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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로 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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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떠한 짓까지 저지를 수 있습니까? 정확한 의미를 유추하기 힘든 질문임에도 엘사 브라이언트라면 성심성의껏 고심하며 답변할 터였다. 혹은 별 생각없이 이리 답할지도 모른다. 때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하지만 어떠한 상황이든 절대 타인을 희생시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권력이든, 재물이든, 사람이든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목표를 어떻게든 이루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겠다 다짐하며 각자 자신의 길을 향해 기꺼이 몸을 내던지며 뛰어든 수많은 부류의 개척자들 사이에 본인 또한 발을 들인 엘사의 마음 한 켠에는 영원토록 시들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변치 않을 진심어린 정의 하나가 우뚝 서있었다.
엘사는 그런 인간이었다. 자신의 몸이 멍들고 피맺히고 통심하더라도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통이든 감내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타인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누군가를 수렁에 빠뜨리면서까지 제 욕심을 충족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마냥 이타적이고 도덕심이 넘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배척심이 가득하거나 폐쇄적인 악인은 아니었다. 길거리에 널려빠진 자갈과 티끌과 먼지와도 같은 흔하디 흔한 사람일 뿐이었다. 다만 남들과 다르다 자신할 수 있는 점은 유난히 끈질긴 강단성과 비록 무수히 많은 상처를 입어 흉터 투성이가 되어버릴지라도 시간과 계기만 있다면 다시금 거뜬히 몸을 일으킬 회복력이 엘사 자신에게 있다는 점이었다. 본능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눌러낸다해서 그것이 숨겨지리라 생각하는가? 본인이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그다지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무의식이란 뇌가 본인의 자아를 뚜렷하게 인지하며 모든 것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그 순간순간에도 뒷편에 앉아 언제나 자신과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다시금 엘사를 일으켰다. 모든 기력과 의지를 잃고 자아가 실종되어 죽은 이나 다름없는 부패한 송장이 되어버린 엘사에게 근육을 도로 일깨워 차츰차츰 육신을 움직일 힘을 주고, 이미 오래전 굳어버려 저 먼 지하 깊이 자리잡은 죽은 자들을 위한 고향에 가라앉아 버린 자의식을 되처 찾을 수 있도록 텅 비어버린 머리에 동아줄을 던져주고, 금방이라도 울며 벼락을 내리칠 모양새를 하고 꿈틀거리며 파란 하늘을 가득 채우는 먹구름과 같은 잿빛 눈에는 제아무리 지상을 벗어나 하늘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있을 높은 산이라도 감히 머리를 숙일 수 밖에 없는 태양과도 같은 하얀 빛이 형형하게 존재를 내비추며 타올랐다.
애초에 생각이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닌 엘사였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억지로라도 머리를 굴려가며 생각을 해야만 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에게 지성과 견식을 요구하며 뭐라도 내놓으라 닦달해야 했다. 그리고 드디어 길이 나타난 지금은 이제 반대로 어지럽게 머릿속을 헤집는 쓸모없는 생각들을 최대한 걸러내고 덜어내야만 했다. 무수히 밀려들어오는 잡다한 생각과 불안들은 육체를 경직시키고 행동을 주저하게 만들었으며 기껏 세운 계획을 실행하지 못 하도록 이곳저곳에 망설임을 심어댔다. 더 이상의 생각은 자신을 해하려 드는 어리석은 당헤의 독이었다. 오직 쓸모있는 기억들만 골라내어 손에 쥐어야지만 계획을 행할 수 있었다.
운명이 코 앞까지 몸을 기울이며 가까이 와 있었다. 사방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이때라며 큰 소리로 아우성치며 외쳐댔다. 아마 이러한 짓을 하는 건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 실패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그 뒤는 없었다. 실패라는 가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나아가야만 했다.
후회와 분노를 고삐로 잡고 바로잡겠다는 욕심을 박차로 삼은 채 엘사는 새로운 목적을 향해 힘껏 달려나갈 준비를 하며 언제든 바로 뛰쳐나갈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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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들을 대부분 이끌고 나간 건지 드물게 최소한의 전력을 제외하고는 텅 빈 저택을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며 방문을 열고 나와 나다니기 시작한 엘사는 그동안 세웠던 계획을 다시금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정리하며 우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한 번 더 바로 세웠다. 그간 행동반경이 극도로 제한된 상황에서 지내면서 움직임이 확연하게 줄어들었다보니 눈에 띄게 근육과 체력이 빠졌음이 여실히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사로서의 최소한의 체능과 극기심은 여전히 몸 안에 자리잡아 계획을 실행할 수 있도록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본래라면 아무리 적어도 네다섯명 정도가 복도에서 보초를 서 있을 테지만 꽤나 많은 인력이 필요했는지 끽해야 한 두명이 이따금씩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하며 직무유기에 가까울 정도로 귀찮은 태를 내면서 복도를 서성이며 경비일을 하고 있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지 종종 발 한 쪽을 굴리며 삐딱하게 서서는 자기네들끼리 떠들며 본인은 안중에도 없는 조직원들에 모습에 잠시 안도를 한 엘사는 복도에 놓인 커다란 창문가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비스듬히 창문 옆 벽에 기대어 고개를 살짝 내민 채 바깥을 살펴보니 눈에 보이는 숫자로는 어림잡아 스무 명이 채 안 되는 것 같았다. 현재 자신이 머무는 곳이 4층이었고 복도에는 보초병 두 명 정도가 배치되어 있으니, 만약 아래층도 상황이 같다면 건물에는 아무리 많아도 10명 내외의 사람들이 있을 터였다.
‘총 서른 명 정도면 해볼 만한데.’ 워낙 부지가 넓으니 재빨리 달리기만 하면 따돌리기야 어렵지는 않을 거였다. 그동안 창을 통해 꽤 자주 바깥을 보아왔으니 지리도 어느정도는 눈에 익은 상태였고, 저택을 둘러싼 울타리에 유일하게 뚫린 개구멍도 대강 어디 위치인지 짐작해놓았던 지라 무사히 저택 밖으로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그 뒤는 한결 쉬워질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을 어떻게 붙잡아놓는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세네 명이라면 모를까 아무리 그래도 서른 명의 사람들을 가뜩이나 근력도 떨어진 상태의 자신이 붙잡히지 않고 완전히 따돌릴 자신이 있느냐 하면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개를 풀기라도 하면 그때는 달리는 것만으로는 상황을 타개할 수 없을 터였다. 운 좋게 개구멍으로 먼저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사람보다 덩치가 작은 경비견들 또한 자신을 따라 구멍을 통해 울타리를 넘어서는 끝까지 쫓아올 것이 분명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조용히 구멍난 철창을 향해 갈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만손 수가 적다 한들 문을 지키고 있는 조직원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탈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람들의 시선은 집중시킨 채 개들은 풀어놓지 못하게 할 그런 상황이 필요했다.
행여 다른 조직원이 볼 새라 손목 안쪽 소매에 숨겨놓은 스테이크 나이프를 만지작거리며 별 일 없다는 듯 어정거리며 걸어다니던 엘사는 여전히 저들끼리 시시덕거리며 자신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조직원들에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밑층을 향해 아랫계단을 타고 천천히 내려갔다. 운 좋게 들키지 않아 여지껏 빼앗기지 않은 유일한 호신용품을 손에 바투 쥔 채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며 잔뜩 경계태세를 하곤 3층으로 내려온 엘사는 손께에서 느껴지는 서늘하고 차가운 금속의 감촉에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낮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 몇 번 저택 내부를 돌아다닐 때 부엌에서 서성거리며 눈치를 보다 은근슬쩍 가져와 침대틀 안에 숨겨두었던 나이프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마련해둔 거였다. 쓸 일이 없다면 가장 좋겠지만, 삶은 언제나 변수 투성이고 계획이 온전히 제 뜻대로 완만하게 흘러가리란 보장이 없으니 일종의 보험으로 챙겨둔 거였다.
3층은 불규칙한 간격을 두고 듬성듬성 불이 켜져있어 복도는 어두컴컴하기 그지 없었고 저 멀리 검은 실루엣이 간혹 몸을 꿈틀거리며 제 존재를 알리는 것으로 보아 경비 인력 또한 아까의 추측처럼 한 두명에 불과했다. 더 이상 머무를 필요가 없음을 깨닫곤 직후 또 다시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겼지만 2층 또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단숨에 계획을 속행하는 게 낫겠다 싶어 1층으로 완전히 내려온 엘사는 고개는 돌리지 않은 채 눈동자만 도록 굴리며 곁눈질로 천장 구석에 배치된 감시 카메라를 흘깃 쳐다봤다.
린다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며칠 집을 비울 정도로 바쁜 일이라 했고, 꽤나 큰 일인지 조직원들을 죄다 차출해갔으니 카메라를 확인할 여력도 없겠지. 아무리 철두철미하게 계획을 세웠다 한들 만에 하나라도 린다가 눈치챈다면 모두 헛된 발길질이 될 것이 자명했다. 또 다시 탈출하려 했음이 들킨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감히 자신이 방심했을 때를 노린 거냐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고통과 억압이 덮쳐올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는 탈출은 커녕 방 밖으로 나서는 것조차 박탈당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자신이 가장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기 전에 서둘러 계획을 실행해야 했다.
깊은 밤인 만큼 조직원들 대부분은 피곤에 절어 근무 태만이었고 몇 몇은 아예 거실에 마련된 소파에 누워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다행이네, 굳이 칼을 휘두를 일은 생기지 않아서.’ 제아무리 이러한 상황에 처했다 한들 본질은 경찰인지라 살인은 어떠한 경우더라도 피하고 싶었다. 막상 누군가를 죽여야만 한다면 머리로는 이 행동이 옳다고 판단할 지라도 몸은 머뭇거리며 따르기를 주저할 터였다.
바깥과 연결된 현관문이 위치한 곳이라 그런지 다른 층보다 조직원의 수가 두 세명 더 많았지만 대다수가 잠들어 있거나 꾸벅꾸벅 고개를 위아래로 까닥거리며 밀려오는 졸음을 견디지 못한 채 하염없이 졸고 있기에 큰 소리만 내지 않는다면 그닥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최대한 인기척을 줄인 채 가만가만 복도를 걸어가던 엘사의 시선에 거실 소파에 앉아 시가를 피다가 잠든 건지 물에 잠긴 듯 한 거친 숨소리를 내며 눈을 감고 숙면을 취하는 조직원이 보였다. 그 앞에 탁자에는 여전히 불이 붙어 타닥거리며 재떨이 위를 빛내는 시가와 기름이 반 절 가량 남은 일회용 라이터가 올려져 있었다. 잠시 매캐한 연기를 맡으며 가만히 물건을 바라보던 엘사는 조용히 손을 뻗어 라이터를 잡고는 주머니에 슬쩍 집어넣었다.
지하실 문의 위치를 알리는 괘종시계까지 다다른 엘사는 혹시나 화분을 끌면 소리가 날까봐 힘을 주어 덥썩 붙잡아 들어올리고는 문 바로 옆에 바닥과 부딪히며 작은 충격음조차 들리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이며 아주 천천히 내려놓았다. 진작에 자물쇠를 제거하여 손쉽게 열리는 문의 손잡이를 조심스레 잡아당기곤 빠른 걸음으로 아래로 내려가 10L 짜리 기름통을 집어온 엘사가 조급해지는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면서 뚜껑을 열고는 괜한 소음이 나지 않도록 때가 되어 한가득 땅을 가득 채운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추수꾼 마냥 엎드리다시피 몸을 숙여 통의 입구를 지면과 가까이 하곤 역한 냄새를 풍기는 기름들을 바닥에 쏟아냈다. 혹여 기름의 악취에 조직원들이 깨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잠시 들었지만 일반 담배보다 훨씬 지독한 시가 연기가 꺼지지 않고 오랫동안 복도를 맴돈 탓에 코가 무더져 있어 크게 이상함을 느끼진 못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한 통을 다 쏟아냈지만 복도 바닥을 적시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기름양에 엘사는 기름을 밟아 철벅이는 소리가 들릴 새라 아직 물들여지지 않아 건조되어 깨끗한 밑면을 찾아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마냥 겅중겅중 밟아대며 다시 서둘러 지하실로 발을 옮겼다.
이걸로는 택도 없어. 혹시라도 깨기 전에 어서 다 뿌려놔야 할 텐데. 통 안에서 자기들끼리 플라스틱 벽과 부딪히고 서로 휘저으며 출렁거리며 찰방대는 액체 소리가 들렸다. 반복된 노동으로 인해 땀으로 흠뻑 몸이 젖어들며 열기가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이제와서 멈출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힘들다고 나태함을 부리다가 경비가 깨어나기라도 하면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갈 터였다. 최소한 1층이라도 뿌려놔야 나머지 윗층들도 따라 불이 붙기 쉬워질 거였다. 갈수록 갈급해지는 마음에 호흡은 점점 거칠어져 자신의 불안정한 숨소리가 귀를 가득 채워갔고 장시간의 노역으로 점차 힘이 빠지기 시작한 팔은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했다. 과거에 범인을 잡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수면도 취하지 못한 채 잠복 근무를 한 적이 있지 않았느냐고, 그 때에 비하면 지금 이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스스로 다독이면서 이를 악물고는 땀에 푹 젖은 채 약간의 불만 켜져 어두운 복도를 몇 번이고 왕복하며 기름을 뿌리곤 마지막으로 지하실과 1층이 이어지는 어둡고 습한 곰팡이 핀 계단까지 전부 기름으로 길을 만들어 발전기와 연료통을 모아놓은 창고까지 빠짐없이 서로 연결되도록 거의 준비를 끝낸 엘사는 잠시 우두커니 서서 심하게 흐트러진 숨을 고르며 터질듯이 펄떡이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그 순간, 누군가가 위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듬성듬성 불이 켜져있어 어둡다 한들 매끄럽게 번들거리며 카펫을 적신 기름이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어 들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복도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기름통들이 부정하기에는 너무나 확실한 증거물이었다. 만약 조직원 한 명이 이걸 발견한다면 바로 소리를 질러 곧 잠들어있는 모든 사람들을 일깨우고는 곧바로 자신을 제압할 것이 분명했다. 겨우 계획의 코앞까지 당도했는데 여기서 그르칠 수는 없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도록 호흡을 참은 채 잠시 들어보니 발자국 소리로 보아 한 명만 내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계단 밑에 몸을 웅크리고 숨은 채 조직원이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리며 대기하던 엘사는 이윽고 계단을 벗어나 한 쪽 발이 지면에 닿는 순간, 육신을 활짝 피고 일어나 뒤에서 목조르기를 해대며 제압을 시도했다.
하지만 여러번 기름통을 옮기느라 이미 힘이 많이 빠진 상태였기에 기술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는지, 예상과는 다르게 상대방이 거친 숨소리를 뱉으며 온 몸으로 반항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팔을 두 손으로 부여잡은 채 완전히 목을 감싸지 못하게 버티다 조금의 틈이 생기자 입을 크게 벌리며 조직원이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엘사는 주머니에 보관한 나이프를 집어들어 곧장 상대의 목에다가 박아넣었다.
입술을 위아래로 작게 벌렸다 닫으며 뻐끔거리면서 공황에 빠져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 하고 자신의 목에 박힌 이물질을 다급하게 손으로 잡아빼자 검붉은 액체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며 사방으로 정처없이 튀었다. 가죽을 뚫고 목구멍 안 쪽까지 침입한 환영하지 않은 이물질에 조직원은 두려움에 패닉한 얼굴로 목과 어깨를 적셔대는 끈적한 음혈에 손을 덜덜 떨며 어떻게든 지혈하겠다는 듯 경부를 부여잡았지만, 곧 과다출혈로 핏기가 가셔 창백해진 얼굴로 힘없이 기름으로 반들대는 바닥에 철퍽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자신의 뺨과 눈가에 튄 핏방울의 진득하고 역겨운 느낌에 잠시간 멍하니 서서 미동도 없이 한 때나마 온기를 갖췄지만 이제는 서서히 차갑게 식어가는 시체를 내려다보던 엘사는 방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더듬더듬 상황을 되짚어보려 애썼다. 꽤나 오랫동안 형사일을 하면서 이보다 참혹하고 비참한 상황은 수도 없이 봐왔고 그런 현장에 뛰어든 일도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자신은 살인을 했다. 그것도 민간인의 신분으로. 상대의 입을 막아야 한다는 판단을 뇌가 내리자마자 몸이 멋대로 시행한 행동의 결과였다. 아무리 범죄자가 흉기를 갖고 있다 한들 형사에게 기본으로 배급되는 총기를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다. 충동적이고 절제되지 않고 잔뜩 흥분한 상태의 가해자라고 해도 마구 무력을 써서 구속해서는 안 되고 우선 범인의 요구사항과 감정 상태를 알아차리고는 말로 상황을 풀어내야 한다. 하지만 방금 전 내가 한 행동은 뭐였지? 몸을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선택이었다고는 하나 계획적으로 날이 잘 들여진 나이프를 가져와 숨기고는 위급한 상황이 되자 상대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문득 린다가 자신에게 칼을 꺼두르며 공격했던 일이 떠올랐다. 마치 방금 전의 자신처럼.
어떻게 처신해야 했을까? 이미 힘이 빠질대로 빠진 상황에서 다시 팔에 힘을 주어 조르려 해도 기절시키기에 성공했을리는 만무했고, 급한대로 손바닥으로 입을 막아도 어떻게든 붙잡고 치워 소리를 지를 것이 확실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손가락을 물어뜯어 의도치 않은 부상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나이프를 사용하더라도 살인을 피할 방도가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어설프게 몸의 아무 부위나 찔렀다면 오히려 더욱 큰 비명을 초래했을 것이다. 갑작스런 고통에 충격을 받아 이성을 잃고 아드레날린을 과다하게 분비하는 육체는 잠시 아픔을 잊은 채 온 몸으로 반항하며 크게 광분하여 더 큰 소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만약에 폐를 찌른다면? 당장 칼을 뽑지 않는다면 죽음까지 시간을 벌 수도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확실히 소리를 억제하는 데에는 탁월한 효과를 보였을 것이다. 애써 목청 높여 사람을 부르려 해도 바람빠진 풍선처럼 구멍난 폐에서 소리가 새어나가며 소리치려는 그 모든 노력을 허무하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그닥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모름지기 형사란 아무리 범죄자라도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면 일단 생명부터 구해놓고 봐야했다. 검거도, 재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무게가 더 무겁고 중한 것은 사람의 목숨이었다. 본인의 손으로 직접 상해를 가한 범죄자를 그냥 내버려두고 마저 계획을 실행하러 자리를 떠난다면 경찰로서의 의무를 저버렸음에 천인공노할 지탄을 받으며 윗선의 날 선 말들과 함께 징계를 받을 게 명백했다.
비록 권고사직(사실상 해고나 다름없었다)을 당해 이제는 민간인의 신분이었지만 오랜 세월 형사로 살아온 탓일까, 엘사는 자꾸만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고 정의와 규율을 철칙으로 삼고 달려가던 과거의 본인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이제는 영혼이 육신을 떠나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하지만 한 때는 사람이었을 존재를 내려다보며 온갖 생각과 고뇌에 빠져있기에도 잠시, 시체가 바닥에 떨어지며 쿵 부딪히는 소리에 어두운 거실과 복도에서 웅성거리며 말소리가 들려오자 엘사는 조급한 마음에 고개를 이저리 돌리며 예상보다 더욱 빨리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왔음을 깨달았다. ‘하필이면 여기는 출입구에서 먼 쪽인데.’ 이미 몇 차례 수선스런 소음이 들렸으니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사람들이 올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계단을 타고 윗층으로 올라가 숨는다 하더라도 널부러진 시체와 텅 빈 연료통들이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보라며 볼썽사납게 고해질을 하며 죗값을 널리 알릴 게 확실했다.
때가 왔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어쨌든 결단의 순간이었다. 죽음과도 같은 순간이 몇 번이고 찾아왔지만 이제껏 달아나지 못 한 적은 없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란 보장은 없었지만 그러지 못하리란 확신 또한 없었다.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아, 몰라. 이 정도면 됐겠지. 제발 성공해라. 벌써부터 손가락에 딱딱하게 말라붙어 끈적이는 혈액의 감촉을 느끼며 주머니에 쑤셔박아놓은 라이터를 꺼내 들고는 총구의 방아쇠를 당기듯 라이터의 점화 장치를 두어 번 눌러 불꽃을 일으킨 뒤, 그대로 기름에 젖은 카페트를 향해 아래로 떨구었다.
한순간 눈 앞이 흰 빛으로 번쩍이면서 사방이 광채로 가득 채워지며 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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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뻑 기름을 머금은 카페트에 작은 불꽃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화르륵 불이 붙으며 복도에 수놓여진 기다란 카페트를 죽 따라 가며 어두컴컴한 복도를 훤히 밝혔다. 바닥을 벗어나 끈질긴 생명을 지닌 덩굴처럼 벽을 타고 빠른 속도로 퍼져가는 불길에 순식간에 저택 내부가 흰색과 붉은색이 섞여 기묘한 빛을 내뿜으며 훤히 밝아졌다. 마치 일련의 연쇄작용처럼 기름으로 이루어진 길을 쫓아 지하실 내부까지 거침없이 불길이 침투하자 펑, 펑 하고 발전기와 연료통이 무력하게 터지는 소리와 함께 주변에서 난데없는 큰 소음에 놀라 욕짓거리를 내뱉는 것이 들려왔다. 원래는 불을 붙이자마자 냅다 출입구를 향해 돌진해 빠져나갈 생각이었으나 예상보다 계획이 틀어진 탓에 또 다른 출입구를 찾아야만 했다.
어떻게 해야할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자 문득 계단에 떨어진 금간 휴대폰이 눈에 보였다. 아까 사살한 조직원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것인가 싶어 일단 주워들어 전원 버튼을 눌러보니 잠금이 걸려있어 쉽사리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챙겨두면 나중에 도움이 되겠지 싶어 기름과 피가 묻어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끈적거리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우겨넣자 점점 커지는 불길과 소란에 계단을 타고 윗층에서도 조직원들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칠 위험이 크니 가능하면 이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메마른 아랫입술을 짓씹은 채 엘사는 복도에 장식된 화분을 가져와 창문을 향해 내던져 깨트리고는 불빛에 반사되어 조각난 부분을 따라 반짝거리는 유리 파편들을 애써 조심스레 피해가며 창틀을 훌쩍 뛰어넘었다. 까슬까슬하고 따가운 조각들이 손과 발바닥에 박히는 게 느껴졌지만 이제와서 이까짓 고통 때문에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화염은 점점 커지며 1층을 전부 집어삼킨 걸로는 모자랐는지 게걸스럽게 2층과 3층 너머도 탐닉하기 시작했다. 저택 내부에 여러 창문들이 불길의 압력을 이기지 못 하고 소름끼치는 쨍그랑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유리조각을 뱉어내며 터져나갔다. 속을 들끓게 하고 목을 턱 막히게 하는 매캐한 검은 연기가 지들끼리 뭉쳐 커다란 형상을 이루며 저택으로부터 몸을 비집으며 빠져나왔다.
외부에 있던 정원으로 불씨가 사정없이 타닥 튀며 곱게 정돈된 풀과 화단과 나무에까지 표독스러운 화마가 손길을 뻗쳐나갔다. 마치 자신을 위해 마련된 지름길인 듯 장작처럼 활활 타오르는 화단을 타고 거침없이 발걸음을 놀리던 불길이 주택 주변에 위치한 차고와 경비견들을 가두는 울타리에도 아가리를 쩍 벌리며 집어삼키려 애쓰고 있었다. 현관문 주변에 있던 조직원들은 그나마 수월하게 빨리 탈출할 수 있었지만 윗층이나 다른 곳에 배치되어 있던 자들은 이미 화재로 인해 막혀버린 출입구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패닉하여 저택에 갇힌 채 곳곳에서 두려움에 가득 찬 울부짖음만 내뱉었다.
린다가 뒤늦게 상황을 눈치챘다고 한들 소용없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부하들을 이끌고 여기로 온다한들 최소 몇 시간은 걸릴 테고, 그 정도면 진작에 저택은 불타 사라지고 자신은 이곳을 빠져나간 후일 테니까.
불 붙은 저택을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 밖에 대기하던 다른 조직원들은 모두 엘사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는지 오직 화재에만 집중하며 어떻게든 불길을 진압하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하고 있었다. 덕분에 수월하게 개구멍을 찾아낸 엘사는 여러 잔풀과 나뭇가지와 거칠게 뜯겨진 철창의 끝부분에 몸이 베여 생채기가 나든 말든 무시하며 흙바닥에 몸을 바짝 붙이고는 흡사 짐승처럼 엉금엉금 기어 드디어 저택으로부터 벗어나 밖으로 빠져나왔다. 주저없이 화르륵 불타오르는 주택 덕분에 깜깜밤중의 우거진 깊은 숲 속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주변의 모든 것들이 확연히 눈에 들어올 정도로 산은 한낮 태양의 광채보다도 밝았다.
불법으로 중축한 건물이었는지, 아니면 그마저도 생각할 여유가 없는 건지, 워낙 산세가 험하고 깊은 탓에 쉽사리 진입이 안 되는 건지, 그도 아니면 결국에는 전부 범죄자들이니 나중에 잡혀들어갈까봐 지레 겁 먹고 신고하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꽤나 소수의 인원이 한정된 장비를 가지고 제압하기에는 불가능할 정도로 불길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립다고 생각할 정도로 익숙한 사이렌 소리나 소방차 하나 보이지 않았다. 주거 방화죄로 나중에 처벌 받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어차피 불법으로 지은 건물이 맞다면 어느정도 감안해주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희망을 품으며 엘사는 자갈과 풀과 부서진 나무조각들로 이루어진 거칠고 날것의 흙길을 고스란히 맨발로 밟으며 힘껏 달려나갔다.
산불로까지 번지면 어떻게 되지? 전자는 고의성이 있지만 후자는 의도치 않았으니 좀 참작되지 않으려나. 아니, 잠깐. 정말로 그렇게 될 줄 몰랐느냐고 물으면 곤란한데. 어찌되었건 바로 주변에 화단과 산이 있으니 최악의 경우에는 산불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을 거라고 아예 예상을 못 한 건 아니니까. 아니, 아니, 아니지. 일단은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가능하면 한시라도 빨리 저택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우선이야. 혹여나 화마가 제압되어 뒤늦게 내가 사라졌다는 걸 눈치챘다 한들 이미 잡기에는 너무 늦었을 정도로 가야해. 가능하다면 더 빨리. 더 멀리. 더 안전한 곳으로.
졸가리에 긁히고 흙바닥을 뚫고 빠져나온 나무 뿌리에 걸려 구르며 넘어지고 날카로운 돌에 찔려 발바닥이 온통 멍들고 피투성이가 되어 엉망이었지만 아드레날린에 그리 큰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경험, 언제 또 겪어봤더라. 맞아. 배 위에서 린다랑 싸울 때였나? 아니야. 저택에 처음 납치된 날, 내 어머니의 과거와 드디어 마주하게 된 날, 그 때 겪어봤던 감각이야. 서슬퍼런 린다의 분노와 증오가 한껏 서린 칼날이 몸에 박히면서도 어떠한 아픔이나 통증이 느껴지지 않던 그 순간이 문득 엘사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아드레날린은 불사의 명약이나 모든 것을 낫게 하는 기적이 아니었다. 이 순간이 끝나고 나면 그 후에 찾아올 부작용과 단점들이 호시탐탐 그 때만을 노리며 엘사를 언제든지 덮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 곧 소근육이 쇠퇴하여 작은 동작을 정확히 하기 힘들어지고, 폭발적인 기력을 내기 위해 체내로 끌어온 포도당이 떨어지며 저혈당으로 인해 극심한 피로와 함께 몸에 떨림이 찾아올 테고, 혈압이 낮아지며 갑작스레 기절까지 할 수도 있었다.
그 때가 오기 전에 다른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이렇게 무작정 달린다고 해서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체력은 한계가 있었고 곧 몸은 안락함과 휴식을 찾아 모든 행동의 결정권자인 뇌에게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이 행태에 항의하며 파업을 시도할 터였다. 몸은 끊임없이 계속 달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온갖 생각을 하던 찰나, 순간 확 꺾어내려가는 비탈길을 보지 못하고 거침없이 발을 뻗은 엘사는 그대로 아래를 향해 데굴데굴 구르며 추락에 가깝다시피 사경을 타고 곤두박질 쳤다. 잠시간의 어지러움과 혼란스러움이 끝나자 땅에 머리를 박고는 사정없이 온 몸을 두드리는 무겁고 아린 통증에 쿨럭거리며 눈을 찡그리며 인상을 쓴 채 겨우 덜덜 떨리는 육체를 간신히 팔로 지탱해 일으키자, 문득 시야에 린다의 칼에 찍혀 여전히 팔에 남아있는 흉터가 들어왔다.
린다.
‘그래, 아직 할 일이 남았지.’ 물 먹은 솜마냥 중력에 굴복하여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으려는 육체를 기어코 꾸역꾸역 일으켜 세운 뒤 엘사는 다시금 두 발로 단단히 지면을 받치고 서서 여전히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도 잡지 못 한 채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부드럽고 축축한 흙이 아닌 메마르고 까슬한 감촉에 주변을 살피니 암순응한 눈에 들어온 것은 오래되긴 했지만 비포장도로나 짐승들이 나다니는 산길이 아닌 분명한 시멘트 도로였다. ‘여길 따라 가다보면 분명히 마을이 나올 거야.’ 비탈길에서 덱데굴 구를 때 삐끗한 건지 오른쪽 발목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져 순간 주저했지만 걸을 수 없다면 기어서라도 가면 된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억지로 기력을 일으킨 뒤 절뚝이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발전기고 뭐고 다 폭파되었으니 몇 시간 동안은 연락조차 하지 못하겠지. 불 진압에 애쓰느라 내가 사라진 것도 모를 테니 이 때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해…’
뒤뚝뒤뚝 걸으며 도로를 잘 살펴보니 곳곳에 군데군데 금간 흔적과 구멍이 움푹 파이고 부서진 흔적이 널려 있었지만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시멘트 길인 것은 확실했다. 다만 오랫동안 보수하지 않은 듯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는 도로에 설마 기껏 마을을 찾아낸다 하더라도 버려진 민가 뿐이면 어쩌지,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고 관리 받지 않아 진작에 수도나 전기가 끊긴 부락이면 어쩌지 하는 온갖 불안이 머릿속을 잠식하기 시작했을 때 순간 뒤늦게 아까 주웠던 핸드폰이 떠올랐다. 자기도 모르게 힘이 빠져 덜덜 떨리는 팔을 애써 무시하며 주머니를 더듬어 꺼내자 하도 심하게 이곳저곳 구른 탓에 아까보다도 더 심하게 깨져 거의 산산조각 수준으로 금이 난 액정이 보였다. 버벅거리기는 하지만 다행히 느릿하게나마 터치가 되는 화면에 안도감을 느끼기도 잠시 비밀번호가 걸려있다는 걸 다시금 깨달은 엘사는 피로감과 고단함으로 인해 도무지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채찍질하며 상황을 타개하려 애썼다.
모든 핸드폰에는 분명 잠금이 없어도 전화를 걸 수 있는 수단이 있을 텐데. 119에 실린 환자의 보호자에게 연락하려 들 때, 만약 환자의 신원을 확인할 방도가 없을 때면 하는 선택이 뭐더라? 어떤 버튼을 특정한 방법으로 몇 번 길게 누르면 핸드폰의 주인이 설정한 긴급 전화번호로 연결된다고 했던 거 같은데. 긴급, 긴급 전화번호… 맞아. 긴급통화가 있었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줄리아의 전화번호를 더듬더듬하게 나마 떠올린 엘사가 천천히 깨진 화면 위로 손가락을 놀려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응답하지 않자 초조함을 느끼며 끊고는 재차 다시 걸었다. 하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자 바잡는 마음을 애써 눌러대며 원인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새벽이어도 분명히 근무할 텐데, 왜 안 받지? 오늘 당직이 아닌가? 아, 설마 비번인가? 빌어먹을, 연락이 안 닿은 지 오래됐으니 스케줄을 알 수가 없잖아. 아니면 그저 모르는 번호라서 안 받는 걸까.
그냥 경찰한테 연락할까 하는 마음이 잠깐 들었지만 내부에도 분명 린다 쪽 사람이 있을 게 분명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운이 없다면 곧바로 신고를 받은 변절자가 제멋대로 허위 신고로 처리하고는 린다에게 자신을 넘겨버릴 지도 몰랐다. 이제 와서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경찰에 신고야 결국 필수로 하게 될 테지만, 그 전에 무조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려야 했다. 그래야지 최소한의 보호가 이루어질 터였다. 세라 번호가 뭐였더라. 제기랄, 평소에 좀 외워둘 걸. 배터리도 이제 얼마 없어. 시간이 없는데, 어떡하지? 줄리아는 전화도 안 받고. 그 외에 믿을 만한 사람이 누가 있지. 누구에게 알려야 하지, 누구에게…
“센.” 센. 맞아, 센이 있었지. 낙담하던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믿음직하고 의지되던 또 한 사람의 모습에 엘사는 욱신거리는 손가락을 겨우겨우 움직여 또 다시 전화를 걸었다. 머릿속이 극심한 피로와 통증에 점점 흐릿해지며 무뎌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성을 마비시키고 참을 수 없이 쏟아내리는 졸음을 가까스로 무시하면서 무량겁의 시간과 같은 전화 신호음을 계속 들으며 걷던 찰나, 마침내 상대방이 전화를 받으며 의아함과 짜증이 담긴 졸린 목소리로 누구냐고 답해왔다.
“누구야?”
“센! 센, 저예요. 길게 말 할 시간이 없어요. 당장 줄리아나 세라한테 연락해서 위치 좀 추적해줘요.”
30초 정도 통화가 이어져야 위치를 알 수 있댔나. 제발, 그 전까지 꺼지지 마라. 제발! 엘사의 다급한 목소리를 알아챈 센이 곧바로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는 잠에서 깬지 얼마 되지 않아 살짝 잠긴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어디야? 주변에 가로등은 보여? 있으면 거기 적힌 번호라도 말해봐,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어?” 점점 흐리멍텅해지는 시야를 인상을 써대며 간신히 억지로 붙잡으며 주변을 둘러보자 흐릿하긴 하지만 저 멀리 빛이 보이는 걸 보니 민가가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너무 외진 곳이라 가로등도 사람도 보이지 않아요. 다만 2KM 정도 내에 불빛이 조금 보여요. 산 속이 워낙 어두워서 거리가 잘 가늠이 되진 않지만, 대략 그 정도인 것 같아요.” 엘사의 대답을 들은 센이 무어라 말하는 게 느껴졌지만, 이윽고 점점 작아지더니만 곧 침묵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갑작스런 고요함에 엘사가 당황하며 여러번 재차 센의 이름을 불렀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황급히 핸드폰을 바라보니 전력이 다 나간 것인지 혹은 고장난 것인지 진작에 칠흑같이 검은 화면만이 깨진 액정 아래에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었다.
제기랄, 센이 내 위치를 알아냈을까? 경찰이 아니니 센 혼자서 장소를 추적하기는 힘들 텐데. 줄리아한테 연락한다고 해도 알아내는데 얼마나 걸릴지 몰라. 그래도 일단 연락은 했으니 다행인가. 한탄하며 이미 고장난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에 쑤셔넣고는 이제 마지막 남은 희망인 저 먼 발치 희미하게 반짝이는 불빛을 향해 마치 어두컴컴한 검푸른 심해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티끌 만한 초롱안강어의 발광체를 따라 멍하니 쫓아가는 해수어 마냥 엘사는 부지런히 계속 발길을 옮겼다.
제발, 제발, 내 몸아. 조금만 더 버텨라. 제발 사람이 있어라. 작은 경찰서라도 있어라. 제발, 신이시여.
𓍝
절뚝이며 무거운 몸뚱아리를 이끌고 느리게나마 힘겹게 계속 앞으로 나아간지 얼마나 되었을까, 슬슬 동이 틀 시간이 되었는지 옻의 빛깔과 같은 암막한 검은 빛이 몸을 움츠리며 산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에 지레 겁을 먹고는 점점 구석으로 쫓겨나 메 아래로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 아직도 검은 연기가 치솟는 걸로 보아 화재는 여즉 진압되지 않은 듯 싶었다. 멍하니 뒤돌아서 하늘을 뒤덮는 먹구름과 같은 매캐한 안개시리를 보다가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엘사가 다시 앞을 돌아보니 아침잠이 없는 노인들 몇 명이 온통 상처와 흙먼지 투성이인 엘사를 보고는 놀라 저들끼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제서야 본인이 민가까지 도달했음을 깨달은 엘사가 건조하다 못해 바짝 마른 입술을 우물거리며 몸 안에 웅크려 어떻게든 나오지 않으려 버티는 목소리를 강제로 끄집어내 중얼거렸다.
“경찰, 경찰을 불러주세요. 제 이름은 엘사입니다. 엘사, 브라이언, 트…”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시야가 갑자기 돌아가더니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는 게 느껴졌다. 아니, 옆으로 쓰러졌던가? 무엇이 앞이고 무엇이 뒤이며 어디가 위아래인지 구별조차 되지 않았다. 간신히 필요한 사항들만을 알리는데 성공한 엘사는 육체를 침식하는 오랜 시간 쌓여온 피곤함과 곤폐를 온 몸으로 느끼며 힘없이 무력하게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노인들이 무어라 외치는 게 귓가 너머 저편에서 느껴졌으나 주럽이 찾아온 몸은 외부의 그 어떠한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도록 육신을 내리누르며 귀와 눈을 굳게 닫았다. 그 순간 문득 짧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가 다시 사라졌다.
린다네 조직원이 경찰 쪽에도 있을 텐데. 그쪽에서 먼저 날 찾으면 어떡하지. 아, 줄리아, 세라, 제발 나를 찾아줘…
극이 끝난 무대에 막이 내리듯 눈꺼풀이 내리앉더니 곧 눈 앞이 어둡게 변하며 암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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