이든, 사실이든 울음에 막혀 하고자 했던 말들을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네가 해주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상대방을 찾지 못해 고이다 못해 썩어버린 오랜 말들이.

"은영아."

물기를 먹어 축축해진 목소리로 주화란은 주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선을 마주하자 여전히 눈웃음을 지으며 웃고 있던 주은영은 짐짓 슬픈 웃음을 지었다. 응, 이모.

주화란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린다는 걸 알았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꼭 해주고픈 말. 너를 만나면 제일 먼저 들려주고 싶었던 말.

"보고 싶었어."

그 말을 끝으로 터져나오는 눈물을 주화란은 막을 수 없었다. 자신의 볼을 타고 하염없이 축축한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알았지만 머릿속을 꽉 채워버린 감정은 눈물을 감추지 못하도록 온 몸을 굳게 만들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 한 이모의 우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주은영은 천천히 주화란에게로 다가왔다. 아주 천천히. 사뿐사뿐 발자국 소리조차 나지 않는 걸음걸이로 주화란의 바로 앞에 선 주은영은 팔을 뻗어 울고 있는 제 이모를 안았다. 아주 부드럽고 다정하게.

그 날 주화란은 울었다. 큰 소리로 그 공간이 울리도록 엉엉 울었다. 어차피 꿈이니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마음 놓고 울었다. 오랫동안 응어리진 설움과 분노가 터져나오듯 몸 밖으로 넘쳐나왔다.

왜 네가, 왜 네가.
어째서 네가 그래야 했던 거니.

주화란은 주은영을 부숴지도록 부둥켜 안고는 울음소리 사이로 말을 꺼냈다. 눈물과 숨소리에 흩어져 금방 사라져버린 말이었지만 주은영은 이모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지 않고 가만히 주화란을 토닥이며 안고 있던 주은영은 이내 입을 열었다. 운명이니 어쩔 수 없었던 게 아니겠냐고.

"그렇지만, 그래도, 왜 네가, 왜 네가..."

주은영은 이번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끅끅대며 울음으로 지쳐 가누지 못하는 몸을 들썩 거리는 주화란이 쓰러지지 않게 제게 기대어 안아주고는 조용히 오랫동안 토닥여줄 뿐이었다.

"이모."

저를 부르는 주은영의 목소리를 듣고 주화란은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눈물로 얼룩져 엉망이 된 이모의 얼굴을 보고 주은영은 픽 하고 웃었다. 이모의 그런 얼굴은 처음보네.

그래도 내 곁에 이모가 있어줘서 다행이야.

주은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이 풀려 땅바닥에 앉아 자신을 끌어안고 울었던 주화란은 그런 저를 보고 다급하게 붙잡고는 말했다.

가지마, 은영아.

"또 나를 떠나지 마..."

다시 말을 흐리며 먹먹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이모를 보고 주은영은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도 떠나기 싫다는 듯 강하게 주화란을 부여잡고는 머리를 파묻었다. 이내 곧 고개를 들고 주은영은 주화란과 눈을 맞추며 다정하지만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야."





눈을 떴을 때 주화란은 자신이 언니네 집에 있음을 깨달았다. 아, 맞아. 나는 언니네 집에서 지내고 있었지. 문득 눈가가 촉촉한 거 같아 손으로 얼굴을 부비자 자신이 자면서 울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슨 꿈을 꿨었던 거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슨 꿈을 꿨었더라.

창문을 바라보니 어느덧 해가 뜨며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나려하자, 옆에서 잘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손에 무언가가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아보자 그 곳에는 귀걸이가 있었다.
오래 전 모두에게 잊혀진 작은 주작이 쓰던 귀걸이 형태의 보패가.

분명히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거 같은데 왜 자신의 침대 위에 올려져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잠결에 꺼내기라도 한 건지 의아해하며 정리하기 위해 귀걸이를 쥐자 주화란은 그제서야 떠올렸다.

은영아.

네가 내게 와줬었구나.

자신을 그리워하는 이모를 위해 직접 찾아온 조카는 혹여 저를 잊어버릴까 봐 흔적을 남겨두었다. 이모와 함께 지낼 때 항상 사용하던 귀걸이를 주화란 머리맡에 두고는 조용히 사라졌을 것이다. 자면서 제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이모를 껴안아주고는 다시 돌아갔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주화란은 자신이 다시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너는 이제 없지만, 아직 여기 있구나.

이 보패가 네가 내게 남겨준 선물이구나.

주화란은 만지작거리며 귀걸이를 귀에 달았다. 혹여 상할까 싶어 서랍 속에 고이 보관해두었었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귀걸이를 달고 거울을 바라보자 순간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오며 귓가에 짧게 스쳐지나갔다.

나중에 봐, 이모.
"그래, 은영아."

안녕.

주화란은 더 이상은 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