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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angelion Symphony 1 - I. shinji
https://youtu.be/Ys0NRXKKSO8
42:00 ~ 48:20
넬 - 현실의 현실
https://youtu.be/2qn39WhVI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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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음을 맞이하기 까지.
소년은 느릿한 숨을 내쉬었다. 흰 셔츠는 붉은 색으로 물들어 번졌고 정장은 이미 너덜너덜 해진지 오래였다. 그는 힘겹게 숨을 내뱉으며 동공을 이리저리 굴렸다. 시야는 온통 붉게 물들어 마치 온 세상이 붉게 변한 듯 했다. 아, 소년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튀어나왔다. 이런 결말이구나. 그는 죽음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코 앞까지 다가온 죽음은 그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온 몸으로 체감할 만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빗소리에 어울려 여러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밖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 머릿속에서 쿵쿵 울려 퍼지는 듯 한 소리였다. 그는 얼마남지 않은 시간동안 기억을 더듬어 되내어 보았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지.
*
그는 똑똑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아주 성숙한 편이었다. 그는 스스로도 그 것을 자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남들보다 더 빨리 새로운 무언가를 깨우칠 수 있었다. 그는 그 사실에 만족하며 지내왔다. 다른 사람들과 별 다를 것 없이. 그러던 어느 날, 사고로 한 팔이 부러졌었던 날. 그 날 그는 그때부터 약간의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다. 조그마한 욕심과, 조그마한 욕망. 몬스터는 소년에게 속삭였다.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어. 너와 내가 함께하면 뭐든지 이룰 수 있어. 이 세상의 지배자가 되는 거야. 소년은 그 말이 터무니 없다고 생각하고, 그 몬스터를 없앴다. 나는 바이러스야, 사라지지 않아. 넌 나를 없애지 못 해. 몬스터가 사라지면서 비웃듯이 내뱉은 마지막 말들은 소년의 기억 한 구석에 자리잡기 충분했다. 그것은 소년을 미는 원동력이 되기에 충분했었다. 바이러스. 진득하게 자신을 옭아매오며 점차 구석구석까지 뼈저리게 스며든 말은, 소년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했다. 소년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성숙하고 이성적이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거리낌없이 일들을 저지를 수 있었다. 그는 욕심이 생겼다. 나라면 할 수 있어, 라는 조그마한 자만심과 함께. 그로부터 시작된 그의 조그만 변화는 아주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진행되었다.
주변에서는 그런 그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늪에 잠기듯이 아주 느릿한 변화였으니까. 그는 똑똑했다. 그리고 영리했다. 심리학에 조애가 있었던 그는, 지능이 있으면 사람이나 몬스터들이나 거기서 거기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인간주제에 우스운 소리를 한다고 비웃거나 간혹 이성보다 감정이 먼저 앞서는 몬스터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멍청한 자들의 무모한 반항일 뿐이라고 여길 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힘이 아닌 머리를 써서 몬스터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꼬드기고, 현혹하고. 그리고 그런 그를 몬스터들은 따랐다. 사기꾼과도 같은 현란한 말솜씨로 대상의 심리를 파고 들었던 그는 손쉽게 무리를 모을 수 있었다. 말이 안 통하는 상황이 생겨도 그에게는 간단한 일이었다. 이미 자신을 따르는 수 많은 무리가 있지 않은가. 그럴 때는 힘을 사용하면 그만이었다. 자유, 그것은 아주 달콤하고도 짜릿한 것이었다. 착한 아이, 모범 학생이라는 규율에서 벗어난 그는 난생 처음 겪는 아늑하고도 광활한 자유에 흠뻑 심취되어 마음대로 날뛰었다. 자신을 구속하던 목줄이 풀려 자유를 되찾은 들개처럼, 그는 그것에 매료돼 더욱 무리를 끌어모았다. 순전히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욕심은 어느새 자기 자신마저 집어삼켜 버릴 정도의 크기로 커져 있었다. 그때 쯤, 그의 주변에서 무언가의 변화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 마르코가 요즘 이상해.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장 가깝게 지내는 소년이 꺼낸 말 이었다. 요즘 조금 이상하긴 했지. 그에 동조하듯 다른 한 소년이 말을 꺼냈다. 스타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은 계속 말을 덧붙였다. 밤마다 어딜 항상 나가. 가끔씩 낮에도 사라지기도 하고. 하지만 대체 어딜 가는지를 도통 모르겠어. 나한테 말도 안 하고 간다는 건 이상하지 않아? 스타는 불만을 토로하듯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내뱉었다. 주변에서도 다들 같은 반응이었다. 마르코 디에즈라는 소년이 요즘 자주 말도 없이 사라진다, 성격이 많이 가라앉은 것 같다하는 어쩌면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다. 보통의 경우였다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사람은 누구나 변하니까. 하지만 스타, 그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누구보다도 마르코와 가깝게 지냈다. 그는 이것이 단순한 심경의 변화라고 생각하기에는 어딘가 이상하다고 여겼다. 그는 그 때부터 마르코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계획을 들은 친구들과 악마, 톰이라는 소년은 재밌겠으리라 여기며 이에 동참했다. 시간낭비든 아니든 누군가의 비밀을 알아낸다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몰라도 재미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며칠 후, 소년은 그들에게서 완전히 사라졌다.
마르코는 이제 점차 제법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몬스터들은 그를 보스라고 부르며 그를 추종하고 따랐다. 그는 그 동안 여러 영리한 몬스터들과 거래를 하며, 자신의 발을 더더욱 넓혀갔다. 말이 통하고 지성도 어느정도 높다 싶고 무리도 갖춘 몬스터를 만났을 경우에는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와 계약을 주도했다. 그는 항상 모든 상황에 대비하며 지냈다. 혹시 모를 상황이란 게 있으니까. 마르코는 자신의 목소리와 자신이 평소에 입고 다니는 붉은 후드와 남청색의 바지는 너무 눈에 띄기 쉽고 들키기에 용이한 복장이라고 생각하여 블러드 문 파티 때 입었었던 전통 복장을 입었다. 검은 양복과 무늬가 그려진 해골 가면. 가면에는 음성 변조기를 달아 항상 쓰고 다녔다. 죽은 자들의 날 때 입는 전통 복장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그 때 이미 결말을 암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때와 같이 거래할 상대를 찾던 그는 여러 손을 통해 톰과 닿게 되었다. 처음에는 짐짓 놀랐으나 가면을 쓴 탓인지 톰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 하자 마르코는 안심하며 거래를 진행했다. 물론 서로 아는 얼굴이다 보니 들키지 않도록 더욱 굳게 긴장을 하고 있었다. 되도록이면 다시 만나기를 꺼렸으나 다른 몬스터들과는 다르게 악마였던 그는 확연히 다른 거래에 비해 이득이 좋았었다. 톰과의 거래를 중지하려면 그에 몇 배는 되는 거래를 뛰어야만 빈 여백을 채울 수가 있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톰과 거래를 하기 위해 그는 나서야만 했다. 자신 대신 대타로 다른 몬스터를 내세울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톰은 보스가 아닌 다른 찌그래기들하고는 거래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직접 대면하기를 요청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여전히 밝혀낸 게 없고, 소년은 순조롭게 세력을 다져가던 때. 그랬었던 다른 때와 똑같이 거래를 하며 서류를 건네다가, 톰이 실수로 종이를 땅에 떨어뜨려 주우려고 몸을 숙였던 그 순간. 가면이 떨어졌다. 톰이 몸을 숙이면서 가면과 부딪혔던 탓이었다. 어쩌면 가면을 지탱해 주던 실이 너무 오래되어 스스로 끊어진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맨 얼굴로 톰과 마주한 소년은 동공이 크게 확장되어 숨을 삼켰다. 다시 몸을 들어 미안하다 사과를 하려던 톰은, 자신의 거래자의 맨 얼굴을 보고는 벙 찔 수밖에 없었다.
- 마르코.
- ...
- 네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야?
크게 충격을 받은 듯한 톰은 손을 뻗어 마르코의 어깨를 잡으려고 했으나, 소년은 거부하듯 강하게 손을 쳐내고는 한 손으로 황급히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틈 사이로 톰을 노려보던 마르코는 가면을 챙기며 자신의 몬스터들을 불렀다. 톰이 급하게 잠깐만, 마르코! 우리 이야기 좀 해! 라고 소리를 지르며 그를 불렀지만, 그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톰은 한 동안 멍하니 소년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중얼거렸다. 스타에게 알려야 해.
더 이상 자신의 집이 아닌,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온 마르코는 온갖 욕짓거리를 하며 이미 선이 끊어진 가면을 신경질내며 바닥에 내리던졌다. 그 빌어먹을 자식! 제기랄, 일이 어긋났어! 이건 내 계획에 없었던 일이었다고! 한참을 소리를 지르며 분개하던 그는, 그가 편애하던 몇 몇 몬스터들이 다가와 진정하라고 말을 건네자 간신히 호흡을 다잡으며 분노를 꾹꾹 눌러 담으며 삼켰다. 예상못한 변수는 그에게는 고통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실수는 만회하면 돼. 멍청한 개는 훈련받은 사냥개를 잡을 수 없어. 개들이 많든 적든 결과는 똑같아. 머리를 굴려, 마르코 디에즈. 그 잘난 머리로 잘 생각해 보라고. 그는 다시금 차근차근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며 이 같은 변수가 다시는 일어나지는 않도록 자신을 채찍질하며 다잡았다.
톰은 마르코의 집으로 찾아가 그의 친구들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거래자가 처음 자신에게 찾아온 날. 그와 했던 거래들과 조건 및 계약 내용들. 그의 차림새와 그를 따르던 수하들. 그리고 그의 정체.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의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그저 단순한 심경의 변화겠거니 했지만, 이와 같은 것이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예상하지도 못했었다. 설마 자신의 친한 친구가, 토피와도 같이 되었다고 생각이나 했었겠는가. 톰이 말을 끝 마치자 여러 이야기들이 오고 가기 시작했다. 마르코와 싸워야 한다, 말로 설득해야 한다, 그를 잡아야 한다 등등 많은 의견들이 엇갈리고 서로 부딪혔다. 그러다 내놓은 결론은 말로 설득을 한 뒤에 정 안 되면 힘을 써서라도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마르코를 찾는 게 우선 이었다. 톰하고는 이미 거래가 파기되었으므로 그가 다시 찾아올 일은 만무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넓은 인맥과 수하들이 있었다. 만약 마르코가 몬스터와 연결되어 있다면 마음만 먹으면 그를 찾아내는 일 쯤이야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었다. 만약에 그가, 모든 거래를 파기하고 깊숙히 숨지만 않았더라면. 혹여나 그렇게 되어 영영 못 찾아내기 전에 서둘러 그를 찾아내어야만 했다.
*
안녕.
마르코가 그의 옛 친구들을 만나자 마자 꺼낸 말이었다. 소년을 찾는 건 예상외로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는 이미 몬스터들 내에서 많이 유명해져 있었고, 몬스터들의 세계에서 인간이 활동한다는 것 자체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더욱 빨리 찾을 수가 있었다. 마르코. 스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많은 몬스터들에게 둘러쌓인 채 가면을 쓰고, 짙은 검은색의 양복을 입고 자신의 앞에 마주하며 서 있는 그가 자신의 친구가 아니기를 바라면서. 제발 자신의 제일 친했었던, 그 소중한 친구가 아니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그가 자신들을 보고 꺼낸 그 말 한마디에 들린 목소리는 그의 믿음과 소망을 깨부수기에 충분했다. 얼마 간의 정적이 흐른 후, 소년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 잡고 떨리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자, 마르코. 그런 소년의 대답에 그는 고개를 천천히 내저으며 대답했다. 공격해.
그 말을 시작으로 수 많은 몬스터들이 일제히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하며 그들은 마르코를 쳐다 봤지만, 그는 멀리서 무덤덤히 반 쯤 내리깐 눈으로 가면 뒤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톰은 공격에 단순한 겁주기가 아닌 진심으로 살의가 담겨 있다는 것을 느끼자 인정사정 봐줄 것 없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까닥하다간 정말로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톰은 마르코가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치며 말했다.
- 저건 이미 친구가 아니야, 스타! 그냥 적일 뿐이라고!
소년은 순간 인상을 찡그렸지만 가면 뒤에 얼굴이었으므로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아니지. 그러니까 공격해. 반격해 봐. 뭘 말성이는 거야? 나는 이미 너희들을 죽이려고 했었는데. 그는 더욱 크게 소리치며 명령했다. 죽여버려! 그에 몬스터들의 공격이 더욱 거세지며 폭우가 내리듯 퍼붓자 스타도 더는 막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미 자신의 귀로 똑똑히 현실을 들었다. 이제는 더 이상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의 바람을 믿을 수도 없었다. 하나 둘 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소년은 결단을 내린 듯 소리쳤다. 마르코를... 공격해야 해. 몬스터들의 보스는 마르코 였으므로 무리의 우두머리를 치는 것이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이었다. 하나하나 일일이 공격하다가는 끝이 없었다. 떨리는 손을 겨우 진정시키며 마르코를 향해서 공격을 하려고 시도했지만, 그의 옆에는 수 많은 수하들이 지키고 있었으므로 틈을 노리는 수 밖에는 방도가 없었다. 우두머리를 잃은 무리는 흩어지기 쉽다. 그것이 스타가 노리는 목적이었다. 죽을 필요도, 죽일 필요도 없다. 보스가 다치기만 한다면. 조금의 틈이라도 생긴다면. 마르코를 우리 쪽으로 데려오기만 할 수 있다면. 그러기만 한다면 이 후 나머지 일들은 쉬웠다. 문제는 어떻게 마르코에게 닿느냐가 크나 큰 문제였다. 큰 공격을 쓰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쉽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마르코 또한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스타가 자꾸만 주저하며 공격을 중간에 멈추자 톰이 크게 소리 질렀다. 정신 차려, 스타! 그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뜨인 소년은 숨을 고르고 완드를 마르코가 있는 방향으로 돌려 주문을 외쳤다.
커다란 빛이 몬스터에게로 날아갔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가슴에 큰 고통을 느꼈다.
*
그는 이제 정말로 얼마남지 않았음을 실감하며 점점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 욕심을 위해서 친구를 버렸던가.
배반의 대가였다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는 이런 결과가 자신의 최후일 줄은 예상할 수도 없었고, 계획에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는 픽 하고 작은 실소를 내뱉었다. 이젠 너무 늦었는데. 어쩌면 그는 너무 큰 걸 바라왔었던 걸 지도 모른다. 잡을 수 없는 것을 좇아 무모하고도 어리석게 달리던 꼴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순간의 치기에 그만 넘어가 버렸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렴 어떤가. 이제는 후회도, 슬픔도, 사과도, 죄책감을 가지기에도 너무나 늦었다. 이미 그 동안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다시 원래의 그 자리로 돌아갈 기회는 언제나 열려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무시하고 자신의 야망을 좇았다. 이것은 그의 조그마한 욕심으로 부터 시작된 이제는 자신을 삼켜버린 야망에 대한 대답이었다. 동화책에서 악당은 항상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것도 쓸쓸하고 고독하게. 그리고 주인공들은 해피엔딩을 맞는다. 자신은 그 동화에서 스스로 악당 역을 자처해서 맡은 꼴일 뿐이었다. 야망도, 욕심도, 후회도 뭣 하나 완전하게 이루지 못한 채. 주변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꽤나 큰 목소리 였음에도 불구하고 웅웅 거리며 무언가가 귀를 막은 듯 조그만하게 들려왔다.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 비명 소리, 울음 소리, 빗소리가 한 데 어울려 마치 자신을 위한 진혹곡인 것 같았다. 서서히 그의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앞이 이제는 완전히 흐릿하게 변해 잘 보이지도 않게 되자, 그는 마지막 숨을 내뱉었다.
긴 어둠이 그를 천천히 잠식하며 감싸안았다.
*