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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굴레차! /글

순치 (馴致)

책과 집 2019. 7. 28. 01:52


여우 주화란과 산 속 오두막에서 사냥개 현여원과 같이 사는 주은영. 조각글 모음입니다. 그 뒤가 더 있을지 없을지는 모릅니다... 아마 생각나면 간간이 추가할 듯.



​​






1. 겨울산.

차가운 겨울산은 살아남기 혹독하다.

어느정도 추위에 견디기 위해 진화했다지만 여전히 털가죽을 콕 콕 찌르고 들어오는 냉기는 아무리 두꺼운 모피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견디기 힘들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하이얀 입김이 콧잔등을 간지럽혔고 뼈 속까지 얼어붙을 정도의 추위는 호흡을 괴롭게 만들었다. 굶주린 배를 이끌며 말라붙어 침조차 나오지 않는 입을 다시며 한 발 한 발 깊게 쌓인 눈을 푹푹 밟아 앞으로 걸어갔다. 이 하얀 겨울산에서 어서 벗어나기를 바라면서.


들짐승과 날짐승도 찾아보기 힘든 겨울 산 속. 머리 끝 쫑긋한 귀까지 쌓인 눈은 어디가 바닥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였다. 길짐승도 아니고 뱀마냥 바닥을 기어다니는 거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뱀이라 하니 오래 전에 본 구렁이가 생각났다. 쥐를 찾아 갸웃거리던 들판에서 본 검은 구렁이. 자신을 보고 혀를 날름거리며 쉭쉭 거리던 놈. 제 딴에야 살기 위해 그런 것이었겠지만 살아남기에도 바쁜 야생에서 남을 생각할 겨를 따위는 없었다. 어쨌더라, 아. 그 때 잡아먹었었지. 쥐나 개구리도 잡아먹는 여우가 굳이 뱀을 못 먹을 이유는 없었다. 그냥 문득 그 때 생각이 났다. 따뜻한 들판, 넓은 강, 안락한 나무 밑동. 겨울이 오고 많은 생명들이 겨울잠에 들고 숲 속을 오가는 무리들이 늘어나면서 더 이상 영역을 지킬 수 없어 도망치듯 다른 곳을 찾아 떠나게 된 늙은 여우. 왜 갑자기 이런 생각들이 나는 건지. 설마 주마등인 건가 싶어 여우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따뜻하고 햇빛 아래 살아갈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얼마나 걸었을까 겨우겨우 하얀 산을 벗어난 여우는 곧 커다란 나무가 빽빽하게 쌓인 숲에 들어섰다. 숲 속으로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축축한 이끼 냄새와 희뿌연 안개가 털을 스치고 느껴졌다. 어딘가 서늘한 죽은 나무 냄새와 오래된 숲의 향은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게 만들었다. 그렇게 또 얼마나 걸었을까 울창했던 나무가 듬성듬성 해지고 진흙처럼 축축했던 땅을 벗어나 햇빛 냄새가 나는 흙을 밟기 시작했다. 여전히 높은 나무들 사이로 밝은 햇빛이 땅을 내리쬐며 숲을 비췄다. 여기라면 충분히 살아가기 좋은 곳이라 생각하며 여우는 주변을 살폈다.

그때였다.


여우는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옅고 희미한 냄새를 맡았다. 바람과 섞여 흐릿하지만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다른 존재의 냄새.

인간이다.

그다지 멀지 않는 곳에 그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우는 멈칫했다. 오랫동안 굶주려 윤기없는 털과 빈약한 몸은 사냥할 힘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대로 도망가 죽으나 사람에게 간청해 찌꺼기라도 얻어먹으나 그나마 나은 길을 선택하라하면 후자를 택하는 것이 나았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으니까. 여우는 냄새가 향하는 곳을 따라 걸어갔다. 바람이 계속 냄새를 실어 나르며 길을 알려주었다. 어느 정도 걷자 여우는 또 다시 멈췄다. 또 다른 존재가 있었다.

빌어먹을 사냥개.

사냥개는 사냥감을 잡는다. 사냥감을 몰고, 사냥꾼이 죽인다. 사냥개는 사냥감을 물고 사냥꾼에게로 향한다. 곧 그것은 전리품이 된다. 사냥개에게는 잘했다는 의미로 고기 뭉텅이가 몇 덩어리 던져진다. 잡힌 짐승은 가죽이 벗겨지고 그것은 옷이 되거나, 혹은 장식으로 쓰인다. 머리는 잘려져 벽에 걸린다. 이빨과 뼈는 목걸이나 낚싯바늘로 쓰인다. 자신은 그렇게 된 짐승을 몇 번 본 적 있었다. 불쌍하게도 잡혀 먹히고 만 짐승들. 자신도 사냥개에게 여러번 쫓기면서 빠져나간 적이 있었다. 그것도 사냥개를 농락해 골탕먹이면서. 하지만 그건 치기 어린 젊었을 적 이야기지 지금은 아니었다. 늙은 여우는 그럴 힘이 없었다. 도망가야 했다. 그걸 좀 더 빨리 눈치챘어야 했다.

혈기왕성한 젊은 개는 어느새 바로 코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자신이 저를 눈치채기 전에 먼저 알아채고는 찾아왔던 것이다. 그르렁거리는 목 안에서부터 낮게 울려 퍼지는 짐승의 소리가 났다. 온통 검은 털은 가진 개는 자신보다 몇 배는 큰 덩치로 주위를 맴돌았다. 잡을까 말까 고민하는 듯 했다. 주인의 명령이 없어 함부로 잡지는 못 하는 건가 싶어 여우는 주변을 살폈다. 도망치기는 글렀고 이제 제 목숨은 그 주인에게 달려있었다. 사람. 제발 사냥꾼이 아니기를. 사냥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냥꾼이 아닐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그는 빌었다. 개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자신을 향해 코를 들이밀었다. 냄새를 맡는 듯 했다. 곧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주인이 왔다.


두껍게 손질한 가죽을 팔에 두르고 매를 다루는 것을 보아 처음에는 매꾼인가 했다. 그러면 안 되지, 매는 안 돼. 여우를 사냥하는 매. 꿩, 여우, 토끼 등을 사냥하는 매. 한창 젊었을 적에는 따돌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지만 요즈음에는 나이가 들어 부쩍 힘에 부쳐 먹이를 쫓는 것마저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최대한 다른 포식자와 부딪히지 않는 것이 살아가기에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포식자라고 하기에는 어중간한 송곳니와 어중간한 덩치, 어중간한 발톱을 가지고 있는 여우. 그것도 늙은 여우가 저보다 덩치가 크고 날쌘 짐승들과 싸우고 살아남기란 힘든 일이었다. 늙은 여우는 노련하고 현명했다. 목숨을 보전하는 법을 알았다.

"개호주라도 봤니?"

이 숲에는 범이 없을 텐데. 네가 그렇게 홀로 행동할 때는 보통 맹수가 주변에 있을 때지. 그러고보니 물가에 능소니가 몇 마리 돌아다니더구나. 이리는 보이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너도 혼자 돌아다니지 말렴, 어미가 주변에 있으면 위험하니까.

주인에게 꼬리를 살랑이며 반갑게 다가가는 개를 쓰다듬으며 그는 말했다. 자신의 오른쪽 팔을 꾹 붙들고 있는 매를 쓰다듬고는 하늘로 날려보냈다. 잘 보니 덩치가 어린 것으로 보아 아직 초고리인 듯 했다.

"너였구나. 덩치가 작아 보이지 않아 몰랐는데."

그는 자신을 눈치채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마치 놀래키지 않으려는 듯 살금살금 걸어오더니 안심하라는 듯 손을 제 머리보다 낮게 아래로 뻗었다. 주둥이로 손을 훑자 간지러운 듯 그는 살풋 웃었다. 축축한 코의 감촉이 손에 느껴지자 방긋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턱을 슬슬 쓰다듬었다. 곧 이어 그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말랐구나. 조그만 가죽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자신에게 주었다. 육포 덩어리였다. 그것도 커다란. 혹시 마취약을 탄 건 아닌가 싶어 망설였지만 본능은 생각을 마비시켰다. 허겁지겁 말라 비틀어진 고깃 덩어리를 주워먹으면서도 여우는 눈을 위로 떠 그들을 바라봤다. 개와 인간. 야생과는 거리가 먼 자들.


화약 냄새 장작불 냄새 잿냄새 짐승 냄새 사람 냄새. 보통 사람의 냄새라 하면은 숲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냄새가 태반이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태초부터 그 숲에서 나고 자란 자의 냄새. 짐승과도 같은 냄새. 저가 데리고 다니는 사냥개보다 더욱 그 숲과 어울리는 존재.


너는 이모와 닮았구나.
붉은 털, 처연한 눈매, 오래 산 자에게서 느껴지는 노련함.



2. 이름.


화란아.

여우는 이름을 얻었다. 그 오랜 시간 살면서 여우는 한 번도 이름이란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당장 살아남기 급급했으니까. 태어나고 젖을 떼기까지 몇 개월. 사냥하는 방법을 배우기까지 또 몇 개월. 어미로부터 독립하기 까지 그렇게 몇 년. 언니가 좋아 언제까지고 머무르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더랜다. 그렇게 홀로 살아남고 살아남아 어느덧 현재. 그리고 지금. 주화란. 그것이 여우의 이름이다. 제 이름이다.

검은 머리의 사람은 누군가랑 같이 살고 있었다. 붉은 머리칼을 가진 또 다른 사람. 그에게는 짐승의 피 냄새가 났다. 덕분에 단번에 그가 사냥꾼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으레 그렇듯 그는 짐승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역한 피냄새가 짙게 밴 자에게는 온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우는 귀를 뒤로 젖히며 슬금슬금 검은 머리칼을 가진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붉은 머리의 사람은 그 모습을 보곤 허, 하고 한 쪽 눈썹을 찡그리더니 둘은 대화를 나눴다.


"여우잖아? 왜, 기르려고?"
"응. 이모, 봐 봐. 이 여우 누군가랑 닮지 않았어?"
"닮기는... 글쎄, 잘 모르겠어."
"내가 이름도 지어줬어. 화란이야. 주화란."

뭐? 서로 옥신각신 말장난하는 그들을 보며 주화란은 어릴 적 헤어진 가족이 떠올랐다. 동물들은 가족들과 살지 않는다. 새끼들은 때가 되면 스스로 독립해 떠난다. 어미도 새끼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자매와 같이 다니지도 않는다. 다만 주화란은 달랐다. 그는 언니를 그리워했다. 언니가 떠나고 새끼를 친 것을 알면서도 그는 언니 주변을 맴돌았다. 혹여 냄새라도 맡을까 물가를 거닐며 자신의 냄새를 지웠다. 어린 새끼들은 제 언니를 꼭 닮았었다. 그 중 유독 별나던 한 마리를 기억한다. 언니도, 다른 새끼들도 아무도 몰랐는데 자신을 눈치채고는 저 멀리 바라보던 검은 여우 한 마리.

주화란은 그렇게 도망쳤다. 자신을 바라보던 새끼 여우의 눈빛을 아직도 잊지 못 한다. 왜 도망쳤는지는 모르겠다. 짐승의 삶은 단순하다. 생존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생존하고자 하는 목적. 그 외에는 누릴 여유도 시간도 없었다. 그 뒤로 주화란은 언니를 본 적이 없었다. 짐승의 짧은 수명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벌써 죽었을 수도 있겠다. 굳이 수명이 아니더라도 다른 이유는 많았다. 영역 다툼을 벌였거나, 사냥 당했거나, 병에 걸렸거나 다쳤거나 해서 등등. 이따금씩 주화란은 검은 여우가 떠올랐다. 지금쯤이면 독립해서 제 삶을 살아가고 있겠지. 주화란은 그 여우를 떠올리다 문득 저 사람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름이 주은영이랬던가. 자신의 이모와 자기가 닮아서 이름을 이모의 이름을 따 그대로 지어줬다고 했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과 붉은 털을 가진 여우.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과 검은 털을 가진 여우.

당신이 그 검은 여우를 봤다면 그 애 또한 이름을 지어줬겠지.

주화란은 저 사람들과 자신의 처지가 비슷하다고 느꼈다. 누가 더 나은지는 모르겠다. 낫고 좋고를 따질 이유도 없었지만. 그는 고개를 들어 바람을 맡았다. 바람결에 옅은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정말로 오랜만에 맡는 냄새였다. 누군가가 그랬다. 시각보다는 후각이 더욱 오래 기억된다고. 주화란은 냄새의 주인을 떠올렸다. 온 몸의 털이 검었던 여우. 언니의 자식.

바람을 타고 느껴질 정도면 그는 아마 이 주변에 있을 것이다. 그라면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 때처럼, 그는 자신을 알아보고 찾을 것이다. 그것이 제 착각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러리라 믿고 싶었다.

바람이 미적지근했다. 추운 겨울산 너머의 가족들이 떠올랐다.



3. 사냥개.

어느날은 다른 사람이 오두막에 찾아왔다. 산 속 깊이 자리잡은 오두막이라 인적이 드물어 짐승들이 다니는 길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곳이었지만, 그럼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긴 검은 머리칼을 가진 자의 이름은 현여원이라고 했다. 현여원. 잠깐, 사냥개도 이름이 현여원이라지 않았나? 주변을 둘러보자 사냥개는 이미 현여원이라는 자에게 가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라보기만 했다. 쓰다듬으려고 하면 곧 바로 뒤돌아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럼에도 주변을 떠나지는 않았다. 제 주인을 냅두고 다른 사람에게 저만한 관심을 보이는 걸 보면 옛적에 헤어진 주인인가 싶었다.

"아직도 여기서 지내고 있어? 마을로 돌아오라니까."
"아직은 괜찮아. 여기도 지낼 만 해. 이모도 있고, 개도 있고, 여기... 새 가족도 있고."
"늙은 여우잖아. 주은영, ...그래. 네가 아직 돌아오기 싫다면야."

안부 좀 묻고자 온 거였어. 겸사겸사 네 가족들 소식도 들려주러 왔고. 현여원에게는 많은 사람들의 냄새가 났다. 자연과는 거리가 먼 딱딱한 금속 냄새. 불의 냄새. 지독한 연기 냄새와 처음 맡아보는 냄새들이 가득했다. 너무나 많은 정보에 머리가 혼미해져 아파올 지경이었다. 가만히 옆에서 엎드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꽤 많은 소식들을 알았다. 주은영에게는 또 다른 가족이 있다는 것, 그 둘은 원래 마을에서 왔다는 것, 사냥개의 원주인은 현여원이라는 것. 숲으로 가 홀로 살겠다는 주은영을 걱정한 주화란이 그를 따라왔고, 사정상 따라갈 수 없었던 현여원은 대신 자신의 개를 보내줬단다. 충직하고 영리하고 우직한 개. 현여원 본인에 걸맞는 거대하고 검은 개. 회색과 연보라색이 섞인 눈을 가진 개. 제 원주인과 꼭 닮은 검은 개.

너도 여기서 살아도 돼.
내가 왜? 난 간다, ...나중에 봐.

퉁명스럽게 대하면서도 퍽이나 아쉬움이 남은 듯 쉽사리 발을 떼지 못 하고 힐끔힐끔 오두막을 바라보는 현여원을 보며 주화란은 솔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면 편할 텐데. 주은영은 진심으로 여기서 같이 살기를 바라는 듯 했다. 그러면 주화란은? 그러니까, 인간인 주화란, 제 이름의 시초이자 원래의 주인인 주화란은 현여원을 영 반가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빨리 가기를 원하는 듯 손짓으로 훠이훠이 젓는 제스처를 보이는 걸 보아 여기서 산다고 하면 어떤 일이 터질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이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는 게 아쉬운 듯 오두막을 떠나 그 숲을 벗어나 뒷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음에도 한참을 그 뒤를 바라보는 주은영을 보고 주화란은 어깨를 잡고 이만 들어가자며 오래된 나무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곧 둘이 어느 한 방으로 들어가자 잠시 후 덜컹거리는 낡은 침대가 끼익거리는 소리와 여러 천들이 구겨지는 부스럭 소리가 났다. 방 안으로 따라 들어가지 않고 방문 앞에 서 있던 개는 빙글빙글 돌더니 이내 자리를 잡은 듯 털썩 드러눕고는 몸을 웅크려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아. 늙은 여우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았다. 여우는 총총 사냥개의 곁으로 가 그의 품에 파고들어 같이 잠을 청했다. 방에서는 두 명의 웃음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4. 주은영.

주은영을 따라 현여원과 숲길을 따라 강을 찾아간 주화란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평화를 만끽하고 있었다. 잔잔하고 고요하고 차분한 곳. 살아남기에 급급하지 않고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곳. 제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사람 곁에서 주화란은 이곳에 온 건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따뜻한 햇볕 아래 꾸벅꾸벅 쏟아지는 잠을 참으며 강 일대를 킁킁 냄새를 맡으며 나다니던 주화란은 검은 털뭉치를 발견했다. 여러 풀과 흙과 섞여 여기저기 나뒹굴어진 자그만 털뭉치들. 개중에는 피가 섞인 것 또한 있었다. 주화란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 냄새. 흐릿하지만 분명히 아는 냄새였다.

검은 여우.

언니의 자식. 발걸음을 서둘러 냄새를 쫓아 달려간 곳에서 마주한 건 피투성이에 엉망으로 털이 엉키고 찢어져 간신히 숨만 색색거리며 몰아쉬고 있는 검은 여우였다. 제가 기억하던 것보다는 덩치가 훨씬 더 컸지만. 주화란은 떨리는 몸을 뒤로한 채 천천히 다가갔다. 꼬옥 감긴 채 부들거리며 헉헉거리는 검은 여우의 눈가를 혀로 핥자 의식이 남아있는 듯 여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코를 들이밀며 목덜미에 파묻고 일어서라는 듯 밀자 여우는 주화란의 콧잔등을 가볍게 깨물고는 다시 푹 쓰러졌다. 애타게 캥캥거리며 울음소리를 내자 그 소리를 듣고 달려온 주은영과 현여원은 검은 여우를 보고는 조심스레 안아들고 오두막으로 향했다. 안겨 흔들리는 검은 여우를 주화란은 쫓아가면서 단 한 순간도 눈에서 떼지 않았다. 검은 여우 또한 온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죽음과 삶 그 순간을 왔다갔다하는 동안에도 시선만은 주화란에게서 떼지 않았다. 둘은 알았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의 재회였다.

상처로 보아 살쾡이와 싸우다 다친 듯 검은 여우의 몸은 곳곳에 상처로 가득했다. 마르고 작은 몸이었지만 못 먹어서 그런 게 아닌 원래 체형이 그런 듯 했다. 한창 청년기를 달리고 있던 여우는 다행히도 며칠이 지나지 않아 금세 몸을 회복하고는 어느덧 스스로 걸을 수 있는 정도까지 이르렀다. 주화란은 조심스럽게 검은 여우에게로 다가가 눈가를 핥고는 고개를 부비적거렸다. 검은 여우 또한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고는 꼬리를 살랑이며 장난스럽게 주둥이를 깨물고는 뒤로 빠지며 장난을 걸었다. 그 모습을 본 주은영은 둘이 가족임을 깨달았다. 붉은 여우와 검은 여우. 주은영은 검은 여우에게도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그러니까, 우습게도 이름은 주은영. 검은 여우 주은영. 주화란은 그 날 그 이야기를 듣고 너는 왜 죄다 짐승을 사람 이름으로 짓느냐며 가벼운 꾸지람을 했다. 주은영은 피식 웃으며 왜. 친숙하잖아, 하고 말 뿐이었다.

검은 여우 주은영과 붉은 여우 주화란.
사람과 짐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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