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린다엘사) 근면, 성실, 정의 9

책과 집 2024. 6. 27. 18:36

완결입니다
외전을 쓸 수도 있고 안 쓸 수도 있는데 쓴다면 더럽고 추잡한 내용으로 올라올 듯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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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무모하기 짝이 없구나, 내 딸아. 그리운 목소리다. 그토록 바라고 찾아헤매던 내 어릴 적 쓰라린 고통과 추억의 목소리. 그러나 이제는 애증과 분노와 원망이 담긴 상대에 대한 목소리. 음성의 주인이 누군지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잠깐 보지 말까 하는 고민도 들었지만 어린애 같은 투정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윽고 엘사는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말을 건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엄마.” 어릴 적 기억에 남아있는 모습 그대로다. 더 이상 나이를 먹지도, 입고 있는 옷이나 목소리가 바뀌지도 않는다. 아마 영원히 그러겠지. 영원히 이 모습 그대로 내 기억 속에 남아있겠지. “엄마가 저지른 일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알아?” “그럼, 당연히 알지.” 어떠한 죄책감이나 일말의 양심도 느끼지 못 하는 듯 한 모습에 엘사가 짐짓 인상을 찡그리며 살짝 사나워진 말투로 물었다. “내 친구는 엄마로 인해 고통받다가 결국 잘못된 길을 선택했어. 그로 인해 나 또한 온갖 일들을 다 겪었고. 처음 강력반으로 배치되고 형사가 되었을 때 각오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납치 당하고, 얻어맞고, 그리고…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도 당하고. 정말 힘들었어. 엄마가 많이 원망스럽기도 했고. 사실 지금도 그래, 용서하진 못하겠어. …아마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까.”

엘사의 말을 차근차근 듣던 레나가 말이 끝나자 여전히 그 예의 차분하고 어찌보면 거만하다 볼 수 있는 얼굴로 무덤덤히 대답했다. “그래, 어떠한 감정을 품든 네 선택이니 내가 뭐라고 할 순 없지. 어차피 이미 죽은 사람한테 뭘 더 바랄 수도 없지 않느냐.” 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테니까. 마지막 말이 엘사의 가슴을 시큰하게 찔러댔지만 레나는 그 외에 별 다른 말을 더 덧붙이진 않고 그저 묵묵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해? 애초에 경찰이 된 것도 엄마의 진실과 린다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 였는데, 이젠 다 끝났잖아.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그토록 긴 시간을 달려왔는데, 모든 게 끝맺은 지금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엄마라면 뭐라도 조언 좀 해줘. 당신이 정말 내 엄마라면…” 엘사가 자신 없다는 듯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이내 말꼬리를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잠시 침묵하던 레나가 코로 미약하게 숨을 내쉬더니 답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난 이젠 없는 사람이다. 정말로 죽은 어미가 찾아온 것인지 아니면 네 무의식이 만들어낸 환각인지는 네가 판단할 일이겠지. 내가 하는 말들은 결국 다 네 무의식이 생각하던 것들이야. 이미 진작에 네가 알고 있던 것들이라고. 뻔한 답을 원하는 게냐? 아니면 어떻게든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줄 허울 뿐인 조언을 원하는 게냐?”

“당신 진짜 엄마 맞아?!” 꿈 속에서도 제게 좋은 말 하나 해주지 않고 장난치듯 반 쯤 놀림 섞인 말투로 냉정하게 답변하는 레나에 울컥 화가 치솟은 엘사가 울분에 차 버럭 분노를 토해냈지만 레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꼬리만 가볍게 올리고는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네가 내 딸이라면 결국 언젠가는 다시 일어서서 답을 찾아 가게 될 거다. 그러는 과정에서 끝없이 헤매고 또 끝없이 고통받겠지만, 뭐.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이제 그만 일어나라, 딸아. 모든 일이 다 끝났다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게냐? 아직 할 일이 남아있어. 무수히 많은 일이 남아있지. 형사의 직책이 그리도 가벼워 보이더냐? 네가 선택한 길이다. 이제 어리광은 그만 부리고 일어나라. 네가 해야 할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원망스러워.” “어미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인가 싶지만, 딱히 나무라진 않으마.” 레나가 천천히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엘사가 주춤하며 한 두 걸음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아무리 꿈이라고는 하지만 눈 앞에 있는 엄마의 얼굴이 너무나 생생하여 마치 꼭 현실에 있는 것만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이건 그리움일까, 아니면 슬픔일까, 그도 아니면 애환일까. 자신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뚫어져라 쳐다보는 딸의 모습을 보며 픽 웃음 지은 레나가 엘사의 가슴팍을 가벼이 툭, 밀자 점점 육체가 하얗게 빛을 내더니 안개처럼 느리게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며 분해되는 것이 느껴졌다. 시야가 점점 뿌예지더니 화사한 태양빛을 맨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처럼 눈 앞이 점점 훤해지며 레나의 형상이 흐릿해져갔다. 이제 곧 작별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엘사는 자신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이윽고 눈 앞의 모든 것이 하이얗게 변해 잠시 후 다가올 현실을 예지하며 숨을 작게 들이쉬자 레나의 목소리가 얼핏 귓가 주변을 맴돌며 흘러들어왔다.

“굳이 이 어미의 오래된 숙원을 이어달라 말하진 않겠다. 내 일을 다 끝맺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건 무척 아쉽다만, 넌 내 딸이니 결국 나와 비슷한 길을 걷게 될 거야. 넌 나와 닮았으니까. 잘 지내거라, 엘사.”


𓍝

눈을 뜬다. 눈과 귀 사이로 머금었던 눈물이 흘러내리며 피부를 축축하게 적신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하얗게 빛나는 깨끗한 전등과 티끌 하나 없는 백색의 천장이었다. 여기가 어디인가 파악할 새도 없이 병원 특유의 알콜이 섞인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찌르고 들어오며 자신이 지금 머무르고 있는 장소가 어딘지 알려주었다. 얼마간 누워있었던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온 몸이 뻣뻣하게 굳고 근육이 경직되어 목조차 쉬이 돌리기 힘든 것으로 보아 꽤나 오랜 시간 병실에 누워지낸 것 같았다. “엘사? 엘사, 정신이 드냐?” 익숙하고 정겨운 목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들려오더니 이내 시야에 그토록 바라 마지 않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센…”

“나도 있어, 엘사. 누군지 알아보겠어?” 또 다른 반가운 목소리에 간신히 옴짝달싹도 하지 않는 목근육을 움직여 고개를 돌리자 줄리아가 정신을 차린 자신을 쳐다보며 안심한 듯 다행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진통제 때문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 아직도 꿈 속인 마냥 비몽사몽했다.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진 탓에 목이 잠겨있어 쉽사리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그나마 나온 음성도 전부 갈라져 꼭 가뭄이 찾아온 메마른 대지와도 같았다. 상태를 눈치챈 센이 행여 몸이 놀랄까봐 찬물 대신 미적지근한 물을 가져와 건네주자 줄리아의 도움을 받아 겨우 상체를 일으켜 베개에 몸을 기댄 뒤 받아마시고는 어느정도 액체로 목이 적셔지자 기운을 조금 차린 엘사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조직은 잡은 거예요?” 말로 설명하기 전에 먼저 뉴스로 보는 게 나을 거라며 센이 티비를 키려고 리모콘을 집자, 순간 주택에서 린다의 방에 갇혀 티비로 자신의 치부와 고통을 담은 영상이 적나라하게 틀어져 나왔던 것이 떠오른 엘사가 소스라치게 놀라 다급하게 온 몸으로 막으며 센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하, 하지, 하지 마요… 틀지 마요. 그러지 마요, 제발…” 전쟁 후 외상 증후군을 앓는 퇴역군인처럼 갑작스레 발작에 가까운 증세를 보이며 자신들을 만류하는 엘사의 반응에 덩달아 놀란 센과 줄리아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알겠으니 일단 진정하라고, 괜찮냐고 엘사를 다독이며 흥분과 두려움으로 인해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엘사의 흉부를 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심장이 여러개라도 되는 듯 온 몸이 사정없이 쿵쿵거리며 식은땀으로 인해 환자복이 흠뻑 젖어갔다. ‘여긴 주택이 아니야. 여긴 병실이야. 여기에는 린다도, 조직원들도 없어. 나를 해할 사람들이 없어.’ 고개를 아래로 처박고 불안정한 숨을 거칠게 내쉬며 과호흡 하던 엘사는 느릿하게 머리를 들어 여전히 자신을 걱정이 담긴 눈길로 다정하게 바라보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점점 호흡이 진정되더니 마음이 차분해지는 게 느껴졌다. 어느정도 정신을 가다듬고는 괜찮으니 이제 티비를 틀어달라고 요청하자, 잠시 불안한 눈빛으로 엘사를 바라보던 센은 네가 정확히 납치 당해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힘들어 보이는데 정말 괜찮겠냐 거듭 묻고는 엘사의 괜찮으니 어서 켜달라는 답변에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눌러 어두운 화면을 영상으로 채웠다.

화면에 뉴스가 나오자마자 보도된 소식은 그동안 추적하던 커다란 폭력 조직의 본거지에 원인 불명의 폭발과 화재가 일어나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불길과 연기를 본 주민들의 신고로 소수의 조직원 체포와 드디어 범죄 집단의 근거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화재 원인은 불명이며 현재 감식반을 파견해 알아내고 있다는 말을 덧붙이며, 먼저 구속한 조직원들로부터 심문과 자백을 통해 해외나 국내의 다른 지역으로 도피한 다른 조직원들도 추적하고 있으며 곧 우두머리의 소재도 밝혀질 거라는 말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외딴 시골에서 일어나긴 했지만 워낙 큰 화재인 만큼 경찰 내부에서 수사 후 종결시키지 않고 대대적인 보도를 할 생각인 것 같았다.
화면 너머로 생중계되는 이제는 완전히 불길이 진압되었지만 다 타버려 뼈대만 간신히 남은 한 때는 자신이 갇혀지냈던 장소인 주택을 보며 불현듯 머릿속에 영상이 담긴 파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1층만 집어삼켰던 화마가 나중에는 저택을 넘어 정원까지 집어삼키고 그걸로도 모자라 주변 인근의 산조차도 모두 태워버렸는지 검게 그을려 문명이나 야생의 흔적은 찾을 수조차 없었다. ‘아, 그럼 그 영상들도 전부 지워졌겠구나…’ 멍하니 잿더미가 되어버린 현장을 송출하는 화면을 바라보며 엘사는 자기도 모르게 또 다시 눈물을 주륵 흘리며 티비를 응시했다. 갑작스런 엘사의 눈물에 함께 뉴스를 보던 센과 줄리아가 당황하며 휴지를 가져다주자 뒤늦게 밀려오는 온갖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의 무게에 짓눌리며 말없이 누액이 줄줄 흘러나왔다.

어떻게 해야하나 가만 쳐다보던 센이 먼저 팔을 뻗어 자신을 끌어안자 곧 줄리아도 몸을 숙여 따라 끌어안았다. “많이 힘들었지? 고생 많았다. 이제 괜찮아, 그러니까 안심해도 돼.” 위로에는 영 소질이 없는 편이었지만 서툴게나마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루달래는 센의 손길에 울컥 감정이 솟아오르는 걸 깨달은 엘사는 결국 소리내어 흐느끼기 시작했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쏟아져 나오는 울음에 마치 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며 자신을 껴안고 보듬어주는 둘에게 파고들자 그들은 말없이 엘사를 더 꽈악 껴안으며 계속 괜찮다고 되뇌며 온통 멍들고 상처투성이인 어린 아이를 위로해주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따뜻한 체온이었다.

𓍝

얼마나 울었을까, 온 몸에 수분을 다 배출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울음을 쏟아낸 엘사가 퉁퉁 부은 얼굴로 훌쩍이며 마음을 추스리자 진통제의 효력이 떨어진 건지 그제서야 온 몸에 느껴지는 통증에 신음을 흘렸다. “지금 이미 마약성 진통제를 사용하고 있어 여기서 더 사용했다가는 위험할 거야.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통증을 견뎌야 해.” 줄리아의 그 말을 듣자 린다가 자신에게 주입했던 정체불명의 약들이 떠올랐다. 혈액검사를 했을 때 그 약물의 성분이 발견되어 만약 누명을 쓰게 되면 어떡하지 하는 고민이 있었는데, 혹시 이 진통제 성분으로 어찌저찌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자 줄리아가 이어 말을 내뱉었다.
“지금 세라가 사방팔방으로 뛰며 증거를 모으고 있어. 네가 또 다시 같은 조직에게 납치 당했다는 사실을 토대로 그동안 아몬 조직과 관련된 일에는 소홀히 수사하며 일부러 범죄를 은닉하고 눈 감아준 동조자가 있다는 증거를 드디어 일부나마 잡아내기 시작했대. 다만 어디까지 관계된 건지는 아직 모르겠어. 어쩌면 고위 간부들까지 연루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길고 힘든 싸움이 될지도 몰라. 그렇지만 다들 내부에 숨은 부패경찰을 완전히 찾아내 뿌리 뽑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고 있는 중이니, 이제 안심해도 돼.”

그 말을 듣자 엘사는 본능적으로 레나를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모든 일의 근원이자 시작이었던 사람. 그토록 존경과 칭송을 받던 형사이자 동시에 자신의 신념을 위해 범죄자들과 결탁했던 사람. 자신의 어미의 명예에 어떠한 흠집이나 불명예가 생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또한 응당 치뤄야 할 죗값이고 업보이겠지. 이미 떠나간 사람이니 구속이나 처벌을 받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곳에서나마 최소한의 속죄를 하길 바라며 엘사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떴다. 제 어머니의 죄가 질척하게 흘러 자신에게까지 타고 넘어왔고 그 결과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았다. 이제 더 이상 과보가 사방으로 퍼져나가지 않도록 막아야만 했다. 오래전 레나가 멋대로 저지르고 결국 끝맺지 못했던 일을 제 손으로 끝낼 때가 되었다.

“고마워, 줄리아. 내 멋대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적극적으로 도와줘서… 너 아니었으면 지금쯤 난 여기에 없었을 거야.” “그런 무서운 말 하지 말고, 알았으면 앞으로는 몸 좀 사려. 이번에는 정말 너 어떻게 된 줄 알고 무서웠단 말이야.” 줄리아가 질색하며 꾸짖자 죄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반 쯤 숙인 엘사가 연신 수긍의 의미로 머리를 위아래로 까닥거리며 알겠다고 답했다.

“권고사직은 철회되었지만 중징계는 여전해. 워낙 그동안 저지른 일이 많았으니까… 다만 나중에 사유를 듣고 어느정도 참작될 가능성이 높으니 일단 당분간은 회복에 전념해야 해.” “그래. 몸 좀 사리고 다녀라, 임마. 이게 다 뭐냐?” 으름장을 놓으면서도 거친 말투 안에 애정이 가득 담긴 센의 목소리에 엘사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일부러 툴툴거리면서 자신을 꾸중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꼭 집에 돌아온 것만 같았다. 한 때는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제 눈 앞에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센이 알려준 것들 덕분에 살았어요. 고마워요, 센. 그게 없었다면 전 진작에 죽었을 거예요.” 엘사의 진심어린 감사에 뭐라 더 나무라다가 멈칫하고는 한숨을 내뱉곤 행여 아플새라 가벼이 등을 툭 치고는 말했다.

“고생 많았다. 진짜 고생은 이제 시작이지만.”
“복직을 환영해, 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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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간의 시간이 지나고 재활치료도 슬슬 끝나갈 무렵 줄리아로부터 어떠한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부두목이 잡혔다는 소식이었다. 우두머리는 아직 신원이 파악되지 않아 행방불명이지만 그 바로 밑에 대장은 잡았다는 연락을 듣는 순간, 엘사는 가슴이 철렁이며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고 언젠가는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을 텐데 왜 이리 마음이 불편한 걸까. 워낙 큰 규모의 조직인데다 여러 사건들이 얽힌 흉악 범죄인 만큼 관련된 범죄자들은 전부 얼굴을 공개하기로 결정이 나면서 뉴스나 신문에서는 조직원들이 검거될 때마다 대서특필하며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사진을 크게 실어댔다. 엘사로부터 부두목이 검거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센이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이나 보자며 뉴스를 틀자 어릴 적 동네에서 보았던 꼬맹이의 얼굴이 나와 잠시 믿을 수 없어 눈을 두어 번 껌벅이며 엘사를 쳐다보았다.

별 다른 부정없이 묵묵히 괴로운 표정을 한 채 침묵으로 일관하는 엘사를 보곤 설마, 하던 센은 이윽고 진상을 알아차리곤 착잡해진 기분을 느끼며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되냐.” 엘사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센도 더 이상 무어라 말을 얹지 않은 채 조용히 연기를 내뱉으며 담배를 피워댔다. 한 개비가 다 타올라 잿가루가 탁자 위로 떨어져 새 담배를 꺼내면서도 둘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매캐한 연기만이 둘의 말소리를 대신 하듯 적막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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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르긴 하지만 퇴원해도 좋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짐을 챙기고 병원 밖으로 빠져나온 엘사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교도소였다. 어느정도 재활치료가 진행되면서 퇴원까지는 힘들지만 다른 장소를 잠깐 오가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는 의사의 진단을 들은 후 몇 개월 동안은 참고인이자 증인으로 온갖 곳에서 증언하고 인터뷰하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아직 병실에서 얼마간은 더 머물러야 하지만 사건 파일 작성하는 것 정도는 사무실이 아니어도 할 수 있다며 섣부르게 복직하고는 밤낮의 구분없이 사건을 정리하고, 증언하고, 기사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증거를 찾고, 치료하고, 재활운동을 병행하며 살아오면서 도저히 교도소로 찾아갈 시간이 나지 않아 이제서야 갈 수 있게 된 거였다.

서류를 뒤적거리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집중하던 교도관이 누군가 머리맡에 서서 유리문을 똑똑 두드리자 그제서야 눈치챈 건지 고개를 퍼뜩 들고는 인사를 하며 누구를 면회오셨냐 물었다. “린다 메사이야. 여기 있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흉악범이라 함부로 만나뵐 수 없다며 말리는 교도관에게 뒤늦게 형사 수첩을 꺼내들어 신분증을 보여주자 무전기를 들어 누군가에게 연락하여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 싶더니 따라오시라며 엘사를 이끌고 구석진 곳에 마련되어 있는 엘레베이터로 향했다. 흉악범이라. 저지른 죄가 워낙 많으니 당연한 처사지만 그래도 입안이 씁쓸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과거에는 자신이 감금되어 있었고 자유로운 것은 상대였지만 지금은 정반대의 입장이라는 사실이 어쩐지 우습기도 하고 허탈하게도 느껴졌다.

“여기입니다. 지금부터 수감자와 서로 나누는 대화는 모두 녹음되며, 유사 시에는 간수가 중간에 난입하여 제지하거나 중지시킬 수 있으며 또한 외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니 유의 바랍니다.” 알겠다고 짤막하게 답하고는 일대일의 개인 면회실로 들어가자 작은 방 한가운데에 배치된 책상 위로 투명한 가림막이 세워져 있었으며 그 너머로는 주황색의 낯선 죄수복을 입고 있는 소꿉친구가 의자에 앉아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린다의 뒤에는 교도관이 구석에 서서 자신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혹시 모를 돌발사태에 언제든지 대응하기 위해 눈을 부릅 뜬 채 경계하며 바라보았다. 자신이 위치한 방과 가림막 너머 방을 이어주는 유일한 의사소통 기구인 전화기를 집어들자 린다가 따라 집고는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이제 만족해? 네 어머니가 나를 지옥에 몰아넣었는데, 너는 기어코 나를 이 교도소로 몰아넣는구나. 그 어머니에 그 딸 아니랄까봐.” 분노와 기롱 섞인 말투로 엘사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며 빈정거리자 조용히 비웃음을 듣던 엘사가 말했다.

“거기서는 그래도 좀 나아보이네. 너 조직에서 일할 때는 정말 불행해보였어.”

그 말에 잠시 굳어 가만히 엘사를 쳐다보던 린다가 웃음기를 싹 지우고는 정색하며 으르렁거리면서 말했다. “날 동정하지마. 네가 감히, 나를 어떻게 동정해? 그럴 거면 잡아들이지 말았어야지.” 마지막에 입꼬리를 한껏 비틀며 기가 찬다는 듯 조롱하며 한숨 섞인 웃음을 내뱉자 여전히 차분한 표정으로 마주 바라보던 엘사가 말을 이었다. “나는 몇 번이고 너를 여기에 잡아넣었을 거야. 그게 옳은 일이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눈 앞에 커다란 굉음과 함께 무언의 살덩어리가 들이밀어졌다가 투명한 가림막에 의해 가로막혀졌다. 난데없이 주먹에 부딪힌 가림막이 웅웅거리며 대신 아픔을 토해내듯 사방으로 떨렸다. 바로 눈 앞에 주먹이 날라왔지만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엘사에 린다가 인상을 찡그리며 애꿎은 가림막에 다시 주먹질을 하려는 순간, 뒤에서 교도관이 다가와 어깨를 붙잡으며 제지하자 작은 욕짓거리를 내뱉으며 자세를 바로 잡고는 여전히 성이 나 씩씩거리는 눈길로 엘사를 노려보며 우짖었다. “내가 잡혔다고 끝인 줄 알아? 우두머리는 잡히지 않았고 아직도 곳곳에 여전히 많은 조직원들이 남아있어. 너희들이 정말 전부 다 잡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해? 결국 난 여길 빠져나갈 거고, 넌 후회하게 될 거야.”

저주와 원망 섞인 말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가만히 받아내며 듣고 있던 엘사가 잠시 린다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뭐든 지켜봐야 알겠지. 간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문을 향해 뒤돌아 나가려던 엘사가 문득 까먹었다가 생각났다는 듯 다시 도로 몸을 돌리고는 이어 인사를 건넸다.

“종종 찾아올게. 잘 지내.”
“엘사 브라이언트!!!!!!!”

금수에 가까운 울부짖음이 뒤에서 들려왔지만 엘사는 더 이상 뒤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문을 열고는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증오하고 염오하는 온갖 삿된 말들이 뒷편으로부터 계속 들려왔지만 앞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흐릿해지다 곧 들리지 않게 되었다. 간수에게 머리를 조금 숙여 인사하고는 교도소 밖으로 빠져나가자 어둡고 텁텁한 공기 대신 광활하고 티없이 맑은 공기가 목을 타고 들어와 폐를 구석구석 가득 채웠다. 아직도 온갖 사건의 여파가 남아 욱신거리는 몸을 애써 무시하곤 살짝 절으며 자신의 소꿉친구가 갇힌 건물로부터 떠나다가 잠깐 걸음을 멈춘 엘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따금씩 흰 구름이 커다란 대양과 같은 푸른 빛의 하늘을 표류하며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다.


너와 같이 이 하늘을 올려다 봤으면 좋았을 텐데.

이마에 남은 흉터를 만지작거리며 엘사는 다시 하늘로부터 고개를 돌리곤 앞으로 걸어갔다.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