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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암흑이었다. 그 흔한 백색소음마저도 들리지 않는 오로지 적막만이 있는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주은영은 눈을 떴다. 마치 오랫동안 잠들었다 깨어난 듯 몽롱한 머리를 가볍게 뒤흔들고는 눈을 연거푸 꿈벅거려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내가 왜 여기에 있더라. 안개가 걷히듯 서서히 하나하나 돌아오는 기억에 주은영은 눈을 크게 떴다.
난 죽었구나.
비급서를 지키기 위해 지상에 내려가서, 비급을 파괴하는, 그래. 현여원을 만났고, 그리고... 죽었지. 맞아, 그리고 이모가 내게 와줬고, 그리고...
이젠 끝이구나.
이게 결말이구나. 주은영은 허탈한 웃음을 한숨처럼 내뱉으며 벌러덩 뒤로 누웠다. 앞도 뒤도 옆도 존재하지 않는 듯 한 공간에서 무언가 바닥에 닿는 감촉조차 없었지만 이제는 그런 걸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이미 죽었는데 뭘.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의외로 죽는 건 쉬웠다. 그보다는 단순했다. 살아있는 동안 그렇게 발버둥을 쳤는데, 고작 그렇게 죽다니.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제와서 뭘 어쩌겠는가. 실소를 머금은 입가가 씰룩거렸다. 이럴 거면 차라리 뭐라도 더 해볼 걸.
어차피 기억 못 하겠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엄마한테 찾아가 볼 걸 그랬네.
뒤늦은 후회는 고통만 가져올 뿐이다. 그보다는 비록 죽었음에도 계속 이어지는 이 상황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죽으면 환생하거나, 아니면 이승을 떠돌거나, 그대로 끝인 줄 알았는데 이런 곳에 올 줄은 몰랐다. 설마 죽으면 이렇게 끝인 건가? 영원토록 이 공간에 머물러야 하는 건가? 순간 목덜미가 쭈뼛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불안해졌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면 좋으련만, 빛도 공간도 그 무엇도 없는 이 곳에서 영원히 있기는 싫었다. 인연이 끊긴 건 살아 생전으로도 족할 텐데 왜 죽어서까지도 겪어야 하는지 억울하기도 하고 화도 났다. 굴레를 벗어난 대가는 삶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음까지도 계속 이어지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거기 누구 없어요? 귓가가 따가울 정도의 큰 목소리로 외쳐봤지만 메아리조차 되돌아오지 않는 공간에서 주은영은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앞인지 뒤인지 불확실한 그 곳으로 걸어갔다. 바닥에는 발이 닿는 감촉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발자국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공간은 저주같았다. 오랫동안 그 곳에 갇혀있어야 한다면 오히려 미치는 것이 자비로울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인지 가늠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걸었을 때 드디어 작지만 또렷한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얘야."
명백히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주은영은 뒤를 돌아봤다.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복장, 익숙한 머리색, 그리고 익숙한 얼굴.
"...이모?"
주은영은 믿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이곳에 있다보니 미쳐버린 자신이 만들어낸 머릿속 환각이라고 믿고 싶었다. 이모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순간 수많은 불안과 생각들이 머리를 치고 들어왔다. 반가움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설마 이모도 죽은 건가? 그 자한테? 아니면 신령인가? 그것도 아니면, 내가 드디어 미친 건가? 주은영은 표정 관리도 하지 못한 채 제 앞에 선 주작 사신을 바라봤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조심스레 목소리를 내 이모를 불렀다. 이모, 화란 이모. 그는 부디 그 대답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제발 환각처럼 사라져버리기를 바라면서.
"나는 이모가 아니란다."
뜻밖에 대답에 커진 동공으로 누군지 모를 그를 바라보며 주은영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했다. 이모가 아니라니 그 점은 일단 다행이었다. 적어도 죽지는 않았다는 거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누구지? 환각이란 게 이렇게 구체적이고 생생했던가? 하지만 목소리도, 외모도, 모두 이모인 걸. 자신이 몇 년동안 옆에서 봐왔던 이모의 모습인 걸. 그런 주은영의 생각을 꿰뚫기라도 한 듯 주화란의 모습을 한 자는 부드럽게 생긋 웃으며 말을 꺼냈다. 자신이 말 할 때와는 다르게 그가 말을 할 때면 몇 자 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공간 자체가 울리는 듯 했다. 마치 몸 속에서부터 울려나오는 것처럼.
"나는 주작 사신이란다. 아주 오래전에 신선들이 비급서에 봉인시켰던 존재지."
더 이상은 놀랄 거리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주은영은 멍하니 바라보며 턱을 움찔거렸다.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한가득 떠올랐지만 머릿속이 새하얘져 도통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단다. 주작 사신이 긴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주은영에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흠칫하며 뒤로 물려나려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말하며 어느새 코 앞까지 다가온 그는 자신의 옷고름을 매만졌다. 분명히 이름만 들었을 뿐 이렇게 마주보는 건 처음일 텐데도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느껴졌던 불안과 두려움은 눈 녹듯 사라지고 평안함과 안락함이 느껴져 주은영은 경계를 조금씩 풀었다. 정말로 주작 신령이라면 어차피 이보통령으로 다 알겠지만 그럼에도 주은영은 질문을 해야만 했다. 궁금한 것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왜 이모의 모습으로 나타난 거죠?"
"너에게 익숙한 모습이여서지."
"여긴 어디인가요?"
"내가 만들어낸 공간이란다. 명상을 하면 올 수 있는 곳이랑 비슷하지만, 엄연히 말하면 다른 차원이지. 이곳에는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아무도 올 수 없어."
"...왜 제게 나타난 거죠?"
"널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단다, 어린 주작아."
가엾은 것. 이모의 모습을 한 주작이 다정하게 주은영의 볼을 손으로 쓰다듬자 주은영은 울컥 눈물이 나올 것 만 같았다. 입술을 꾹 깨물어 살짝씩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며 바들바들 떨리는 입을 움직여 천천히 말을 꺼냈다. 왜 제가 만나고 싶었나요. 주작은 동정심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주은영을 내려보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굴레에서 벗어난 자가 누군지 만나보고 싶었지. 지금까지 수없이 시도한 자가 있었지만, 이렇게 어린 나이에 벗어난 자는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결말이로구나.
당신은, 당신 또한 그렇잖아요.
괜한 짜증과 설움이 북받쳐올라 살짝 새된 목소리로 주은영은 울분을 토해내듯 말했다. 굴레에서 벗어나려 시도한 것은 자신이다, 이 결과를 만들어낸 것도 자신이다. 그리고 당신도, 터무니없이 긴 시간동안 갇혀 무력하게 힘만 빼앗기며 지내온 당신도, 당신이나 나나 둘 다 어차피 가엾은 존재인데. 그런 존재마저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동정하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차라리 분노하고 증오했다면 나았을 것이다. 하물며 신령에게까지 동정심을 산다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주은영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음을 참으려 끅끅거렸다. 그 동안 쌓아온 온갖 감정들이 터져나올 것 만 같았다. 난 괜찮았는데. 앞으로도 괜찮을 거였는데. 그러리라 믿고 있었는데.
허무한 죽음 뒤로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힘없이 끝도 보이지 않는 칠흑색의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주은영은 몸을 웅크린 채 한참을 꺽꺽거리며 울었다. 뭔지 모를 감정들과 상황들이 뒤섞여 계속 벼랑 끝으로 몰아넣어져 쉴 새 없이 달린 이야기의 끝은 이런 것이었다. 상실감과 허무함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너무 울어 불안정해진 호흡 사이로 울음에 뒤섞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작은 주작을 바라보던 주작은 말 없이 한 쪽 무릎을 꿇고 앉고는 등을 토닥여줬다. 그 자상함에 주은영은 숨이 막힐 것 만 같았다. 이미 죽었지만 차라리 이번에는 아예 죽었으면 좋겠다고, 이런 감정조차 느끼지 않게 됐으면 좋겠다고 바라며 땅에 머리를 박았다. 몇 번이나 내리찍고는 숨을 고르기 위해 상체를 일으키자 두통으로 몸이 휘청거렸다. 그런 자신을 받쳐주고는 품에 안은 채 주작은 가만히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퍽이나 다정한 그 행위에 주은영은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음에도 끅끅거리며 몸을 떨었다. 어찌나 쎄게 내리쳤던지 이마가 깨져 피가 흘러 눈물과 함께 뒤섞여 엉망이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이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손에 온갖 체액이 묻어도 개의치 않은 듯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넘기다 조심스럽게 볼을 쓰다듬은 주작은 나지막이 주은영의 귀에 속삭였다.
"잠들렴.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바뀌어 있을 거야."
점점 희미해지는 시선 사이로 주화란의 웃는 모습이 보였다. 주작궁에서 보았던 이모의 다정한 미소.
"괜찮아."
주은영은 자신의 의식이 깊은 수면 밑으로 꺼지는 것을 느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눈부신 빛이었다. 눈을 감았음에도 얇은 피부 사이를 통과하고 느껴지는 밝은 빛에 살풋 인상을 쓴 채 찡그리며 눈을 뜨자 보인 것은 익숙한 집 안이었다. 아주 오래전 기억이지만 그럼에도 이곳이 낯선 곳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래, 여기는...
"...집?"
자신이 주작 후계자로서의 증표를 잃기 전 살았었던 집. 아직 붉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을 때, 8살 이전에 살았었던 집. 얼떨떨함에 눈을 깜박이다 혹시 과거로 돌아온 건가 싶어 황급히 자신의 몸을 확인해봤지만 육체는 8살 때의 몸이 아닌 듯 했다. 적어도 20대 초반 정도의 몸. 다급해진 마음에 방 안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뛰어가 거울을 확인하자 그 곳에는 검은 머리칼을 가진 자신이 있었다. 혹시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싶어 볼을 꼬집어봤지만 그대로 아픔이 느껴지는 통각에 일단은 꿈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그래도 마냥 현실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여긴 어디지? 주작이 만들어낸 환상인가? 도통 짐작할 수가 없어 온갖 추측들을 생각하는 동안 화장실 밖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고 정감가는 목소리.
아주 오래 전 기억이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었던.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그럼에도 떨림을 자제할 수는 없었다. 당장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발을 하나하나 옮기며 주은영은 앞으로 걸어갔다. 무거운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향하자 그 곳에는 엄마가 서 있었다. 자신이 행한 일 모든 것의 이유이자 가장 보고 싶었던 존재가.
"...엄마?"
누가봐도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부르자 엄마는 왜 그러니? 하고 갸웃거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이모 만나기로 한 날이잖니, 짐은 다 챙겼어? 학교일 때문에 앞으로는 가까운 이모집에서 신세지기로 했잖니."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그 소리에 방 안으로 들어가 확인하자 커다란 캐리어 하나와 종이가방 몇 개가 보였다. 아까는 왜 못 봤지? 설마, 내가 지금까지 꿈을 꾼 건가? 그 동안의 일들은 모두 꿈이었던 거야? 아까 그 상황도, 모두 다? 당황스러워 한참을 그 자리에 굳어있자 바깥에서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는, 주은찬? 캐리어를 끌며 여러개의 가방을 한 손으로 집어 서둘러 나오자 검은 머리의 주은찬이 보였다. 동생 또한 자신과 같은 검은 머리였다. 어버버하는 자신의 친누나를 의아하게 바라보고는 짐을 들어 차로 나르는 동생을 보며 주은영은 혼란스러운 머리를 가라앉히려 애썼다. 차를 타고 이모네 집으로 향하면서 넌지시 주작 가문과 후계자에 대해 말해봤으나 아무도 그게 뭔 소리인지 이해 못 한 듯 한 눈치였다. 주은지는 언니가 혹시 꿈을 꾼 게 아니냐며 손사래를 칠 뿐이었다.
어느덧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이모집 앞에 도착하자 주은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주화란이라면 어쩌면 알 지도 모른다. 이모라면. 긴장되어 뻣뻣하게 굳은 몸을 움직여 초인종을 누르자 자신을 맞이한 것은 검은 머리의 이모였다. 주은영은 심장이 철렁했다.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게 다행인 걸지도 모른다. 그 모든 일들은 모두 꿈이었던 것이고,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라고. 그 동안 겪었던 것들은 모두 한낱 꿈일 뿐이라고. 그래, 그러면 다행이야. 이제 아무도 고통받을 필요없어. 굴레에서 벗어나려 애쓰지 않아도 돼. 이십 몇 년간 겪어왔던 그 모든 일들이 단순 꿈으로 치부되어 버리는 것이 썩 좋은 느낌은 아니었으나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려 노력하면서 주은영은 반갑게 주화란에게 인사했다. 주화란 또한 언니와 자신의 조카를 보는 것이 기쁜지 웃으며 맞이했다.
검은 머리의 이모는 낯설었다. 그렇게 환하게 웃는 이모 또한 낯설었다. 자신이 보아왔던 이모는 붉은 머리의 주작 강림을 하고 항상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주작 사신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피를 봐야만 만족하는 주작궁을 지키는 사신. 만약 이모가 일반인이었다면 이런 모습이었겠지. 그저 나쁜 꿈을 꾸었을 뿐이라 여기며 주은영은 그 전의 일들은 모두 잊으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자신을 기억한다. 이보통령이 없어도, 자신을 기억할 수 있고 잊혀지지 않는다. 그거면 충분했다. 엄마도 이모도 모두 이곳에 있다. 그래, 그거면 된다.
주화란은 다정하게 웃으며 주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귀에 속삭이지 않는 이상 들리지 않을 듯 한 작은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가엾은 것.
부디 여기서는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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