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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뒤에도 삶이 있을까? 애초에 삶과 죽음을 나누는 기로는 무엇인가? 단순히 한 번 박동할 때마다 온 몸으로 피를 내보내며 힘차게 뛰어오르던 심장이 마침내 행동을 멈추고 이윽고 몸의 모든 세포와 근육이 활동을 정지하고 영원한 수면을 취하기로 결심하였을 때, 그래서 한 때는 젊고 활기를 띠던 육신이 차디 찬 바닥에서 구역질 나는 고래의 썩어버린 지방과 같은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부패해 갈 때를 죽음이라 표현하지 않고, 자신 스스로 생각하고 고뇌하고 기억을 되새김질 하지 못 하게 되는 때,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하게 되는 순간을 죽음이라 표현한다면, 지금 현재 살아있는 것은 누구이고 죽어있는 자는 누구인가?
육체에 얽매이지 않은 삶은 이 얼마나 자유로운가?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이 일반적으로 대중에게 널리 통용되는 개념의 불귀가 아니라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로고스를 중심으로 이성이 존재하냐 그렇지 않느냐로 생과 사가 결정된다면, 지금 내 안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은 모두 살아있다고 판단할 수 있으렷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금시 내 생각이나 사상이 내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어떻게 확언할 수 있는가? 과연 정녕 그 누구로부터도 영향 받지 않고 타인에게서 비롯된 생각이 아닌 온전히 나로부터 기인한 것들이라고 확실하게 단정지을 수 있는가?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감정이, 이념이, 사고나 견해가 정말로 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해내 도출되어진 결과물이라고 완고하게 답할 수 있는가?

내가 아득하고 축축하며 어두운 동굴로부터 벗어나 탯줄을 달고 고통과 환희가 한데 뒤섞여 어지러운 이 세상 밖으로 태어났을 때에도, 금지된 과실을 베어물어 인간이 세상의 모든 원죄를 품도록 현혹한 벌로 다리를 모두 잃은 어느 오래된 종교의 죄 지은 미련한 축생처럼 바닥을 기어 다닐 때에도, 마침내 두 발로 당당히 서서 새파란 하늘을 가득 메운 공기를 폐로 가득 들이마쉬고 살아움직이는 모든 존재에게 기꺼이 발 딛을 곳을 내어주는 단단한 땅을 마구 짓밟으며 속된 망아지 마냥 나다닐 때에도,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던 근원이자 고통의 뿌리인 성수를 멋모르고 착각하여 들이마셔 목구멍을 적시며 내 몸 안으로 쏟아부었을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고찰하며 고뇌하고 괴로워했다.
나는 이제 내가 살지 않은 시대에 대해 기억하고 있고, 내가 아마 평생 갖지 않고 느껴보지 못 했을 감정들을 품고 있으며, 수많은 이들의 삶과 죽음을 지켜보았고, 그들의 동기와 사명을 머릿속 깊이 각인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은 누구로부터 비롯된 것들인가? 나와 같은 육신을 공유하고, 끊임없이 내 머릿속에서 자신의 목적과 원한을 해결해달라 아우성치는 자들과 나를 어떻게 분리할 수 있는가?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레나 잭슨.

당신이 저지른 죄가 후대에게까지 이어져 결국 나에게로 내려왔어. 나의 원죄는 무엇일까. 당신의 자식이라는 것? 영웅이 될 자질을 타고 났다는 것? 레나 잭슨, 당신의 삶이 이렇게 끝날 리 없다는 걸 지금은 알아. 과거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고 있지. 이 모든 걸 계획하고 끝끝내 실행으로 옮긴 당신이 고작 육체가 살해당했다고 세상에서 지워졌을 거라 생각하진 않아. 그럴 수가 없지. 누군들 당신이랑 단 한 번이라도,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도 말을 섞어봤다면 그렇지 않으리라 확신할 거야. 당신은 죽지 않지. 죽음이란 그저 육체의 일시적인 상실일 뿐이야. 의식이 살아있는 한, 사념과 생각이 존재하는 한, 자아가 또렷하게 유지되는 한 인간은 죽지 않는다네. 우리가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그 때에야 비로소 죽는 것이지.

아, 엘사. 가엽고도 어리석은 레나의 피조물아. 너는 죽음을 원하지만 그 누구도 너에게 그걸 바라지 않는구나. 성인이란 원래 그런 법이지. 레나로부터 비롯된 사명을 이제 네가 물려받을 차례란다. 이런, 그렇게 슬피 울지 말거라. 눈물을 흘리지는 않지만 네가 울고 있다는 걸 나는 알아. 나? 아니지, 우리는 안단다. 네 어머니가 여즉 네 곁에 남아 주위를 맴돌고 있어. 너도 알고 있지? 레나의 장례식 이후,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건만 이제껏 몇 번이나 만나봤지 않느냐. 그게 바로 죽음이란 헛된 것이라는 의미란다. 옛부터 세상에 혼돈과 무질서가 가득할 때면, 성현이 나타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규율과 질서가 바로세워진 이상적인 사회가 건립될 수 있도록 기꺼이 자신의 삶과 육체, 시간, 현재와 미래 그 모든 것을 바쳐 희생했지. 네 어머니가 그리했고 이제 그 과업이 네게도 내려왔으니 어떤 짓을 해야하는지 잘 알겠지.

그리 두려워할 건 없단다. 결국 대부분의 인간이 무서워하는 것은 죽음이야. 세상으로부터 잊혀지고, 평생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던 오랜 친구이자 동반자인 육신이 허무하게 썩어없어져 흙으로 돌아가고, 한 때나마 존재했을 자아가 완전히 사라져 내가 누구이고 타인은 누구인지 구별조차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 두려워 그렇게도 기피하고 부정하려 들고 어떻게든 정해진 굴레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거겠지. 그건 누구나 그렇단다. 하지만 엘사, 너는 겁 먹을 필요없어. 우리를 봐. 우리를 보려무나. 몇 백년을 살아온 이들이 아직도 네 곁에 서서 여전히 온갖 말들을 중얼거리며 버젓이 살아있어. 네 어머니인 레나 잭슨의 위대하고 훌륭한 결과물이지! 그러니 그리 괘념치 말거라. 너는 죽지 않을 테니까. 네게 죽음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엘사. 그런 건 비천하고 어리석은 물질적인 존재들이나 가지는 결말들이지. 너는 그렇지 않아. 너는 레나의 자식이고, 우리들의 영웅이니까. 그렇지만 으레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머리로는 인지하고 있어도 몸은 쉽사리 따라주지 않는 법이지.

걱정 말거라. 그렇게 염려할 필요없어. 우리가 도와줄 테니까, 너는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돼. 너의 육신은 곧 우리의 몸이기도 하니까.

편히 쉬고 있거라. 원한다면 한숨 잠을 자고 있어도 좋아. 잠시만 눈을 감고 있으면 곧 모든 게 끝날 거다. 위대한 과업을 이어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 네가 선뜻 나서지 못해도 이해한다. 그러니 우리가 도와주마. 결국 너의 사상은 곧 우리의 생각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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