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대니맥) 티타임

책과 집 2017. 9. 7. 00:15





화창한 날씨. 바람은 가볍게 살랑이고, 햇빛은 뜨겁지 않고 따사로운 딱 기분좋은 날씨. 아무런 일정도 없는, 느긋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토요일. 정말로 완벽한 하루다. 그랬어야 했는데.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사람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문에 달린 방울이 딸랑이는 소리를 내고, 선반에는 여러가지 책들이 꽂혀있고,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고전 클래식 음악이 들려오는 곳. 햇빛이 따사롭게 비추는 창틀 주변에 앉아 맥스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현듯 찾아온 한 통의 편지. 여기가 아무리 산 속이라고 하더라도, 전화가 있는데 어떤 멍청이가 굳이 편지를 보내냐고 데이빗에게 말했지만 데이빗은 누가 보기에도 만든 듯한 억지 웃음을 연신 지으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내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내게? 나한테 편지를 보낼 사람은 없을 텐데. 누가 장난으로 보냈나, 반신 반의하며 편지 봉투를 집어들자 맨 처음 눈에 띈 글씨.

대니얼.



뭐?


그 좆같은 종교쟁이가, 나한테 편지를 보내왔다고? 왜 하필이면 나한테? 그보다 감옥에 간 거 아니었나? 감옥에서도 편지를 보낼 수 있나? 수 많은 생각이 교차하는 와중 데이빗의 짧은 목소리가 맥스에게로 들렸다. 안 열어볼 거야? 아, 그래. 맞다. 애써 떨리는 호흡을 진정하고 부스럭 편지 봉투에 붙은 흰 색의 곰인형 스티커를 *빌어먹을 정도로 귀여운* 떼고 편지를 열어보았다. 편지 맨 위에 쓰인 글씨는 한 순간의 부정 조차도 모조리 깨뜨려버리는 강경한 말이였다.

맥스에게.

씨발, 착각이길 빌었는데. 자신을 지목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가라앉아 당장 편지를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그 뒤에 내용을 궁금해하는 듯한 데이빗의 눈빛 때문에 맥스는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다.
편지의 내용은 지극히 짧고 간결했다. 주저리 주저리 잡담같은 것은 일체 써져있지 않은, 오로지 하고 싶은 말만 명료하게 써 있는 글. 몇 날 몇 시에 어딘가의 카페에서 보자는 것. 그래, 그나마 낫지. 이 빌어먹을 캠프를 벗어나는 거야면야 차라리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낫겠...

"씨발, 이 날은 토요일이잖아!"

대니얼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나쁜 일이었던 그는 하필이면 만나는 날짜가 토요일이라는 사실에 더욱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렇다고 안 가자니 마음 한 구석에 걸리는 게 있었다. 카페를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건 무슨 일이 있었던 간에 감옥은 안 갔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혹여 자신이 오지 않았다고 캠프로 직접 찾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맥스는 애써 올라오는 분노와 욕짓거리를 참으며 꾸깃꾸깃 편지를 접어 쓰레기통에 던졌다. 매- 맥스? 데이빗의 걱정되는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맥스는 이 이상 기분이 더 나빠진다면 정말로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았기에 말 없이 캠프를 빠져나왔다. 대니얼을 볼 그 순간을 기다리면서.



*



막상 대니얼을 다시 만난다니 맥스는 두려움과 긴장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며 빨리 뛰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심장 박동이 급격히 빨라진 걸 온 몸으로 체감하면서 맥스는 진정하려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진정하자, 여기는 다른 사람들도 많고 그 사이비가 나에게 무슨 짓을 할 수도 없을 거야. 세뇌실도 없고, 카페니 음료수에다 뭐를 타기도 힘들 거고, 납치를... 할 수도 없겠지. 그래, 진정하자. 진정해야 해. 정신차려, 이 멍청아. 떨리는 두 팔을 붙잡으며 맥스는 고개를 들어 카페의 걸린 몇 십년은 지난듯한 오래된 낡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제 곧 올 때가 됐는데.

딸랑.

그 순간, 방울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문을 열고 카페로 들어왔다. 설마, 설마.

대니얼.

오 갓, 세상에. 내가 저 망할 종교쟁이를 다시 보게 되다니. 그것도 내 발로 직접 찾아와서! 엄밀히 말하면 반 강제로 만나게 된 것이지만, 자신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사실에 맥스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었다. 후회하고 나가려해도 이미 늦었지만. 맥스. 듣기 싫은 목소리가 맥스에게로 들려왔다.

"오랜만이야, 맥스.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와줬구나."

"네가 오라며, 이 빌어먹을 종교쟁이야!"

순간 울컥해 손가락질하며 큰 소리로 욕을 내뱉자 사람들의 관심이 맥스에게로 쏠렸다. 맥스는 애써 화를 가라앉히며 다시 자리에 조용히 앉고는 자신에게로 천천히 걸어와 마주 앉은 대니얼을 인상을 찌푸리며 조용히 쳐다봤다.
무슨 꿍꿍이야.
맥스의 질문에 대니얼은 사근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뭐 마실래? 내가 한 질문은 그게 아닌데. 알아, 그래도 카페에 왔으면 뭔가 시켜야지.

"내가 사는 거야. 부담갖지 말고 마음껏 주문해도 돼."

과연 믿어도 될지 의심이 갔지만 카페니 약을 타기도 힘들거고 마침 목이 마른 참이었던 맥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카페의 메뉴판 앞으로 걸어갔다. 수 많은 메뉴들이 가득 찬 메뉴판 앞에서 맥스는 생소한 이름들을 하나하나 차근히 읽어갔다. 초코칩 라떼. 그럼 나도 같은 거로 시킬까.

"뭐? 기분 나빠. 바꿀래. 나는... 딸기 스무디?"

저 종교쟁이랑 같은 걸 먹을 순 없지. 최대한 대니얼과의 접촉을 피하고 싶었던 맥스는 재빨리 다른 것을 주문했고 그런 맥스를 대니얼은 웃음만 머금은 채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 그래. 그럼 난 잉글리쉬 블랙퍼스트로. 진동벨을 받고 다시 자리로 돌아온 둘은 어색한 침묵을 이어나가기 시작했고, 그 침묵을 먼저 깬 건 맥스의 던지듯 뱉은 짧은 말이었다.

왜 그러는 거야.

응?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대니얼이 고개를 갸웃하자 맥스가 그 뒤 말을 잇기 시작했다. 왜 하필이면 나야? 네가 그 후로 감옥을 갔는지 안 갔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아. 다시 온다면 복수하러 올 거라고 생각했었지. 근데 왜 나한테 친절하게 구는 거야? 데이빗도, 다른 애들도 아니고 하필이면 왜 나한테?

말이 끝나고 맥스가 대답을 바라며 대니얼을 올려다보자 대니얼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으며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제기랄,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이야. 맥스는 다 들리도록 혼잣말을 하며 탁자에 고개를 묻었다. 곧 이어 진동벨이 울리고 대니얼이 음료수를 가져오는 짧은 시간에 혹여 뭐라도 탈까 싶어 맥스는 서둘러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달려갔다.

딸기 스무디. 그러고 보니 카페에서 뭘 먹는 건 처음이던가. 그 동안 지나가면서 보기만 했지 카페에는 잘 오지도 않았었는데. 생각했단 것보다 훨씬 크고 긴 유리잔에 나온 스무디에 맥스는 짐짓 놀라며 스무디에 꽂힌 빨대를 자기쪽으로 손으로 잡아당겼다.
달달하다. 딸기쨈도 좀 넣었는지 무거운 단맛과 딸기 특유의 새콤한 맛이 고소한 우유와 함께 한 데 뒤섞여 느껴졌다. 캠프에서 맛 없는 것들만 먹다가 오랜만에 맛있는 걸 먹으니 기분이 좀 좋아지는 듯 했다. 곧 들려오는 대니얼의 목소리에 다시 나빠지긴 했지만.

"그래서, 내가 왜 찾아왔냐고?"

질문에 한참 늦은 대답이었지만 맥스는 여전히 빨대를 입에 문 채 대니얼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멍청한 대답이던 간에, 이번만 보면 끝이겠지. 이제 영영 이 좆같은 종교쟁이와 마주할 일은 없을 거야. 이제 난 다시 망할 데이빗이 있는 캠프로 돌아가서,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보낼 거야.

네가 보고 싶었거든.

...뭐? 뜻밖에 대답에 맥스는 물고 있던 빨대를 내뱉으며 입을 벌렸다. 무슨 뜻이야? 자신이 보고 싶었다는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에 맥스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대니얼을 바라봤다. 그런 맥스의 반응에 이미 예상했다는 듯 대니얼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 말 그대로야, 맥스. 네가 보고 싶었어.

맥스는 놀라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숨을 골랐다. 왜 내가 보고 싶었어? 왜 네가? 왜 하필이면 너고, 왜 하필이면 나야? 수 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 하고 계속 서성거릴 뿐 이었다. 그런 맥스를 바라보던 데이빗은 자리에서 일어나 맥스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조그마한 손을 마주잡으며 천천히 말했다.

"내가 너를 행복하게 해줄게, 맥스."

네가 겪어왔던 그 어떤 것보다도, 네가 행복해 질 수 있도록.
놀라 당황하는 아이를 지긋이 바라보며 대니얼은 마주잡은 손을 소중한 듯이 꼬옥 쥐었다. 아, 이 표정을 봐.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놀라서 여전히 벙 쪄있는 아이에게 그는 싱긋 웃으며 아이의 이마에 작게 입을 맞췄다. 곧 머리를 쓰다듬고는 귓가에 조그맣게 무어라 말을 속삭인 뒤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다릴게, 맥스. 천천히 생각해.

딸랑- 방울이 울리는 소리가 카페를 가득 채우면서 문이 한 번 열렸다 닫히자 맥스는 퍼뜩 정신이 들어 그제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여전히 말이 나오지 않는 입을 껌뻑껌뻑 움직이며 아직도 여전히 울리고 있는 방울이 달린 문을 쳐다보다가 황급히 카페 밖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 잠깐.
쉴 새 없이 빠르게 이제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그대로 느끼며 맥스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직 채 식지 않고 온기가 남아있는 홍차와 반 쯤 마신 딸기 스무디가 올려져있는 탁자를 손 틈 사이로 바라보며 맥스는 다시금 탁자에 고개를 파묻었다. 웅얼거리는 말소리가 조용하게 새어나왔다가, 곧 카페의 여러 말소리에 의해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