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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클라이맥스에 돌입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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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세상에서 일어나는 거의 대부분의 일들을 정확하게 예측하기란 불가능하기 마련이다. 통제를 벗어나고, 계획에 어긋나고, 작은 사건 하나만으로도 변수가 일어나고, 시도때도 없이 관측이 불허한 온갖 미지수의 일들이 비바람을 동반하여 사납게 몰아치는 폭풍처럼 거세게 밀려오는 것이 세상살이 아닌가. 맹렬하고 위압적인 파도가 선박을 덮쳐올 때 보여야 하는 행동은 넓고 거친 물결을 일으키며 스산하게 다가오는 격파로부터 멀리 벗어나는 게 아니라 부글부글 흰거품을 일으키며 배를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음산하고 푸른 거인의 몸뚱아리를 향해 돌진해야 한다. 파도가 더 높아지기 전에, 그 거대한 아가리를 쩍 벌려 겁을 먹어 덜덜 떠는 지성을 가진 생물체와 차갑게 식혀진 덩치 큰 금속 덩어리를 완전히 삼켜버리기 전에 과감히 매섭게 일렁이는 퍼런 너울을 타고 파도를 건너야 한다. 그래야지만 성난 폭풍과 잔뜩 노하여 요동치는 놀을 넘어 비로소 잔잔하고 고요한 수면 위로 발을 올려 안도감과 평화로움에 안착할 수 있을 테니까.
엘사에게는 자신에게 벌어진 모든 일이 그러했다. 더 이상 사나운 물살에 두려움을 느끼곤 움츠려든 채 가만히 숨죽여 떨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자신을 핍박하고 강압적으로 지배하려 드는 부르튼 파도를 피하기 위해서는 거듭 상처 받고 멍울이 진 생채기 투성이의 무거운 몸을 억지로라도 비척비척 이끌고 어두컴컴하고 시퍼런 세계를 감추고 있는 물낯 위로 몸을 던져야만 했다. 끝끝내 파도에 집어삼켜져 영원히 저 바닥 아래로 가라앉을지, 아니면 뭍으로 기어올라와 제 발로 까슬까슬하고 건조한 흙바닥을 밟으며 그 위에 서서 축축하고 생명의 활기가 가득찬 풀내음을 다시 맡을 수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알 수 있는 건 결과를 보기 위해서는 오직 저 넓고 광활한 해원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아직도 작게 물결을 보내며 일렁이는 너른 바다를 바라보며, 엘사는 곧 들이닥칠 파도를 예감하며 기꺼이 육체를 내던지기로 선택했다. 수면에 부딪히면 조금 아프겠지만 고통은 일시적일 뿐이다. 사정없이 온 몸을 옥죄는 물 아래에서는 그 어떤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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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우두머리라는 직책 때문인지 본인 소유의 자가인데도 불구하고 린다가 저택에 머무르는 날보다 집을 비우는 날이 역으로 달력을 가득 채워갔다. 어쩌면 이제는 그토록 바라던 자신의 소꿉친구가 영원히 제 손에 떨어졌다는 안도감에 한결 마음을 비우고는 가볍게 집을 떠나고 돌아왔던 걸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더 이상 예전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겁 없고 치기 어린 형사의 동태를 시종일관 살펴보며 어떠한 일이 생길 때마다 아래로부터 사사건건 보고 받을 필요없이 이제는 방 구석에 배치된 감시 카메라를 살펴보면 그만이었으니까.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에 대한 보상이라는 듯이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연인이 방 안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한 나날이 반복되면서 린다의 마음은 조금씩 풀어지며 헤이해졌고 별 다른 반항없이 고분고분 순종하는 엘사의 태도는 린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도록 속도에 박차를 가하는데 충분했다.
“이번에는 내일 저녁 쯤 돌아올 거야. 가능하면 너와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잘 안 되네. 미안해. 그렇지만 내일은 오붓하게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을 테니, 너무 서운해하지 말고 기다려줘.” 침대에 앉아 텅 빈 눈으로 시선은 잔뜩 구겨지고 헝클어진 이불을 향한 채 자신의 말을 묵묵히 듣는 엘사를 바라보던 린다가 가볍게 볼에다 입을 맞추고는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곁눈질로 린다의 뒷모습을 흘깃 살피다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완전히 잠기는 소리까지 들리고 나서야 몸을 침대로부터 일으킨 엘사가 조용히 살금살금 까치발을 들어 문 바로 앞까지 슬며시 다가가고는 외부로부터 어떠한 소리가 나거나 기척이 느껴지지는 않는지 가만 살폈다. 저 멀리 구두굽이 바닥과 부딪히며 나는 발걸음 소리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작아지더니 곧 희미해지며 조용해졌다. 잠깐 고개를 들어 감시 카메라를 쳐다보던 엘사가 손잡이를 잡고는 천천히 아래로 꺾어 기본적인 잠금장치를 풀고는 몸으로 밀며 문을 열었다.
끼이익 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졌으나 그 누구도 신경쓰는 듯 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들려온 소음에 몇 몇이 몸을 돌려 바라보기는 했으나 곧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는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며 영문 모를 잡담을 이어갈 뿐이었다. 자신과 눈이 마주친 한 조직원이 명백히 조롱 가득한 휘파람을 보내며 이리 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애써 무시하며 카페트가 깔린 복도를 맨발로 걸어가자 웃음소리가 조금 섞인 성적인 말이 다분한 욕짓거리가 뒷편에서 들려왔다. 집단으로 자신을 강제로 범한 조직원들을 일부러 저택에 배치시킨 린다의 악취미에 방을 나설 때마다 가해자들과 마주치게 된 엘사는 그 때마다 자극되는 트라우마와 스트레스에 자꾸만 골이 지끈거리며 호흡이 거칠어지는 걸 느꼈다. 처음으로 린다 없이 복도를 나와 홀로 범인들과 맞닥뜨렸을 때는 반사적으로 영상 속 일이 떠올라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공포심을 억지로 꾹꾹 누르며 혹시 모를 폭력에 방어하기 위해 잔뜩 경계하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치며 노려보자, 조직원들은 저들끼리 낄낄거리며 한달음에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두 손을 높이 번쩍 들어 왁, 하고 놀래키고는 패닉하여 바닥에 뒤로 엎어져 덜덜 떨리는 팔로 간신히 엉금엉금 역행하며 기어가던 엘사를 내려다보며 실컷 비웃더니 이내 곧 뒤돌아서 제 할 일을 하러 그대로 가버린 적이 있었다. 그 뒤로도 몇 번 비슷한 위협이 있었지만 린다로부터 하달된 명령이 있던 건지 다행히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루 말할 수 없는 치욕스럽고 불쾌한 감정에 엘사는 그저 이만 악물고는 악착같이 저택을 빠져나갈 그 날만을 고대하며 아득바득 몇 번이고 육중하고 무거운 문을 밀어 복도로 나갔다.
아무리 거대한 공포심이 벽처럼 단단히 서 꿈쩍없이 가로막고 있다 한들 영원토록 이렇게 지낼 순 없었다. 끊임없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공간과 사람들로부터 부딪히고 싸워내며 나아가야만 했다.
처음에 이 저택에 끌려오고 몇 개월 간은 잦은 반항과 탈출 시도로 인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삼엄해진 경비들 때문에 린다가 없을 때는 감히 문을 열고 당당히 복도를 거닐 엄두조차 못 냈지만 꽤나 지순하고 고분고분해진 지금은 이제 체념했다고 생각한 건지 예전처럼 빈틈없이 구석구석 조직원들을 채워넣지 않고 꽤나 듬성듬성 배치시켜 놓아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한 때는 방 밖으로조차 나서지 못 하게 문을 잠그는 것도 모자라 침대 헤드보드에 길게 개조한 수갑까지 채워 행동 반경을 극도로 최소화시켜 억제했지만 회사로부터 사실상 해임 당했다는 연락을 받은 이유로는 급속도로 얌전해지고 직수굿해진 엘사의 반응을 보고 어느정도는 풀어주어도 괜찮으리라 판단한 건지 저택 안을 한정해서는 돌아다녀도 괜찮다는 허락이 내려와 덕분에 린다가 집을 비운 사이에도 제한된 자유를 허가 받을 수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완전한 자유란 존재할 수 없었다. 방 밖을 벗어난다 하더라도 복도 곳곳에 수놓여진 감시 카메라들은 어느 시간대더라도 개의치 않고 눈을 번뜩이며 호시탐탐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체 몇 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에 그저 골치 아픈 의심만 속에 품고는 막연하게 언젠가 알아낼 방법이 있겠지 하는 작은 희망만 품을 수 밖에 없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본인이 아는 린다라면 제아무리 많은 감시 카메라를 설치해놨다한들 그 영상을 볼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이 유일하도록 손을 써 놓을 터였다. 경계심 많고 타인을 믿지 않는 사람이 남에게 함부로 실시간으로 자신의 집을 비추는 감시 카메라 영상을 볼 수 있는 권한을 줄 리가 만무했다. 혹시나 일어날 수 있는 도주나 반란을 그때그때 방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저택의 내외부에 사람을 세워놓긴 하겠지만 카메라만은 절대 공유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마 개인 핸드폰과 연결하여 자신이 내부든 외부에 있든, 낮이든 밤이든 시간대를 불문하고 어느 때든 집 안을 살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겠지.’ 하지만 그렇다한들 이 많은 카메라들을 관리하려면 별도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하다못해 여러 대의 감시 카메라를 한데 이을 본체를 둘 공간이 있기 마련이었다. 린다의 감시가 소홀해진 이래 꽤나 여러번 방 밖을 들락날락거리며 저택 안을 수색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CCTV실이 따로 보이지가 않았다. 만손 경계가 널널해졌다 한들 대놓고 이곳저곳 찔러대며 찾아다니다간 의심을 사 자칫하다간 처음처럼 도로 갇힐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기껏 얻은 반만 채워진 불완전한 신뢰를 제 손으로 무너뜨려 다시 철창에 가둬질 수는 없었다. 그 안에서 지금껏 당한 수모와 강압적인 겁탈이 동반된 폭력을 생각하면 반사적으로 식은땀이 축축히 등허리를 적시며 싸늘하게 몸을 식혔고 두려움과 위구심이 끈적거리며 근육이 경직되도록 마비시켰다.
애써 그릇된 생각을 떨쳐내려 몸부림치며 엘사는 당장 눈 앞에 놓인 과제를 해결하는데에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무엇보다 린다가 지금 이 순간에도 카메라를 통해 자신의 형편을 살피고 있을지 아니면 보지 않고 있을지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자 장애물이었다. 홀로 24시간 내내 지켜볼 수는 없겠지만 언제 어느 순간에 자기를 바라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건 불안감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한 요소였다.
아무리 자신이 체념한 것처럼 보여 어느정도 마음을 놓고 경비 인력을 줄였다 한들 린다가 완전히 본인을 신뢰하고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분명코 어느정도는 여전히 탈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으리란 작은 의심 하나는 마음 한구석에 박아두고 있을 터였다. 최대한 수상한 거동은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말 그대로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해 집 안을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오가며 이곳저곳을 거닐던 엘사는 더 이상 안 가본 곳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1층 복도 한 가운데에 마련된 천장 높이 걸린 커다랗고 오래되어 보이는 고동색의 나무로 이루어진 괘종 시계 밑에 놓여진 몬스테라 화분 뒤로 희미한 직사각형 모양의 선이 언뜻 보이는 것을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화재를 대비해 소화선을 보관하는 장소가 아닌가 싶었지만 그러한 재난 도구를 저렇게 숨겨놓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대놓고 가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확연히 눈에 들어오지도 않도록 숨기려는 의도가 있다는 점으로 보아 무언가를 안에 간직한 것은 분명했다.
숨겨진 문을 발견하자 그제서야 군데군데 이상한 점들이 속속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이사이에 회색의 점과 선들이 박혀 불규칙성을 심어주지만 전체적으로는 하이얀 흰 색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다른 층의 벽들과는 다르게 이따금씩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살아온 세월을 보여주듯 연식이 느껴지는 괘종 시계가 걸린 1층의 벽 한 곳 만은 단단하고 차가운 대리석이 아닌 비교적 푹신한 벽지가 넓게 붙여져 있었다. 지금보니 이렇게 확연한 차별점을 왜 이제서야 눈치챘는지 이해가 불가할 지경이었다. 잠깐 주변 눈치를 보다 조직원들이 자기들끼리 떠드느라 여념이 없는 걸 확인한 엘사는 힘을 주어 화분을 살짝 옆으로 치운 뒤 두텁게 덧대여져 발린 연한 노란색의 벽지 사이로 미세하게 음푹 들어간 틈을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눌러대며 문을 열 방도를 찾아헤맸다. 조바심을 느끼며 이곳저곳을 계속 만지작거리자 바닥에서 1M 쯤 떨어진 곳에서 무언가 동그란 홈이 움푹 파인 것이 느껴졌다. 가만 살펴보니 또 그 부분만 여러 장의 벽지를 덧붙인 것처럼 색이 다른 게 보여 잠시 망설이며 머뭇거리다 천천히 뜯어보니 감춰두었던 작은 원형의 손잡이와 함부로 문을 열지 못하도록 방비해놓은 자물쇠가 드러났다.
열쇠는 어디 있지? 중간중간 카메라를 흘겨보던 엘사가 마치 숨겨진 문이 아닌 화분을 관찰하고 있었던 것처럼 잎사귀를 손으로 쓸어내리는 둥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흉내내며 초조함을 숨긴 채 애써 나긋하게 발걸음을 옆에 조금 떨어진 부엌으로 옮겼다. 여러 식기류와 재료들을 눈으로 가만 살펴보고 있자니 핑거 푸드와 같은 요리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고정할 때 사용하는 작은 소형 포크가 보였다. 배고파서 내려왔다고 하면 대강 넘어가려나. 식탁 위에 놓인 사과를 집어드는 척 하며 포크를 손목 안 쪽으로 숨기고는 과일을 한 입 베어물자 달큰하고 인위적이지 않은 기분 좋은 단 맛과 향내가 코를 간지럽히며 자극했다. 대충 씹어넘기고는 탁자 위에 깨물려져 허연 속살이 드러난 사과를 도로 올려놓고는 다시 화분 쪽으로 걸어간 엘사는 카메라를 향해 등지고는 자신이 손을 놀려 무언가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가린 채 신중하게 자물쇠를 만지작거렸다.
압수수색을 할 때 서랍이나 문이 항상 활짝 열려있지만은 않았으므로 간단한 잠금을 해제하는 것 정도는 알아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도 유용할 줄이야. 사실 웬만해서는 공권력이 개입한 상황에선 아무리 단단하게 쇠사슬로 꽁꽁 묶인 문이라도 배급된 절단기로 하나하나 끊어내기만 하면 되었기에 굳이 이렇게 공들여가며 몰래 자르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자신은 더 이상 경찰이 아니었고 그에 따른 지원조차 당연히 없었으며 범죄 조직에 납치된 무력한 인질에 불과했다. 핀셋이나 포크 같은 주변에 널린 도구를 이용해 자물쇠를 따는 것 또한 과거에 센이 알려준 방법이었다. ‘뭐라고 했더라, 언젠가 요긴하게 써먹을 날이 올 거라고 하면서 가르쳐줬었지.’ 어른들 말씀은 잘 들어야 한다더니 이래서였나. 나도 어른이긴 하지만. 문득 오랜만에 떠오른 센의 표정과 목소리에 간만에 피식 웃음을 지으며 열심히 끙끙대며 손을 놀리자 드디어 작게 철컥하며 잠금이 해지되는 소리가 들렸다. 서로 단단히 엮여있던 이음새가 풀리자 자물쇠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조심스레 받아쥔 엘사는 마지막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직원들의 행태를 살피곤 소리없이 문을 당겨 열고는 여지껏 은폐되어 있던 내부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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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위태롭게 깜박거리며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을 유일하게 비추는 낡은 전등이었다. 불안정하게 두어 번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는 전등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계단이 보였다. 어둑어둑하고 꿉꿉하며 마치 이곳에만 비가 내린 듯 습하고 곰팡이 냄새가 가득한 계단을 걸어내려가고 있자니 마치 지옥의 심연에 마련된 구덩이로 제 발로 기어들어가고 있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이미 자신은 지옥 속에 존재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보다 더 밑바닥에 존재하는 세상이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랫쪽으로 향할수록 저 멀리 윗천장에 달려있던 전등과 거리가 벌어지며 빛이 닿는 범위가 작아지고 그림자가 점점 커져올 때마다 또 다른 허름한 전등이 모습을 드러내며 아무리 이렇게 어두컴컴하고 구렁 속에 존재하는 장소일지라도 어떻게든 빛은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듯 했다.
이 계단의 끝은 어디일까, 마지막에는 무엇이 있을까 긴장하며 비좁고 협소한 공간을 사정없이 부딪히며 제게 다시 들려오는 자신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하염없이 내려가던 찰나 마침내 여태껏 이 공간에서 보아온 빛 중 가장 밝은 광명이 저 아래서 비추어오기 시작했다. 살짝 화색이 띤 얼굴로 서둘러 내려가자 좁은 복도와는 확연하게 다른 넓은 공간이 눈 앞에 드러났다. 마치 자신이 서에서 일했을 때 보았던 것만 같은 취조실 엇비슷하게 생긴 공간이 이 어두운 외딴 지하 아래 마련되어 있었다. 다만 어지럽게 널부러진 의자와 오래되어 굳어버린 채 책상에 말라붙어 검게 변색된 핏자국을 보아하니 흔히 서에서 사용하는 것처럼 누군가를 심문하거나 자백하는 용도로 개설된 건 맞으나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 것이 공공연해보였다. ‘불법 취조실이라니, 린다도 여길 사용한 적 있을까.’ 어쩐지 입 안이 텁텁해지는 걸 느끼며 지하실을 살펴보던 엘사는 방 건너편에 또 하나의 문이 있는 걸 보고는 지하에도 다른 층처럼 방이 몇 개나 이루어져 있는 건 아니겠지 하는 고민을 하며 다음 방으로 건너갔다.
내가 이 지하실로 내려오고 나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아무리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한들 오랜 시간 사라지면 분명히 찾으려 들 터였다. 손목 시계도 없으니 정확한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어 오직 자신의 감 만을 믿으며 대강 이 정도 지났겠거니 어림짐작해야 했다. 최대한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정보를 머릿속에 쑤셔넣고 나가야만 했다. 빠르게 발을 옮기며 다음 방으로 들어선 엘사의 눈에 나타난 것은 자동차 휘발유 등을 담은 기름통 여러개와 인화성 물질을 담았으니 조심하라는 경고 표시가 그려져 있는 드럼통들이었다. 어쩌면 쓸모가 있을 지도 몰라. 그 옆에 마련된 이제껏 본 지하실 중에서 제일 넓고 커다란 방에는 저택 곳곳에 달린 감시 카메라의 영상을 24시간 내내 끊임없이 틀어주는 CCTV실이 있었고, 그곳에는 아니나 다를까 조직원 한 명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나중에 도움이 되겠지 싶어 잠시간 우두커니 서서 여러 각진 모니터들이 다닥다닥 붙어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화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예상외의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긴 내… 방이고, 저긴 2층 복도. 저긴 마당인가? 야외에도 연결되어 있나 보네. 예상외로 지하실에는 설치를 안 했구나. 잠깐, 어?” 오른쪽 구석 하단에 놓인 모니터 화면에 불현듯 이상한 것이 보여 다급히 가까이 다가가 키보드를 만지작거리며 카메라를 이리저리 돌리자 그제서야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저택 주변을 넓게 감싼 채 하늘로 높게 펼쳐져 철옹 같이 느껴지던 철창에 미세하지만 분명 작은 틈이 있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주변에 자란 나무와 풀의 높이로 짐작해보니 성인 한 명 정도는 몸을 구기면 기어서 나갈 수 있을 정도 크기의 개구멍이었다. 철창 틈새로 군데군데 동물의 것으로 보이는 누렇고 어두운 색의 터럭들이 삐죽 꽂혀있는 것으로 보아 짐승들이 이따금씩 드나드는 들길인 것 같았다. 건물 뒷편 같은 워낙 외진 곳에 생기기도 했고 구멍 주위로 잡풀들이 잔뜩 돋아나 철창에 문제가 생긴 것을 아직까지 아무도 발견하지 못 한 모양이었다.
언제 또 이 지하실로 내려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마음에 주변 철창의 모양과 풀쪼가리 하나하나 눈으로 샅샅이 뜯어보며 머릿속에 깊이 각인시킨 뒤 혹여나 린다가 알아채지 못 하도록 카메라 위치를 다시 돌려놓고는 방을 벗어나려는 순간 책상 옆에 놓인 커다란 기계의 존재를 보고 흠칫 놀란 엘사가 쿵쿵거리는 심장을 손으로 차분히 쓸어내리며 가끔씩 구르렁 소리를 내며 몸을 세차게 뒤흔드는 기계를 내려다봤다. 감시 카메라에 정신이 팔려 눈치채지 못 했나. 이건 무슨 기계지? 얼핏 봐서는 동력원 같아 보였으나 무엇의 동력원인지 도통 알아챌 수가 없어 이리저리 뜯어보던 순간, 엘사의 머릿속에 무언가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자가 발전기구나. ‘그래, 주유소도 없고 전기도 잘 안 들어올 외진 산골에서 지내려면 당연히 그만한 물품이 마련되어 있겠지.’ 이 만한 크기의 발전기라면 저택을 가동하는데에 큰 어려움이 없을 터다. 그 옆에 보조용 비상 발전기가 벽에 바짝 붙어 배치된 것이 보였지만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은 것인지 먼지가 잔뜩 늘러붙어 과연 가동이 되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어찌되었건 지금 현재 사용하고 있는 건 이 시끄럽게 웅웅거리며 위압적으로 덜덜거리는 덩치 큰 발전기가 유일했다.
그렇다는 건, 이것만 잘 이용하면 저택을 통째로 정전시킬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빠져나갈 기회를 제공할지도 모른다. 다만 문제점은 어떻게 조작하냐는 거였다. 기계에 대해 그다지 일가견이 없는 엘사로서는 무작정 아무 버튼이나 눌러대며 함부로 조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있는 힘껏 두드려보는 건 어떨까도 잠시 생각해봤지만 스스로 가동하며 전력을 생성하는 기계에 외부에서 큰 충격이 가해지면 어떻게 될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기계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도 강한 충격에 장시간 노출된다면 불시에 폭발하여 자신이 불길에 휘말릴 확률이 있다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었다.
또 다시 문턱에 가로막히자 한숨을 후 내쉬며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고는 앞머리를 실컷 흐트러뜨리며 어지럽게 머리칼을 헝클인 엘사는 이제 나가야하는 때가 왔음을 예지하고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다시 계단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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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보니 생각보다 계단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일부러 실내를 어둡게 만들고 전등을 교체하지 않는 건 취조실로 끌고갈 피해자에게 심리적으로 압박감을 주고 긴장감을 느끼게 만들어 도망갈 의지를 꺾고 이 지하실이 하염없이 깊은 공간이라고 생각하게 하기 위함이었나. 참 악에 받친 생각이다 싶어 진저리를 치면서 화분을 도로 제자리에 가져다놓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면서 엘사는 지금까지 얻은 정보들을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정리했다. 숨겨진 지하실, 수 많은 기름통들, 감시 카메라에 비친 개구멍, 커다란 자가 발전기… 어찌되었건 도주로를 알게 된 이상 탈출이 전보다 한 층 가까워졌다는 건 확실한 사실이었다. 그냥 개구멍을 향해 공중대고 뛰어볼까도 생각해봤지만 철창에 도달하기도 전에 사방에서 뛰어오는 조직원들에게 분명 먼저 붙잡힐 게 틀림없었다. 아무리 인력이 줄었다 한들 여전히 자신은 혼자였고 상대는 다수였다. 시선을 한데모아 돌릴 곳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그 순간 머릿속에 어떠한 생각이 스쳐지나갔으나, 막상 실현하기에는 커다란 위험과 불안을 감수해야만 했다. 또한 어느정도의 운도 따라야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러한 생활을 지속할 수도 없었다. 방에 도착한 엘사는 문을 열고 들어와 침대에 풀썩 눕고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생각할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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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거짓말에는 동티가 난 엘사라도 다년간의 형사 생활로 연기에는 어느정도 자신이 있었다. 잠입수사를 하면서 가해자와 범죄자들과 뒤섞여 그들에게서 호의를 얻고 경계심을 풀어야 했기에 반억지로 습득한 기술이었다. 아무리 길을 찾아냈다해도 곧바로 실행할 수 없는 만큼 당분간은 린다의 동태를 계속 살펴야만 했다. 물론 린다 또한 엘사의 그러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 할 리가 없었다. 자신의 소꿉친구가 자기 눈치를 살피며 무언가 파악하려 든다는 느낌이 얼핏 들었지만 답지 않게 그저 기우일 뿐이라고 넘기려 들었다. 엘사가 이상해졌다는 느낌이 자꾸만 자신을 찌르며 어서 진상을 알아내라 부추겼지만 여전히 제 앞에서는 텅 빈 눈을 한 채 무슨 짓을 하든 순응하며 받아들이고 제 품을 파고드는 엘사에 린다는 그저 이따금씩 느껴지는 낯섦과 위화감의 근원지는 자신이 몇 년간 몸을 바쳐 일했던 곳으로부터 문자로 사실상 해고 당했다는 소식을 받아 충격으로 그렇게 된 것에서 온 거겠지하며 가볍게 지나쳤다. 가끔씩 핸드폰과 연결된 감시 카메라를 통해 엘사의 상태를 살필 때도 집 안 곳곳을 전보다 자주 기웃거리긴 했으나 크게 눈에 띄는 점은 없었기에 그닥 신경쓰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어찌 되었건 이제 돌아갈 데가 없으니 평생 자기 곁에 있으리란 안도감에서 오는 자만심이었다. 애욕과 득심에 눈이 가려져 드물게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된 린다에게 지속적인 경고가 무의식 중에 날아왔지만 그 무엇도 제 주인을 일깨우지 못 하고 교심 섞인 여러 감정 아래 허무하게 뿔뿔이 흩어질 뿐이었다.
그렇게 또 여러 나날을 보내고 나니 린다도 슬슬 엘사에게 마음이 잔뜩 풀어져 자신의 계획과 일정을 조곤조곤 말해주는 날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 있어서 조만간 바빠질 거라느니, 며칠 간 출장을 가 집을 비우게 될 거라느니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척에 불과했지만 간신히 꾸역꾸역 몸 안에서 치솟는 불길에 억지로라도 잿더미를 쏟아부어 불씨를 감추며 텅 비어 공허한 표정을 연기하던 엘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모양새를 하면서도 토씨 하나 안 놓치고 린다의 말들을 머릿속으로 전부 집어넣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타 조직과 무언가 큰 거래가 생겨 린다가 며칠 자리를 비우게 된 날 밤, 엘사는 본능적으로 기회가 왔음을 깨닫고는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몸을 뒤척여 근육을 일깨우고는 암막한 방 안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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